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수지 닮은 여자와 ‘소개팅’에 실패한 이유

나는 평소에 동네 친구들을 자주 만나는 편이다.

어렸을 적 부터 알고지내 친한것도 있고

사는 곳도 다들 가까운편이라 약속잡기도 수월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현재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주말에 딱히 할 일이 없다는 슬픈 현실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 중 유독 오랜기간동안 지속적이고 일관성있으며

늘푸른 소나무처럼 한결같이 여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같이 만나 저녁을 먹던 어느 날. 친구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리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좋은일이라도 있나 싶어 물어보니

요번에 회사에 입사한 여자 직원 한 명이 소개팅을 주선해 준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여자를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들뜨는지 친구의 표정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더니 주말에 만나 소개팅에 입고 갈 옷을 사러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모처럼 밝아진 친구의 모습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약속 당일.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해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친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의 모습이 가까워지고

친구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흠칫 놀랄수 밖에 없었다.

이번 소개팅에 사활을 걸었는지 친구는 미용실에서 머리까지 하고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대단한 의욕이 오히려 화를 불러온 것 같았다.

요즘 많이들 하고 다니는 투블럭 컷으로 머리를 잘랐는데

옆머리를 너무 짧게 올려치다 못해 정수리에만 머리카락으로 뚜껑이 얹어져 있는듯한 모양이었다.

투블럭컷이라기 보다는 변발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친구의 모습은 아시아 변방의 소수민족을 보는듯한 모습이었고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머리 잘랐는데. 어떠냐? 괜찮냐?”

“…. 괜찮네. 여진족 치곤…”

“이상하냐??”

“아냐.. 흉폭한 전사같이 보여 괜찮아. 근데 좀 떨어져서 얘기할래? 사람들이 동행인줄 알잖아. 이 오랑캐 새끼야.”

“아씨.. 미용실에서 이게 요새 제일 유행하는 스타일이라던데?”

“어디.. 17세기 청나라에서?”

“그렇게 이상하냐? 10전만점으로 치면 몇점정돈데?”

“그러고 소개팅을 나가는 거면 루트 2점정도.. 이웃나라를 약탈하러 가는거면 백점이야..

일단 옷이고 나발이고 모자를 먼저 사자. 그게 맞는거 같다.”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쇼핑을 마치고 우리는 술집에서 다른 친구들을 기다렸다.

뒤늦게 도착한 친구들의 반응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명은 내 친구는 어디가고 어디서 흉노족을 데리고 왔다며

길길이 날뛰었고 다른 한 명은 소개팅녀를 만주에서 만나기로 한거냐며

요즘 술집에선 거란족도 받아준다고 세상 좋아졌다며 감탄했다.

그렇게 술을 마시던 우리들의 대화 주제는 단연 이번 소개팅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들 중 정말 오랜만에 여자를 만나는 사람이 생겼기에 덩달아 우리들까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개팅녀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우리가 얼굴도 모르는 소개팅녀가 한미 FTA 체결로 인한 한미동맹관계의 변화나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할 리 없었기에

우리가 주로 하는 질문은 이쁘냐? 몇 살이냐? 뭐하는 사람이냐? 정도의 질문이었다.

친구의 말로는 소개팅녀가 수지를 닮았다고 했다.

거짓말 하지 말라는 우리의 말에 이미 사진교환 까지 마쳤다며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었다. 솔직히 수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미인이었다.

부러움과 시샘어린 우리들의 질문공세는 계속됐다.

“어떻게 만나기로 했냐?”

“내가 데리러 가기로 했지.”

그 친구는 차가 두 대 있었다.

평소 출퇴근 용으로 사용하는 국산 경차 한대와 자동차가 취미인 친구가 주말에 가끔 타고 다니는

클래식한 외제차가 한 대 있었다.

“데리러 가는거면 말을 타고 가라. 그 머리엔 말이 딱이야.”

다른 친구가 맞장구 쳤다.

“그래그래. 대신 뒤에 태우고 가야된다. 밧줄로 묶어서 끌고가면 안돼.”

그렇게 이야기 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고 우리는 친구의 성공을 기원하며 자리를 마무리 했다.

물론 잘된다면 열심히 응원한 우리를 져버리면 안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다. 밤이 되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를 듣는순간 망했구나 라고 본능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평소 자주가던 술집에서 기다린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부리나케 술집으로 향했다.

이미 먼저 도착해 혼자 소주를 까고 있던

친구의 모습이 처량하게 보였다. 잘 됐냐? 라고 묻는 나의 말에 친구는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말이 없던 친구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처음엔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그리고 소개팅녀가 수지가 아니라 수아레즈를 닮았다고 얘기했다.

아무래도 포토샾을 나사에 의뢰한 것 같다며 친구는 울먹거렸다.

문제는 외모가 아니었다고 한다.

처음엔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래. 사람이 성격이 중요하지 생긴게 중요하겠어

라는 마음에 최대한 친절하게 대했다고 한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는 말에 소개팅녀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가고 싶다고 했고

밥을 먹고 나서 할게 없어 간단하게 술이라도 한잔 하실래요?

라고 물었다가 자기는 와인만 마신다는 소개팅녀의 말에 팔자에도 없는 와인바까지 갔다고 했다.

그리고 참았던 울분이 터져나왔다.

온갖 고상한 척더니 앉은자리에서 와인 세병을 깟다며 내 생전 와인을 막걸리처럼 들이키는

여자는 처음봤다는 친구의 말에서 진심어린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우루과이 대표팀 에이스에게 술집에서만 몇십만원을 썼다며

그자리에 더 있었다간 왠지 자기를 물 것만 같아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고 했다.

그렇게 이성을 잃고 날뛰는 친구를 밤새 달래야 했다.

그리고 친구의 머리가 원래 모습을 되찾을 때 까진 몇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아직도 그 친구를 보면 자꾸만 병자호란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