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배달 하면서 먹고살다가 현타가 와버린 42살 아재..

배달 하면서 사는 40대 아재입니다.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부모님이 동네 사람들에게 돈을 잔뜩 빌린 후

저를 버려둔채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저는 부모가 떠났다는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동네 사람들의 원망과 화살을 감당해야 했고

어제까지도 사이 좋게 놀던 친구들은

자신들의 부모님이 피해를 봤단 사실에

당연히 저를 원망하기 시작하며

광신도들 마냥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담임 선생님 역시 저의 부모님을 믿고

큰 돈을 빌려준 상태였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사죄하라며

발가 벗긴 상태로

교실마다 끌고 다니며 망신을 주었습니다

(여자 애들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 수치심은 40이 넘은 지금도 잊혀지질 않네요)

지금이야 뉴스에 나올만한 상황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냥 전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당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꾹 참고 당하기만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버티며 살다가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단 생각이 들어서

살던 동네를 걸어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혹여나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봐

길을 놔두고 산길만 타고 도망쳤어요.

그때 팀스프릿 훈련이라고

미군들이 산에 땅을 많이 파뒀었는데

밤에는 그곳에 들어가 자고

낮에는 무작정 걷기를 일주일 했더니

어느순간 영양 실조로 쓰러져 기절을 했는데

깨어나보니 모르는 사람 집이더라고요

그리고 절 구해주신 분이

여긴 충주 엄정면이고

단무지 농장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살던 곳이 앙성면이었으니

미친듯이 걸었음에도

제가 살던 동네에서 많이 못 벗어난거죠

(차로 1시간 거리)

그날부터 전 그렇게 단무지 농장에서

숙식을 제공 받으며

하루종일 단무지 뽑는 일을 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저 혼자였고

같이 일하는 사람은 전부 파키스탄이나

인도네시아 사람이었는데 정말 착하셨어요.

그래서 저를 구해주신

단무지 공장 주인도

처음엔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그러나 반년정도 지난 후

나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죠

반년동안 일한 돈을 단 한푼도 받질 못했습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돈 좀 달라고 하면

너 살려줄 때 링겔 맞혀주고

옷 사입힌거 기억 안나냐며

부지갱이로 다짜고짜 마구 때리는데

얼굴을 맞아 앞니가 부러지기 까지 했으니

그 당시에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13살인 제가 어떻게 감당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반년만에 단무지 농장에서 도망을 치게 되었죠

근데 막상 도망을 어디로 쳐야할지 몰라서

어릴 때 엄마와 처음으로 돈까스를 먹었던

장소가 생각이 나서

충주 시내에 현대타운이라는 큰 건물로 무작정 갔습니다.

그 앞에서 주린배를 움켜 잡고 있다가

길에 짜장면 먹은 그릇 내놓은걸 보고

눈이 돌아서 손으로 긁어서 퍼먹고 있는데

그릇을 찾으러 온 아저씨가 절 보고는

갈곳이 없냐고 물어보더니

뒤에 타라고 해서

그대로 중국집에 뽀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이 배달이란 직업이

저의 평생 직장이 될 줄은 몰랐어요

그곳에서 3년을 넘게 일을 했는데

역시나 부모도 없고 백원짜리 하나 없던 저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해줄리가 없었습니다.

그릇 깨먹었단 이유로 월급 까고

늦게 일어났단 이유로 월급 까고

배달 늦었다고 월급 까고

하루도 안 쉬고 일을 매일 했지만

오히려 중국집에 갚아야할 빚만 늘어났고

결국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또 도망

이때가 딱 17살이 됐을 땐데

충주 터미널에서 다짜고짜 직행버스를 타고

도망친 곳이 바로 수원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수원에 부모님과 놀러왔던게 기억이 나서

아마 그래서 수원을 간 것 같습니다.

수원에 도착한 후

바로 당일날부터 권선동에 수원성이라는 중국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장님이 한달 월급 30만원을 준다고 하길래

저에겐 너무나도 큰 돈이라

역시 도시 사람들은 사기를 쳐도

너무 후려치는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당장 일을 하고 잘 수 있는 곳이 없었고

돈을 못 받는게 너무 익숙했던 때라

아무 말도 하지않고 일을 했더니

정말로 한달이 되는 날

저에게 30만원을 주는 걸 보고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살면서 처음 제대로 된 월급을 받게 된거죠.

그렇게 수원성에서 2년을 일하고

권선동에 있는 동서빌라 지하방을 얻게 되면서

처음으로 제 집이라는게 생겼고

이불 밖에 없는 집에서

혼자 미친듯이 울었었습니다

그 뒤로도 사장님 도움으로 민증도 만들고

원동기 면허증도 따면서

제대로 된 배달 직원으로,

처음으로 사람답게 살게 될 때 쯤에

믿기지도 않게 수원 길거리에서

아빠를 마주치게 됩니다.

