어느 못생긴 연세대 여학생의 글

내가 처음으로 내가 ‘못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세상이 스마트하지도 않았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요즘만큼이나 아이들이 빠르게 흡수하며 자라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나는 외모에 관심이 없는 아이였다.

거울을 볼 때면 그저 이게 내 얼굴이거니 했고,

당연히 주변 친구들의 외모를 따지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툭하면 흘린 코를 쭉쭉 빨아먹고 다닌다거나,

며칠씩 머리를 감지 않고 다녀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머리를 한 아이들을 조금 꺼려하기는 했어도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예쁜 줄 알고 사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과 친척들의 ‘아이고, 예쁘다’ 하는 소리는 내 하는 짓이, 그리고 존재가 그저

예쁘다는 뜻으로 어련히 알아서 받아들이는 제법 똘똘한 아이였으니까.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나는 따돌림을 당했다. 같은 반 남자 아이들에게서였다.

여자 아이들은 빼고, 남자 아이들에게서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 하면 여자 아이들은 남자 아이들이 나를 괴롭힐 때는 가만히 있었다.

내게 와 위로를 하지도 않았다.

다만 평소처럼 말을 했고 장난을 쳤고 밥을 먹었다.

마치 내가 욕을 먹고 맞는, 그런 일이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일종의 방관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것마저 너무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 아이들에게 그 이상의 방법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따돌림과 괴롭힘이 시작된 시점은 2학기 즈음으로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이유만은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못생겨서.


나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온갖 욕설이 적힌 책상에서 욕설이 적힌 교과서로 공부를 해야 했고,

남자 아이들과 실수로 부딪히기라도 하면 부딪힌 부분을 유난스레 털어내는 그 아이에게 욕을 먹어야 했다.

아, **. 더러워. 역겹네. 옷 빨아야겠다. 아님 버릴까?

사방에서 쏟아지는 낄낄거림은 덤이었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 죽은 듯 있다가도 머리를 얻어맞아야 했고,

발로 채여야 했으며 맞은 후에는 ‘손을 씻어야겠다’ 따위의 소리를 등 뒤에서 들어야 했다.

내 책상, 내 의자. 내게 주어진 최소한의 자리를 벗어났다가는 어김없이 경멸스럽다는 듯한 눈초리와 함께 야유를 들었다.

모든 말과 모든 행동이 끔찍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핵토’였다.

가장 듣기 싫었지만 가장 많이 들어야 했고 마치 내 이름처럼 불려야 했던 그 단어.

친구와 함께 이동수업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가는 내 등 뒤로 외쳐지던 그 날의 말을 나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야, 핵토! 저거 또 씹는다.

저 핵토 *은 공부라도 잘해서 다행이지 않냐? 저 얼굴에 **, 공부까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냥 지. 저 얼굴로 사는 게 대단해. 야, 이 미친 **. 그리고 또 낄낄낄.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면서도 친구는 짐짓 태연한 척 행동했고, 나 역시 그랬다.

아예 못 들은 척, 들리지 않는 척 교실로 돌아와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 시절 우리는 화장실도, 사물함도 함께 가는 사이였지만 친구는 왜 내게 혼자 가냐며 묻지 않았다.

그 날 나는 울었다.

’10분 안에 눈물 많이 흘리기 대회’ 같은 걸 열면 1등을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 짧은 쉬는 시간 나는 죽도록 울었다.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죽은 듯이 울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입 밖으로 튀어나 않을까,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는 않을까 입을 틀어막고 그렇게 울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꼭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죽고 싶었다.

정신적 충격이 가져다 준 결과일까, 학습은 빨랐다.

나는 지난 14년의 삶에서는 한 번도 자각하지 못했던 나의 못생김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 나는 정말 토 나오게 생겼구나. 정말정말 못생겼구나.

그때부터 거울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립밤 하나를 바를 때에도 거울을 똑바로 보지 못했고 이를 닦을 때면 고개를 떨구고 세면대만 뚫어져라 바라보거나 아예 거울을 등지고 닦았다.

