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얘기는 아니고
그냥 감성팔이 해보고 싶어서 글 써봄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는 12년차 아재임
중고딩때 vba 짜서 팔던건 경력으로 안 치니까
그거 뺀다 하더라도 이제 연식이 꽤 찼음
아무튼 지금 하는 얘기는
8년 전부터 시작된 얘기임
당시에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친구가 있었음
별로 이쁘지도 않고 성격도 안 좋았는데
왜인진 몰라도 걔한테 완전히 미쳐있었고
그래도 나름 연애라는걸 하면서 살고 있었음
아무튼 당시에
여자친구가 다니던 회사에서 쓰던 기계가
컴퓨터랑 연결이 되어있어서
병렬포트 (옛날에 프린터 연결하던 넓적한 포트) 로
특정 신호를 쏴주는걸 받아야 동작하게 되어있었고
관련 프로그램이 필요했는데
이게 vb5로 만들어진 일본어 프로그램이라
아무도 손을 못댄다고 하더라고.
소스 코드 조차 없어서
바닥부터 새로 분석해서 만들어야 하니까..
간단한 일은 아니었음.
근데 위에 말했듯이 당시에 여친한테 미쳐있었고
여친이 다니는 회사이기도 했고
내가 이걸 처리해주면
회사에서 여친 위신도 올라갈 것 같고
여친한테 내 능력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엄청 컸음.
그래서 긴 시간은 아니고
한 2주정도 작업했나?
프로그램 동작 분석하고 한글로 번역하고
vb6으로 새로 짜서 설치해줬음.
큰 문제없이 동작 잘 됐고
여친도 회사에서 예쁨 받고
나도 그 회사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다 잘되고 있었음
여친하고 사귀는동안에도
가끔 가서 체크도 해주고 그랬는데
문제는 여자친구랑 헤어지게 된거임.
성격차이 때문에 헤어졌는데
아직도 생각날 정도로 좋아했던 여자라
당시에 꽤 많이 힘들어했음.
근데 그 회사에 더이상 내가 갈 이유도 없고
가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서
그냥 뭐 알아서 하겠지 하고 점점 잊어버리게 됨.
그리고 8년이 지났음.
나도 나이도 먹었고 자리 잡고 살고 있는데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옴.
내가 모르는 전화는 잘 안 받는데
근데 뒷번호가 어째 익숙하다 싶어서 받았더니
위에서 말한 회사 부장님이더라고
간만에 통화하는 것 답게
서로 궁금하지도 않은 안부 물어가며
서론을 풀다 본론이 나왔음
전에 만들어준 프로그램에
필요한 신호가 몇가지 있는데
혹시 시간되면 추가해줄 수 있냐
보수는 괜찮게 챙겨주겠다 뭐 그런 내용.
뭐 오후에 별일도 없고 하니까
반차 쓰고 가겠다고 하고
점심 먹고 노트북이랑
옛날 소스 들어있는 외장하드 챙겨서
한시간 정도를 달려서 도착했음
오랜만에 보는 남아계신 분들하고 인사 좀 나누고
자리에 앉아서 그간 프로그램은
잘 돌아가고 있었나 하고 이벤트 로그 열었는데
포맷을 안하신건지 어쩐건진 몰라도
이벤트 로그가 거의 100만개 정도는 쌓여있었음;
그래서 속으로
와 로딩 오진다ㅋㅋ 컴퓨터 사양 장난하냐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8년전부터 돌아가고 있는 컴퓨터가
지금은 오죽하겠음?
고장 안나고 8년 버틴 것도 신기하더라
그러다 이벤트 로그가 열리는데
5분 간격으로 내가 짠 프로그램 이벤트가
주루루루룩 나옴
그제서야 딱 생각이 나더라
내가 프로그램 짜서 돌려준게 5월이었고
아마 7월 25일이 그애 생일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8년전 7월 25일부터
5분마다, 24시간 내내
“프로그램 동작 이상없음. 사이클 000000회,
난 늘 OOO를 사랑한다.”
라는 메세지가 이벤트 로그에 쌓이고 있었음
내가 열어보지 않았다면
이 컴퓨터가 살아있는한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을 해도,
애가 커서 시집을 가도,
내가 죽어서 묻혀도 계속 똑같은 메세지를
이벤트 로그에 남기고 있었을거임.
이제는 그애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너무 힘들어서 오히려 더 확실히 정리 됐었음)
이젠 진짜 기억나는건 이름 정도 뿐이라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할 수준인데
내가 여친한테 잘 보이려고
대충 짜준 프로그램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8년동안 열심히 사랑을 외치고 있었던 거임
그거 보면서 내가 나이를 너무 먹었나
아직 젊은데.. 하면서 눈물 날 것 같은데 하면서
프로그램 적당히 고쳐주고
약속한 금액 받고 집으로 왔음.
아마 그 컴퓨터가 고장이 나거나
장비를 새로 사시는 그날까지
프로그램은 또 계속 이벤트 로그에
“프로그램 동작 이상없음. 사이클 000000회,
그땐 내가 너를 많이 사랑 했었구나.”
라고 남겨질거임
써놓고 보니까 되게 별거 없네
아무튼 이런 일이 있었다고.. 잠이나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