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어떻게 하는 건지 전혀 몰랐던 남자의 골 때리는 결혼 후기..

그때가 추운 겨울이었는데

한손에 만화책을 들고

뜨끈한 전기장판에 배 지지면서 귤 먹던 나는

무심코 당시 여친에게 물어봄.

우리 이제 결혼할까?

??? : 그러지 뭐.

아니 그걸 왜 그렇게 쉽게 대답하냐고 ㅋㅋㅋㅋㅋ

우린 중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였고

사귄지도 10년이 훌쩍 넘어가는 평범한 장수 커플이었는데

둘다 언젠가는 결혼하겠지 하는 마음만 있었을 뿐

결혼이 뭔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모르는

그냥 어린애들이었음.

난 아직 어린데 결혼이란건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이상하게 학교에서 결혼 하는 법은 안가르쳐 주더라.

살면서 수학이나 영어보다 중요한게

내가 결혼하는 법 아닌가?

왜 멀쩡한 성인이

그거에 관한 지식이 아무것도 없는거지..

그나마 다행인 건

만약 결혼이란걸 하게 되면

결혼할 날짜는 예전부터 미리 말해 뒀었던 거.

5월 4일.

우리 부모님의 결혼기념일도 5월 4일이었고

우연히 여친 부모님의 결혼기념일도 5월 4일이었거든.

그럼 우리도 5월 4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바로 각자 부모님에게 통보하고 이제 결혼한다고 했지.

딱히 놀라지도 않더라.

어릴 때부터 봐왔던 사인데 새삼스레 뭘.

그냥 아, 그래 이제 하냐?

어디서 하는데? 정도로 물어봄.

아마 엄마에겐 우리의 병신같은 결혼보단

그때 키우고 있던 강아지 모모의 임신이

더 큰 관심거리였을지도.

어, 그나저나 진짜 결혼은 어디서 하지?

여자친구네 친정은 하동.

그리고 난 부산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갔었던 상황이었음.

결국 결혼식 후보지는

서울, 하동, 부산 이렇게 세군데가 있는데

서울에서 하면 우린 편하지만

양가 부모님과 친척들이 모두 올라와야 하는 상황.

그럼 부산 아니면 하동인데

우리 엄마가 크게 고민할 것도 없이

신부집 근처에서 하면 되겠네. 라고 말하더라.

어차피 부산 하동은 또 그렇게 먼게 아니니까

상관 없다고.

결혼을 처음 하는 나는

혹시나 그런 부분에서 갈등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음.

오케이! 이대로 순조롭게 가자!

근데 그 이야기를 들은 여자친구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짐.

??? : 하동엔 결혼할 데가 많이 없어;

하동을 아는 사람을 알겠지만

그렇게 큰 지역이 아님.

상권이 그렇게 발달하지도 않았고, 사람도 적은 동네.

그런 곳에 예식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음 ㅋㅋㅋㅋ

좀 오래된 예식장이 있긴 한데

굳이 거기서 하기엔 뭔가 아쉬웠던거지.

성수기중의 성수기인 연휴포함

5월 4일에 당장 예약하는것도 문제였고.

근데 우린 꼭 5월 4일에 결혼을 해야했음.

엄마아빠들이 다 5월 4일 결혼기념일인데

우리만 5월5일에 하긴 싫었다고!

게다가 우린 평소에 같이 놀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 친구들이 먼 하동까지 축하해주러 오면

펜션이라도 하나 잡고 밤새 먹고 놀 생각이었거든.

어라?

“그럼 그냥 펜션에서 웨딩하면 되겠네?”

그래서 졸지에 셀프웨딩이자 펜션웨딩을 시작함.

내가 딱히 이른 나이에 결혼하는건 아니었지만

주변에 결혼한 애들 중에서도

셀프웨딩, 펜션웨딩을 해본 사람은 없더라.

때문에 조언을 구할 곳이 정말 단 하나도 없었음 ㅋㅋㅋㅋ

딱히 웨딩플래너를 섭외한게 아니라서

그냥 다 처음부터 해야 했지.

일단 후보지가 될 수 있는 펜션부터 찾아다니기 시작함.

펜션을 찾는거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더라.

1.일단 결혼식을 할만한 넓은 야외 공간이 있을 것.

2.교통이 가까울 것.

3.가까운 곳에 식당이 있을 것.

세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았거든.

구성은 대충 이런 느낌 이기만 하면 상관없었음.