실수로라도 거울로 내 얼굴을 보게 되면 그걸 신호로 눈물이 터졌다.

사진이며 셀카 따위는 내게 사치이자 금기였다.

스물한 살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트라우마의 시작이었다.

다른 이들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지나가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예쁘고 덜 예쁘고를 따지기 시작했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저 사람은 조금 안 예쁘네, 못생겼네 하다가도 생각을 하는 내게 화들짝 놀라고 그래봤자 나보단 예쁘지, 하며 풀이 죽는 것이 하루에도 수십 번이었다.

그 생각을 하고 나면 자연스레 부모님을 원망했다.

왜 엄마 아빠는 나를 이렇게밖에 못 낳았을까, 왜 이런 얼굴로 낳았을까.

그러고는 또 눈물 바람이었다.

손가락 발가락 열 개씩, 아픈 데 없이 사지 멀쩡히 낳아주셨잖아… 하면서, 그새 또 이딴 생각을 하는 게 부모님께 죄송해서.

아침에 일어나 학교를 가야 하는 것이 지옥 같았고, 도착한 학교는 기다렸다는 듯 생지옥이었다.

세 시였던가 네 시였던가,

7교시의 수업이 끝나는 그 시각이 그때는 왜 그렇게 까마득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도서실로 달려갔다.

현실이 너무나도 괴로워서 죽고 싶었지만, 차마 죽을 용기가 나지 않던 나는 그대로 책 속으로 파묻혔다.

원래도 책 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때의 나는 도서실에서 살았던 것 같다.

매일같이 도서실에 가서 책을 읽다 두세 권의 책을 빌려 집으로 갔다.

지금도 좋아하는 추리소설부터 시집, 철학 서적, 심리학 서적, 경제학 서적… 참 많이도 읽었다.

과장 조금 섞어서, 그 외의 시간 평생 살면서 읽은 책의 양이 그 반 년동안 읽은 책의 양과 비슷할 정도니까.

집으로 가는 길 내내도 책을 보며 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위험한 짓이었지만, 주변에 하교하는 아이들 중 우리 반 남자 아이가 있으면 안 되니까.

하지만 책에 코를 박고 길을 걷다가도 뒤통수를 얻어맞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귓가로 나를 부르는 뭣같은 호칭이, 욕이 날아드는 일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 날은 그냥, 특별히 더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내고 3학년이 되었다.

다른 반 아이들은 전혀 알지 못하게, 철저하게 우리 반 안에서만 이루어졌던 따돌림과 괴롭힘은 그 주체였던 서너 명의 남자 아이들이 반 배정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자취를 감추었다.

새로운 반 안에도 분명 나를 놀리고, 때리고 괴롭히던 아이들이 있었음에도 그랬다.

이듬해부터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보통 다른 여자 아이들을 대하듯 내게 인사를 했고 말을 걸었다.

마치 작년의 일을 모두 잊은 것처럼.

나는 아직도 기억하는데. 내 몸은 잊어버리지 않았는데.

어제처럼 모든 일이 생생한데 말이다.

이번에는 죽어버리고 싶은 게 아니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가 떨렸다.

하지만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마지못해 인사를 받거나, 몸을 떨며 그들을 피할 뿐이었다. 그들은 비겁했고, 나 역시도 비겁했다.

부모님께는 말씀 드리지 못했다.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그렇다. 친한 친구 한두 명에게는 중학교 때 남자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한 적이 있다고만 말했다.

너무 비참하고 창피해서, 또 부모님께는 너무 죄송스러운 마음에 어디 말할 곳도 없었다.

남은 3학년 내내 남자 아이들과는 일체 말을 섞지 않은 탓에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연락하는 남자 아이는 한 명도 없었고,

간간히 연락하던 여자 아이들조차 하나 둘 연락이 끊겼다.

지금 내게 연락이 닿는 중학교 동창은 한 명도 없다.

