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 둘
지잡대 출신에 마지막 연애는 스물 아홉.
꾸역 꾸역 인서울 직장 구해서 생활한지 3년차.
상경하면서 헤어진 여자친구는
울고 불고 난리 치더니
나랑 헤어지고 새 남친과 6개월 만에 결혼.
그동안 일이 바쁘기도 바빴고
서울엔 별 연고가 없어서
여자를 만나거나 소개 받거나 하질 못했다.
그래.
그랬었지.
돈은 조금 모았고 가진건 승용차 한대,
그리고 원룸 보증금.
솔직히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했었다.
그러던 중에 회사 선배가 뜬금 없이
“소개팅 할래?”
라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보다 2살 어린 이 선배는 얼굴도 이쁘지만
항상 타이트한 정장치마를 잘 입고왔고
남직원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나보다 두살 어린데
싸가지 없이 끝까지 반말하는 것도
나름 새침한 매력이 있는 그런 여자.
그런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개팅 할래?”
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건진 잘 모르겠으나,
그 선배년이 소개 시켜주는 여자는
그 선배년 만큼 괜찮을 거 같았다.
“조신하고 착할 필요는 없고
그냥 이쁘면 된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선배년이 먼저, “일단 너무 착해”라고 해버려서
“이뻐요?”라고 물어보질 못했다.
주선자가 남자였다면 조금 더 파고 들었겠지만,
나도 가진거 없는 상황에서
그것도 회사 선배년한테 깐깐하게 굴기는 싫었다.
오케이 했다.
소개팅 당일
하늘이 열린 날.
날씨가 너무 좋았다.
따뜻했고, 풍경들이 향기로웠다.
저 멀리에서 ‘그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만치에서 보는데도 고현정을 좀 닮은 느낌이었다.
착해 보였다.
큰 옷을 입고 있었다.
펄럭 펄럭한 옷이었지만
펄럭 펄럭 하지 못한 옷이었다.
그래.
덩치가 큰 여자 였다.
고현정 닮은 착한 느낌의 여자.
몸매는 착하지 못했다.
이새끼야 정신차려.
너도 가진거 하나 없잖아.
넌 뭐가 잘났는게 그딴 생각을 해.
저 여자도 나름 매력이 있을 거라고.
그래, 넌 저 여자 아니면 답도 없을 거야.
좋은 만남,
굿 미팅 하자.
뭐 좋아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미리 예약해둔 일식집에 갔다.
그 여자, 딱히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목소리가 좋았다.
마치 뉴스 앵커가 내 앞에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직업은 유치원 선생님
나보다 3살 어린 여자.
적당히 비싼 일식 코스 요리였는데
음식을 알뜰히도 잘 먹었다.
접시위에 풀 한쪼가리 남기지 않고 다 먹는 여자 였다.
“아깝잖아요.”
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내 눈치를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살림은 잘 하겠다 싶었다.
웃는게 이뻤다.
뚱뚱한 사람은 열등감 덩어리고
예민하게 군다는 편견이 깨지는 것 같았다.
뚱뚱하지만, 말투가 착하고 귀여웠다.
회를 한번에 3조각씩 먹었다.
그건 좀 마음에 안 들었다.
간장을 아주 듬뿍찍어 먹었다.
음..
무슨 일 하는지 미리 알고 갔었기 때문에 묻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에게 취미가 뭔지 물어봤다.
그 여자는 내게 음악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렇게 노래방을 가게 되었다.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렀다.
고현정이 빅마마 맴버 였던가.
온 노래방에 그 여자의 목소리가
5.1 채널 돌비 사운드로 울려 퍼지는 듯 했다.
나는 지오디의 거짓말을 불렀다.
그 여자는 손을 살랑 살랑 흔들어 줬다.
“잘가, 가지마, 행복해, 떠나지마..
너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잖니”
“싫어 싫어!!!”
깜짝 놀랐다.
그렇게 웅장하고 광야같은 싫어 싫어는 처음이었다.
왜 하필 그 타이밍에 싫어 싫어를 했는지
왜 갑자기 마이크를 잡았는지
나는 그 싫어싫어 때문에 한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아, 나는 이 여자를 만날 수 없겠구나.’
서로 사랑의 결실을 맺어 만난다고 치자
의견차가 생겨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그 여자의 싫어싫어 를 듣게 된다면
그때에도 나는 그 여자의 싫어싫어를 받아 줄 수 있을까?
맞아.
틀리지 않을 것이야.
싫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직감.
그 여자의 싫어 싫어.
헤어지고 연락을 안했다.
무언의 거절이었다.
한차례 시도 되었던 그 여자의 소심한 카톡은 씹어버렸다.
그리고 여자들은 참 알 수 없지.
“뭐하세요?” 하고 보냈었던 그 여자.
우리 선배년에게는
“제가 아직 연애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습니다.”
라고 전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면
차라리 싸게 먹힌거지.
내나이 서른 둘
결혼은 포기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