다행이 근처에 조건이 맞는 펜션이 있길래

결혼식날 펜션 전체를 예약하는데 성공함.

그 다음은 펜션을 결혼식 느낌 나게 바꿔줄 세팅인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 디자인하고

소품 놓고 이쁘게 꾸미더라고..

근데 우린 하동에 상주하는 것도 아니었고

직접 꾸미기엔 한계가 있었음.

내 미적감각이 심하게 떨어지는 것도 불안요소 중 하나.

때문에 대신 꾸며줄 플라워데코 업체를 찾아갔다.

당연히 하동에 그런 걸 해줄 곳은 없었고

그나마 창원쯤에 웨딩플라워 해주는 곳이 있어서

부탁 드렸더니 흔쾌히 승낙해주심.

대충 원하는 컨셉이랑

원하는 꽃 색깔 같은 거 미팅해서 말해주고

우린 다음 문제로 넘어감.

장소가 마련됐으면 그곳에서 할 식을 준비해야지

셀프웨딩하면 제일 ㅈ같은게 뭔지 앎?

이건 나만 그럴수도 있는데

평소에는 결혼식장 가서 아무 생각없이 구경하고

박수 짝짝 치고 나오는 식 과정을

내가 다 짜고 컨펌해야 한다는 거임 ㅋㅋㅋㅋㅋ

왜 머릿속에 결혼식이라고 떠올리면 생각나는

주례, 축가, 화촉 뭐 이딴것들 있잖아.

그걸 뭐 어떤 순서대로 어떻게 넣고

진행해야 하는지 하나도 몰랐던거야.

나도 결혼식이 처음이었다고 ㅜㅜ

일단 책상에 앉아서 생각나는 대로 순서를 끄적여 봄.

어? 대충 끼워 넣었는데 뭔가 그럴듯하게 만들어짐 ㅋㅋㅋㅋ

모자란 게 있으면 어때. 내 결혼식인데.

그래서 귀찮은 건 다 생략하고 하고싶은 것만 넣다 보니

구성도 좀 이상하게 들어감.

주례같은건 없애고

축사는 우리아빠가 하고

축가는 어머님들이랑 우리가 부르고.

거의 가족잔치가 된거임.

우리엄만 노래 존나 못하는데 축가 시켰다고 화내더라.

세상천지에 결혼식에 시엄마랑 장모가

같이 손잡고 노래부르는 법이 어디있냐고.

근데 최대한 이쁜말로 설득해서 결국 마이크를 잡기로 함.

엄머가 우리 결혼을 축하해주면 평생 못 잊을거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긴 해.

아니 정작 결혼식땐 노래부르다

춤까지 출 거였으면서 대체 왜 화낸거냐고.

식의 구성이 끝났으면 뭘 해야 할까?

당연히 거기에 맞춰서 사회자의 대본을 써야겠지?

나는 결혼식까지 남은 기간 동안 최대한 정성스럽게

내 자신의 결혼식 대본을 쓰기 시작했음.

의외로 재밌더라 이건.

사회자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친한 형에게 부탁했는데

다행이 흔쾌히 들어줌.

평소에도 좀 유쾌한 형이었는데

결혼 전날 미리 하동에 내려 오셨더라고.

그 형에게 열심히 쓴 대본을 건내줬다.

당연히 고생했다고 칭찬해 줄줄 알았지.

근데 대본을 보던 형이 나한테 존나 화내는 거임.

나 그래도 다음날 결혼하는 신랑인데!

그 형이 진짜 웃음반 정색반으로

버럭 소리 지름 ㅋㅋㅋㅋㅋㅋㅋㅋ

결혼식 대본 꼬라지가 이게 뭐야!

문제의 그 대본 ㅋㅋㅋㅋㅋㅋ

아니 형 대본이 뭐가 어때서요?

??? :이 미친놈아! 결혼식 대본에 박근혜랑 문재인이 왜 나와?

어차피 좌파 우파 똑같이 넣었으니까 상관 없지 않아요?

??? : 진짜 돌아버린거냐고!

나 나름대로 회심의 개그 일발 장전이었는데

바로 기각당했다.

저거 들으면 죽은 우리할아버지도 웃겨서

벌떡 일어날줄 알았는데.

심지어 하객들이 어떤 정치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

나름 공평하게 넣은 드립이었음에도

사회자에 의해서 폐기되어버렸음 ㅜㅜ

덕분에 그 형이랑 나는 그 전날 내내

저 남은 부분을 다른 드립으로 수정하느라고 고생해야 했다.