고등학교 동창, 대학교 사람들 중에도 나의 열다섯 살을 알거나 기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내 인간관계의, 내 기억의 시작은 고등학교 때부터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고등학교는 공학으로 진학했지만 본관-후관으로 남녀를 철저하게 구분했기에 실상 여고나 다름없었다.

그때 이후로 남자와는 몸이 닿고 말을 섞는 것 자체가 두려워진 내게는 희소식이었다.

물론 고등학교 때도 종종 다툼이나 싸움이 있었고 한 번은 전교에 퍼진 헛소문으로 인해 난감한 적도 있었지만 그 어떤 일도 그때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다툼과 싸움, 헛소문 모두 오해를 풀면 되고, 사과를 하면 되고, 내 나쁜 점을 고치면 되니까.

적어도 그 누구도 대놓고, 노골적으로 ‘사과를 할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내 외모를 욕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내 성격이 과하게 예민하다면 조금 신경을 누그러뜨리면 되고, 내 말투가 누군가에게 기분 나쁘게 들린다면 조심해서 배려하면 된다.

하지만 외모는? 내가 못생겼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것도 틴트 하나 바르는 것도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다며 싫어하시던 부모님을 둔 열다섯 살이.

그때도 어렴풋이 내가 잘못한 것은 딱히 없다는 생각을 했지만, 고등학교 3년을 보내며 그 생각이 더 확실해졌던 것 같다.

못생긴 건 잘못이 아닌데.

하지만 이것은 내 생각이자 단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나는 대학에 와서 다시금 느낀다.

못생긴 건 어쩌면 잘못일까? 수능이 끝난 겨울방학, 나는 쌍커풀 수술을 했다. 눈이 조금 커지고 눈 위에 선이 하나 생겼지만,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그때는 마침 온갖 매체에서 성형을 비난하고 있었기에 나는 더욱 우울해졌다.

기왕 해버린 거, 소리를 들어도 좋으니 확 달라지면 좋았을 것을.

수술한 것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화장도 시작했지만 여전히 변한 것은 없었다.

쌍커풀 수술 때와 마찬가지로 차라리 화장 성형이라는 말이 내게 해당되었으면, 하는 생각조차 했으니까.

온 얼굴을 손댄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성형도 했고, 화장도 했다.

나는 이제 그만 인정해야 했다.

호박을 아무리 붙들고 북북 줄을 그어도 호박은 호박이었다.

그렇게 학교에 입학해 오티를 하고 신입생 환영회도 갔다.

남자 선배들의 관심은 온통 예쁜 신입생들에게 쏠렸다.

그 아이들에게만 말을 걸었고 그 아이들에게 번호도 땄다.

입학한 지 2주도 채 되지 않아 캠퍼스에서 그 아이들을 발견하면 큰 소리로 먼저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고, 밥을 사 주었으며 연애를 했다.

당연했다,

예쁜 아이들이 더 대접을 받는 것은.

예쁜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가는 것은.

하지만 그 선배들은 꼭 필요한 말만 건네는데도 불구하고 내 말을 무시했고 내가 90도로 인사하며 두 손으로 내미는 핸드폰을 떨떠름하게 받아들었다.

(선후배 관계를 다소 강압적, 수직적으로 강요하고 선배를 하늘처럼 떠받들게 하는 과였기에 번호도 필수로 따야만 했다. 나라고 따고 싶어 딴 것이 아니었는데.)

2학기가 되어도 내 이름을 외우지 못했고 내 얼굴을 보고 누구? 하며 고개를 갸우뚱 내저었지만 후에는 나더러 인사를 잘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혼을 냈다.

밥을 사 주고 말고 할 사이가 될 리 없었으며 연애는 여전히 남자가 두려운 나 역시 바라지도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엠티, 체육대회, 농활, 단과대 축제 전부 참석했다.

(참으로 영광스럽게도 예쁘든 못생기든 1학년은 모든 교내 행사에 필참이었다.)