너무 커버린 절 알아보지 못하는 아빠를 잡고

애처럼 서럽게 울었습니다

근데 사실 제가 목놓아 울었던건

아빠를 만나게 되어서 그런게 아니라

아빠의 너무도 볼품없는 행색 때문이었습니다

제 기억의 아빠는

항상 양복을 입고 깔끔하고

단정한 멋쟁이 머리를 유지하던 사람이었는데

제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영락없는 늙은 노숙자였거든요.

아빠랑 서로 부둥켜 안고

용서해달라, 아니다 이렇게라도 만나서 너무 감사하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아빠와 티격태격하며

1년을 함께 살면서 나름 행복했는데..

또 다시 아빠한테 배신을 당하게 됩니다.

20살이 되던 해

아빠는 제가 배달로 모은 전재산 350만원과

그리고 제 명의로 몰래 만든

카드 빚 500만원까지 지게 하시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거죠.

그때 제가 맹장이 터져서

수원 중앙 병원에 입원을 한 상태였는데

보험으로 지급된 병원비까지

남김없이 가져가 버리신겁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는 상황..

진짜 이젠 삶의 의욕도 없어서

이대로 병원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왠지 이렇게 죽기엔

그동안 참았던 것들이 억울해서

이 악물고 울면서 대걸레를 들고

병원 바닥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원장이 나와 뭐하는거냐고 하길래

돈이 없어서 몸으로 때우겠다고 했더니

인상을 쓰고 발길질을 하며

그냥 꺼지라고 하더라고요

비참했던 것도 있지만

속으로 병원비는 해결됐단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이

그냥 너무나도 한심했고

아빠가 너무나도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때 저를 또 한번 살게 해준 사람은

수원성 사장님이셨죠

그분 덕분에 다시 마음 잡고 배달을 했습니다

그렇게 또 3년이 지난 후

어느날 누군가 제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겼습니다

아빠였죠

머리는 찢어지고 온몸은 흙투성이에

빚쟁이들에게 맞았는데

갈곳이 없어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3년을 가까이 아빠를 원망하며

두번 다신 보지않을 거라 다짐했지만

한눈에 봐도 쇄약해져 있는 아빠를 보곤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식도암까지 걸린 상태였고

진짜 나 혼자 사는 것도 지옥 같은데

아빠까지 책임져야 하니 눈 앞에 깜깜해지더라고요

아빠 병수발을 1년정도 하면서

제 마음속에 수백번,

아니 수천번은 악마가 속삭인 것 같습니다.

‘아빠 자격도 없는데 저게 무슨 아빠냐’

‘아빠는 너를 두번이나 버렸는데 너도 버려라’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이 자꾸 들면서

결국 아빠를 버렸습니다.

새벽에 혼자 몰래 병원에서 빠져나와

서울행 기차를 타며 엄청 울었습니다

결국 아빠나 저나

똑같이 비열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고

그 아빠에 그 아들이었죠.

서울 쌍문동, 서울 수서

그리고 성남 태평 3동까지 이사를 매번 다니며

영혼도 없는 채로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그러다 3년 전

배달 대행일을 하다 혼자 빙판길에 넘어져

다리 복합골절 (정갱이 뼈가 으스러져 살을 뚫고 나옴)

사고를 당하면서 일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고

가진 재산이라고는 나이 42에

원룸 보증금 500, 통잔잔고 100,

다리가 시원치 못하고 절뚝 거리니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배달 일도

이젠 배달 일도 취직 자체가 안 됩니다.

제가 사장이라도 저 같은 사람 안 쓰죠..

지난 42년간 살면서

저에게 행복했던 적이 언제였냐 물어본다면

부모님이랑 살던 국민학교 시절이 제일 행복했어요

그 이후로는 한번도

진심으로 웃어본 적도, 기뻐한 적도 없는 거 같습니다.

저도 남들처럼 연애도 해보고 싶었고

대학도 가보고 싶었고

결혼을 하게 되고 자식이 생기면

우리 부모님처럼 살진 않을 거라고

떳떳하기 위해 공부도 혼자 틈틈이 했는데

저 같은 사람은 열심히 살아도

변하는건 없는 것 같네요.

언제 한번은

엄마는 아빠랑 다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서

엄마를 찾기 위해 미친듯이 수소문 했지만

결국 엄마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냥 유일한 가족인

엄마가 너무 보고싶고

죽기 전에 엄마 한번만 봤으면 너무 좋겠습니다.

중학교도 못나오고

배운게 많이 없어서 글 맥락도 이상하지만

아무튼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간 좋은 날이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