참고로 똑같이 기각된 다른 드립들.

분명 다른 결혼식에서도 이 정도 드립은 치는 거 아니었어?

이 형은 아직까지도 그날만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다며 날 노려봄 ㅋㅋㅋㅋ

대본이 완성 된 다음에 고민한 건 의외로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신랑 신부가 입장하는 브금을 고르는 것.

다른 결혼식장에서 결혼하는거 보니까

신랑 입장과 신부입장에 보통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쳐주더라고.

결혼행진곡이라던가, SHE 같은 달콤한 노래들.

근데 우린 어차피 야외 웨딩인데 피아노가 있을 턱이 있나.

당연히 기계를 이용해 브금을 틀어야 하는 상황이었음.

오히려 브금이니까 선택의 폭이 확 넓어지는 건 있더라.

그래서 둘이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고민함.

결론은 간단했다.

어차피 우리 결혼인데

이왕이면 각자 좋아하는 노래로 입장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각자 자기 등장 브금을 스스로 골라 오기로 함 ㅋㅋㅋㅋ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거

이 입장 브금을 맞추는 하객들에게

간단한 상품 하나씩 주는 이벤트까지 만들었다.

근데 너희 같으면 자기 결혼식에서 두두등장 할 때

어떤 브금을 선택할 거 같냐?

난 의외로 빨리 결정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브금이 있었거든.

그랑죠 소환 브금. 대지의 테마.

저 음악 들으면서 버진로드 행진하는거

어떻게 참냐고 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소환되는건데!

참고로 여자친구의 선택은

천사소녀 네티의 도망가는 브금이었다.

이년, 사실은 결혼하기 싫었던 게 아닐까?

여튼 두 브금다 의외로 결혼식 행진곡으로 나쁘지 않았다.

이벤트에서도 틀딱들은 듣자마자

다 기억하고 맞추는 기적을 보여주더라.

그 외 드레스나 메이크업 준비 같은 건

그리 어려울 게 없었다.

드레스는 하루 대여해주는 곳에서 대충 빌리고

메이크업도 출장 가능한 곳에서

당일에 부르면 그만이었으니까.

이렇게 해서 비용은 식대 빼고 한 250정도 나왔음.

일반 예식장에 비해 썩 저렴하지도 않은 게 함정.

그나마 펜션을 통째로 빌려서

뒷풀이까지 가능한 게 장점일까?

스몰웨딩 할 사람들은 꼭 명심해라.

스몰이라고 저렴한 게 절대 아니다.

오리혀 완벽하게 동선이 압축된 웨딩홀보다

훨씬 돈이 많이 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괜히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는게 아니야.

오히려 우리 걱정은 다른 거였음.

혹시 그날 비가 오진 않을까?

날이 너무 춥거나 덥진 않을까?

진짜 자연재해는 어쩔 수가 없는 거잖아.

야외결혼의 가장 큰 난관은

날씨 가챠뽑기라는걸 새삼 느꼈지.

각종 드레스 양복 신혼여행 짐가방 등등

차에 구겨넣고 부산에서 하동으로 출발하는 내내

우린 날씨 걱정 뿐이었다.

이때 결혼식 걱정을 좀만 더 했더라면

그런 참사는 없었을 텐데..

결혼식 당일 사진.

다행이 날씨는 무척 맑았음.

하늘이 그렇게 미워하진 않아서

좋은 날씨 속에 결혼식 스타트.

사회자 형은 밤새 대본 수정하느라

퀭한 눈으로 진행을 시작하더라.

역사적인 박근혜 문재인 드립은

그렇게 아쉽게 어둠속으로 사라짐.

그랑죠 브금이 나오고 내가 먼저 입장.

네티 브금이 나오고 여자친구가 입장.

부모님들도 다 등장 브금 정해놨었는데

카트라이더 브금, 메이플 브금 다 이런거였다 ㅋㅋㅋㅋ

여튼 정해진 대본대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게 완벽했음.

우리 축가 전까진.

여자친구는 원래 신화 팬이었음.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축가도 신화노래를 하길 원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 난 당연히 동의했지.

노래 제목은 오렌지.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지만

그래도 연습하니까 따라 부르기 어려운 노래는 아니었다.