불참 시에는 선배들에게 찍힐 것이다,라는 대대적 통보에 겁에 질려 올 참석을 했지만

그들은 내가 온 줄도 몰랐고, 그 자리에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축제 때 주막을 연 우리 과 선배들은 예쁜 아이들에게는 너희는 예쁘니까 홍보 피켓을 들고 교내를 돌아다니라며 사실상 자유 시간을 주었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에게는 하루종일 음식 준비를 시켰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이어진 서빙도 내 몫이었다.

예쁜 아이들은 홍보를 마치고 돌아와 주막 개장 시간 즈음부터는 아예 자리를 깔고 몰려든 사람들을 구경하며 쉬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우리 과에 있는지, 누군지도 모르는 선배들의 야, 너, 거기 등의 호칭으로 시작하는 지시 하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했다.

선배들은 원래 학교 축제는 바가지 씌우는 거라며 임의로 음식의 양을 정했고, 그 양은 터무니없이 적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은 그대로 손님 상에 나갔고, 음식이 왜 이렇게 양이 적냐는 항의는 고스란히 내가 받아 쩔쩔매며 사과해야 했다.

그렇게 밤늦은 시각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선배들은 다른 말 없이 오프너를 잃어버렸다며, 일을 하는 거냐며 화를 냈다.

그래, 내 잘못인데.

내 잘못이 맞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는 걸 참느라 혼이 났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화를 내세요? 묻고 싶었다. 그 축제는 ‘1학년 필참’ 목록 중 마지막 행사였다.

나는 그 뒤로 2학년이 되었고, 과 내의 어떤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1학년 말부터 나는 이런저런 대외활동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는 한 재단에서 운영하는 연합 동아리 비슷한 것이었다.

광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단발성의 프로젝트 동아리였는데, 거기에는 남자가 꽤 있었다.

나는 그들을 대할 때면 초긴장 상태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천만다행으로 내게 거부감을 드러내거나 딱히 나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회의를 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대화를 해야 했고,

나는 서서히 간단하고 목적이 확실한 대화 정도는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명은 굉장히 튀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입에 예쁜 여자, 예쁜 여자를 달고 살며 가수든 배우든 노래 연기 다 못해도 예쁘면 그만이라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는, 그 모습이 썩 보기 좋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우리 동아리에는 유독 예쁜 아이 둘이 있었는데,

그 사람 눈에는 그 중 한 명이 더 마음에 들었나 보았다.

그 아이에게 줄곧 말을 걸고, 능글거리며 장난을 치고 만나자며 떠보기 일쑤였다.

그런데 동아리 활동 2주만에 그 아이에게 무려 1000일이 된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 친구가 숨긴 것은 아니고, 굳이 말할 일이 없어 하지 않다가 그 사람이 어떤 남자 스타일을 좋아하냐며 노골적으로 묻던 차에 밝혀진 것이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급격히 노선을 틀어 다른 예쁜 아이 한 명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는 전의 아이보다 더 심해져 ‘ㅇㅇ이는 이렇게 예쁜데 왜 남자친구가 없을까? 아 나였으면~’

또는

‘아 오빠는 ㅇㅇ이랑 밥 한 번 먹고 싶어서 죽겠다~’

라는 소리를 다른 동아리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대놓고 던지는 것이었다.

졸지에 난감해진 그 아이는 나와 둘이 있을 때면 저 오빠 왜 저러느냐고, 미친 것 아니냐고, 너무 싫다고 치를 떨며 얘기했지만 나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그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그게 다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 사람은 그 아이에게 집요하게 대쉬하는 동시에 나를 물어뜯었다.

내가 입은 옷이 예쁘다는 친구의 말에 ‘에이 근데 예쁜 옷은 예쁜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야’ 따위의 말을 던졌고

내가 연예인 누구를 좋아한다고 하면 ‘아 걔가 잘생겼냐? 하긴 안 잘생겨도 좋아할 수도 있지~ 너 정도면~’ 그러면서 내 얼굴을 쓱 훑었다.

겨우 나아가고 있던 (남자와 대화 불가한) 병이 다시 도지는 기분이었다.

하루는 동아리 총 관리자 선생님(여자)께서 우리에게 밥을 사겠다며 우리를 끌고 나왔다.

메뉴를 고르던 중 내가 평균 가격보다 약간 비싼 메뉴를 고르고는 쭈뼛거리며 이거 먹어도 괜찮냐고 여쭈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 그럼~ 우리 글쓴이 예쁘니까 그 정도는 뭐~’라고 대답하셨다.

나더러 ‘예쁘다’는 단어를 쓰는 것에 항상 남들 눈치를 보는 나는 그 날 역시 멋쩍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정색을 하고서 그랬다.

‘아 선생님, 글쓴이가 예뻐요? 얘가 예쁘다고? 와 진짜 , 아무리 그래도 거짓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 누군가는 이를 들어 장난이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뉘앙스는 지금도 또렷하다.

그 사람은 진심이었다. 그 ‘예쁘다’가 그 뜻이 아닌 걸 뻔히 알면서, 그 사람은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 날 식사를 절반 이상 남겼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눈물 콧물을 몽땅 쏟으며 울었다.

소리없이 우는 것이 훈련이 되었는지, 옆에 앉은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우는 것도 모르고 시장 가려면 여기서 내리면 되냐고 물으셨다.

나는 콧물을 닦느라 고개도 들지 못하고 끄덕이며 대답해드렸더랬다.

그러다 봉사활동을 체계적으로 하는 한 대외활동을 알게 되어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했다.

우리 팀은 7명이 함께였고, 남자 셋에 여자 넷이었다.

나 빼고는 전부 스물 대여섯의 취업반인 선배들이었다.

우리는 주마다 만나 봉사활동을 했고, 간간히 만나 밥을 먹었고 회식을 했다.

남자 두 분은 나와 다른 언니들을 별다를 바 없이 똑같이 대했다.

똑같이 장난을 쳤고 똑같이 말을 걸고 받아주었다.

내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게 너무 고마웠지만 혹여나 이상해보일까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런데 다른 한 분은 처음부터 내게만 다른 태도를 보였고, 내게만 이상한 말을 했다.

하루는 그 날 아예 지갑을 놓고 나와 회식 자리에 역시 지갑이 없었는데

당일은 물론 그 뒤에도 한참을 ‘완전 의도적인 거 아니야~? 그 날 작정했었다니까 완전히~?’라며 나를 마치 얻어먹으려고 하는 사람 취급을 했고,

‘조별과제에 자료 조사를 해서 보냈는데 다른 분들이 다 고학번이셔서 그런지 제가 못 미덥다며 ppt를 뚝딱 만들더니

발표까지 해버리셨다’는 이야기에 ‘완전 버스 탔네 버스, 무임승차 제대로 했네~ 야 좋겠다~’라며 2주에 걸쳐 비꼬기도 했다.

지갑을 깜빡한 날의 나는 저녁을 먹고 참석해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고,

술도 한 병을 채 마시지 않았지만 정확히 그 날 나온 회식비의 n분의 1을 바로 다음 날 계좌로 보냈는데.

조별과제 역시 자료 조사는 했으니 참여한 것이고,

감사하다는 말도 전했으며 발표한 선배 본인께서 괜찮다고 하셨는데.

누군가 차를 가지고 온 날이면 다른 조원들은 앞다투어 자기 학교까지 태워달라며 장난을 칠 때에도 눈치만 보며 가만히 있다 너도 타라는 소리에

겨우 뒤따라 타는 내게 그 분은 너 남자가 차 있으면 이렇게 얻어타려고 하고 이런 게 습관 된다며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자꾸만 나를 ‘주제에’ 염치 없는 사람으로 만드려고 하는 그 분이 싫어서, 나는 돌아오는 봉사활동의 날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앞서 나온 조별과제 외에도 내게는 하나의 조별과제가 더 있었다.

여섯 명이 한 조였고, 남자 셋 여자 셋이었다.

여자 아이 둘은 후배였는데 누가 봐도 참 예뻤다.

성격도 활발하고 붙임성도 좋았다.