근데 막상 저기 서서 노래를 부르려고 하니까

온갖 잡생각에 내가 포기했던

그 수많은 개그와 드립이 떠올라서

정작 가사가 생각 안나는거임 ㅋㅋㅋㅋㅋ

덕분에 원래 듀엣곡이었는데

거의 솔로곡처럼 신부가

자기 결혼식의 축가를 혼자 질주하고

뒤늦게 정신 차린 나는 음정도 안 맞는데

목소리만 크게 나와서 사실상 결혼식을 터트려버렸다.

그냥 이거였음..

여자친구가 평소에 연습좀 하라고 다그쳤는데도

난 다 외웠다고 안 했었는데

어젯밤에 날씨 걱정하지 말고 노래나 한번 더 불러볼걸..

이때 임팩트가 너무 강렬해서 그런지

사실상 그 후에 어머니들이 나와서 축가 부르고

춤추고 하는데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하더라 ㅅ발.

나머지 식의 진행은 다행이도

그런 해프닝 없이 무사히 진행함.

아니, 어쩌면 사고가 일어났었는데

너무 큰 충격에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걸지도.

아, 그 와중에도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결혼식은 원래 축사 같은걸 하잖아.

난 그걸 아부지한테 부탁했었거든.

그리고 아들 결혼식의 축사니까

아부지 마음대로 하라고 맡겼지.

근데 축사 차례가 되자 아부지가 앞으로 나오시더니

품에서 직접 쓴 편지 하나를 꺼내 읽어 주시는 거야.

결혼식의 축사라기 보단 아들한테 써주는

덕담과 격려가 가득한 편지였었음.

어릴때 그래도 몇번 편지를 받았었는데

다 커서 이런 자리에서 그런 편지를 받으니까

나도 모르게 뭉클하더라.

생각지도 못했는데 진짜 좋더라.

아직도 그때 축사를 아부지한테 부탁한 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음.

우여곡절 끝에 이 기나긴 셀프웨딩은 종료함.

참고로 저기서 꽃뿌리는 애들은 친구들이나 동생들인데

신부가 노란색 좋아해서

거기 맞춰서 노란색으로 드레스코드 맞춰옴.

근데 그거 때문에 또 해프닝이 발생함 ㅋㅋㅋㅋ

다들 노란색 리본이나 노란색티셔츠,

노란색 꿀벌옷? 등을 입고 왔는데

여기 온 하객들이 얘네들을 직원이라고 착각해버린거임.

하기야 다 노란색 옷 입고 리본 달고

단체로 그러고 있으니까 어디 직원 같기도 했을 듯.

주차가 막히거나 문제가 생기면

자꾸 이 친구들을 찾는 거야.

덕분에 지인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다.

셀프웨딩 준비하면서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이니

혹시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유의하도록 해.

식사는 펜션 아래에 있는 식당에서 갈비탕을 대접함.

출장 뷔페도 생각해 봤었는데

먹을 자리도 마땅치 않고 해서

그냥 아래 갈비탕 하는 식당이 있길래

거기서 한정식 코스로 해결했음.

그러고 보니 나 어릴 땐 결혼식 하면

갈비탕 많이 먹었었는데

요샌 거의 그런 걸 못 본거 같네.

결혼식이 끝나니 진짜 살 거 같더라.

2차 야간웨딩 이딴 건 생각도 안 했음.

저녁 되니까 일반 하객들이랑

부모님들은 다 가고 친한 지인만 남음

그래서 우린 편하게 뭉쳐서

고기 꾸워먹고 술먹고 놀기로 함.

바로 옆이 펜션이니 만큼 술 취하는 놈들은

순서대로 수감하면 되니까 ㅋㅋㅋㅋ

그리고 배 터지게 바베큐파티하면서 종료.

한 서른명 정도 있었는데

술을 몇 번이나 다시 사러 갔는지 기억이 안남.

돼지새끼들.

사실 셀프웨딩, 펜션웨딩 하면

보통 가지게 되는 어떤 로망 같은게 있잖아.

예쁠거 같고 특별한거 같고 하는 것들.

나도 준비 전에는 그랬음.

근데 그런 거 보다도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진짜 더 많고

신경 써야할 게 많더라.

진짜 아예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 거라 더 그랬음

플래너 끼고 했으면 더 쉬웠을 거란 걸 몰랐지..

나도 내 결혼이 처음이었다고!

그럼에도 지금 생각해보면

친한 사람들과 다같이 웃고 떠들고

놀 수 있었던 야간 바베큐랑

결혼식 중에 조금은 더 넓고 시원했던 공간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면서 하객을 비추던

그 순간의 기억들은 계속 남아 있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