그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준 덕에 조원들은 금세 친해졌다.

내가 말을 꺼내면 남자 선배나 동기들이 열에 서넛은 넘겨버리는 일이나, 용기 내어 던진 가벼운 장난 비슷한 말에 언뜻 짜증스런 표정을 짓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자 후배들의 말 한 마디 반응 하나에 장난스레 환호를 하고 여자 후배들은 꼭 포함해서, 남자 조원들끼리 돌아가며 서넛씩 따로 연락하고 만나 밥을 먹고 노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나를 ‘경멸’까지는 하지 않는 남자가 섞인 그룹에 무사히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사람이니까.

하루는 조별 모임을 가져야 했다.

나머지는 동기나 후배들이었기에 어떤 선배 한 분과 나 둘만 있던 자리에서 만나는 시각을 정해서 단톡에 알려주면 어떨까 하는 얘기가 나왔다.

나는 점심 즈음을 권했고, 선배는 오전 중을 얘기했다.

저도 집이 멀어서 그 시간이면 새벽에 일어나야 해서 조금 그렇고,

다른 아이들도 힘들어할 것 같은데…

내가 몇 번이고 말했지만 선배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절대 오전이라며 오전 시간대를 강력하게 밀었고 나는 결국 수긍했다.

그 날 밤 단톡에 선배와 나는 아이들에게 오전에 보자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여자 후배 하나가 말했다.

‘그냥 점심 넘어서 봐요 ㅎ’ 이 말 한 마디에 그 선배는 답했다.

‘그럼 점심 먹고 볼까?’ 다른 선배도 말했다.

‘그래 ㅇㅇ이가 그러자고 하잖아 점심 먹고 봐~’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우리는 점심 이후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비참한 마음으로 대화창을 껐다.

우울하기가 무섭게 헛웃음이 났다. 멍청이. 주제를 알아야지, 분수를 알아야지. 뭘 기대한 거야?

기대? 그런데 내가 바란 것이 기대라고 할 만큼 거창한 것이었나?

이게 뭐 별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상처를 받니, 너? 그렇지만 나는… 어디서부터라고 할 수도 없게, 깊은 곳에서부터 무너져내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냐고 아무리 물어도 답은 하나였다.

이렇게 태어나기를 잘못한 걸, 이제 와서 어쩌겠어. 또 다시 웃음이 났다. 짠 맛이 나는 웃음이었다.

나는 열다섯 이후로 지금껏 모래성이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우수수 무너져버리는. 그런데 이제는 정말 힘든 것 같다.

갈수록 더 작은 땅의 진동에도, 더 가벼운 손짓에도 스러져내린다.

더 이상 누군가 나를 건드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버티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이제는 아예 무너져있고 싶은데, 그러려면 나는 나를 어디까지 버려야 하는 걸까.

어디까지 놓아야 하는 걸까. 어디까지 나를 미워하고 괴롭혀야 하는 걸까.

나는 여전히 열다섯의 나를 괴롭히던 그들의 이름 석 자를 하나하나 기억한다.

페이스북에 그들의 이름을 치는 것도 익숙하다.

그들의 멋들어진 셀카가 자리한 프로필 사진을 보는 것도,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환하게 웃는 배경 사진을 보는 것도,

‘ㅇㅇㅇ님과 연애 중’ 문구를 눌러 여자친구의 사진을 보는 것도.

그것들을 볼 때면 궁금하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니? 내게 했던 짓들을 기억하니? 그렇다면, 너희는 왜 그렇게 행복하니? 나는 이토록 불행한데.

이 얼굴로 살았다면 어차피 불행했을 거라지만, 스무 살까지만이라도 날 내버려둘 수 있었잖아.

최소한 내게 거울 보기를, 남자 보기를, 내가 담긴 사진 한 장 남기기를 두려워하지 않게는 할 수 있었잖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못생긴 건 어쩌면 잘못일까?

그렇다면 나는 죄인이다. 사형에 처해질 거야.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죄인이다.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께.

엄마 아빠,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