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전학 가버린 ‘짝사랑녀’에게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다..

중학교 2년 때 일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환절긴가 그랬는데

아침조회 시간도 아니고 점심시간에

담임이 처음보는 여자애를 데리고 오더니

전학생이라며 꼭 잘 좀 대해주라고 했다.

얼굴은 예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은

그냥 평범한 애였다.

유난히 피부 하얗고 매끈매끈 한 게 눈에 띄어서

원래 외모보다 예뻐보이기도 한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리고 귀가 잘 안 들린다고 했다.

중2면 대가리도 클 만큼 커져서

그 말 듣고 단번에 청각 장애인인 거 알아챘다.

난 당시 생각 없던 애라

장애인은 막 얼굴도 비뚤어지고

침 질질 흘리고 그럴 줄 알았는데

저렇게 평범한 여자애가 청각 장애인이라는게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래 남남 여여로 짝지어주는데

내 짝이 학기 초에 캐나다인가 뉴질랜드인가로

유학 가서 내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 옆자리로 앉게 됐다.

인사 안 하고 내 할 거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애가 옆에서 툭툭 치더라.

놀라서 옆에 돌아보면서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멈칫하더니

교복 재킷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서

‘안녕?’이라고 쓰더라..

그래서 ‘안녕’이라고 말했다가

‘아 얘 말을 못 듣지’라는 생각에

입 모양으로 또박또박 ‘안녕’이라고 말했다.

뭐가 웃긴지 막 얼굴 찡그리면서 웃는데

이때는 좀 장애인 같았다.

첫날은 인사만 하고 별일 없었던 것 같다.

그 날 집에 가서 ‘청각 장애인이랑 대화하는 법,

청각 장애인도 말할 수 있나요?’

이런거 지식인에 계속 검색했다.

그리고 걱정과 다르게

전학 온 첫날 이후로 애들이랑 잘 지냈다.

걔랑 얘기할때도 어차피 듣질 못하니까..

이름 부를 일은 거의 없어서..

그냥 어깨 툭툭 치거나 손짓으로 불렀다.

근데 신기한 게 귀 안 들리고 말 못하

사람들하고 의사소통하기가 엄청나게 힘들잖아.

그래서 사회성도 떨어지고

우울증 걸리고 그런다고 들었는데

걔는 진짜 성격이 밝아서 반 애들이 모두 좋아했다.

남자애 중에는 고백한 애도 있다고 들었음.

소문이라서 아닐지도..

솔직히 난 아싸라 친구도 별로 없었는데

걔 짝이 된 덕분에 친구도 많이 생겼다.

귀머거리에 벙어리이기까지 하면서

반 애들이랑 수첩으로 애쓰며 대화하는

그 애의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동시에 안쓰럽기도 했다.

난 내성적인 편이라 말수가 별로 없었는데도

그 애가 자꾸 말을 걸어줘서

정말 많은 대화를 하게 됐다.

어디에 사는지, 왜 전학 왔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등등..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치킨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치킨을 제일 좋아한다고 수첩에 썼다.

글씨로 쓴 건 아니고 그림으로 닭 다리를 그렸다.

닭 다리 그림 보면서 맛있어 보인다며

찡그린 웃음을 짓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애는 애들 도움으로 학교에서 잘 지내기는 했지만

가끔 양아치 새끼들이

청각 장애인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 애가 딱히 미움 살 일을 만들지도 않았는데

그냥 이유도 없이.

지금 생각해보면 철이 없었을 때니까..

라고 여길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 애를 놀리는 학교 애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복도에서 걔가 걸어가고 있으면 뒤에서 욕하고..

중딩이라 철이 없어서 그런가

별별 수위 높은 욕들도 다 나왔다.

특수학교나 요양원으로 안 가고

왜 일반 학교로 온 거냐며

쑥덕대는 여자애들도 있었고

심지어 뒤에서 “쟤 전 학교에서 걸레였다며? ㅋㅋㅋ”

거리면서 떠드는 놈들도 있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면 복도에서 직접 들었거든.

영웅 심리 같은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냥 ‘걸레’라는 말을 듣자마자 빡쳐서 소리 질렀다.

너무 화나면 자기가 무슨 말 했는지

기억 안 나는 그런 거 있잖아.

그래서 뭐라고 소리 질렀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막 닥치라고 여러 번 그랬던 것 같다.

결국, 그 애 보는 앞에서

양아치들한테 싸대기 2대 맞았다.

여자애 앞에서 일방적으로 맞는 게

그렇게 X 같은 일인지 그때 알았다.

창피해서 한 이틀인가? 삼일인가? 걔랑 말도 안 했다.

처음엔 수첩으로 무슨 일이냐고

왜 맞은 거냐고 묻다가

내가 대답 안 하니까 포기했는지

걔도 더는 내 앞에 수첩을 들이밀지 않았다.

누구 때문에 맞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속 터졌는데 자존심 때문에 말 못 했다.

그 애가 뒤에서 누가 자기 욕해도

못 알아먹는 청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답답했다.

그래서 담임한테 양아치들이

ㅇㅇ이 뒤에서 욕하고 다닌다고 일렀다.

무슨 조치를 취한건지는 모르지만,

그 뒤로 그 애 뒤에서

누가 대놓고 뒷담까는 일은 없었다.

그 애랑 대화 안 한 지 이틀인가? 삼일인가?

되는 그 주 일요일에

집에서 비 오는 소리 들으면서 꿀잠 자고 있는데

문자 한 통이 왔다.

지금 학교로 올 수 있느냐는 그 애의 문자였다.

알았다고 답장 보내고

대충 츄리닝 입고 우산을 들고 학교로 갔다.

비가 오는 날이라 옷들이 안 말라서

입을 옷이 츄리닝 밖에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 도착해보니

그 애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그 애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내리는 빗물 소리가 듣기 좋다는 생각과

그 아이는 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이 겹쳐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그 애는 오지 않았다.

연락하고 싶어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덜렁거려서 불편할까 봐

휴대폰을 집에 놓고 온 게 실수였다.

ㅅㅂㅅㅂ 거리면서도 짜증보단 걱정이 앞섰다.

아무래도 귀가 들리지 않는 애니까

오다가 차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싶어서..

아마 30분은 훨씬 넘게 기다린 거로 기억한다.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고 있는데

교문 앞에 있는 그 애가 보였다.

비에 젖은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걱정하긴 했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 짜증이 앞섰다.

왜 늦었냐고 다그치자 그 애는 머뭇거리더니

“미안해” 라고.

정확히는 “니앙애” 같은 발음으로 말했다.

깜짝 놀랐다.

목소리가 나오긴 하는구나 싶어서..

추측이지만 학교에서

누구에게도 입을 통해 말을 하지 않은 건

청각장애인 특유의 어물쩍한 발음이

부끄러워서 그랬던 것 같다.

벙쪄있는 나에게 그 애가 비닐봉지를 건넸다.

우산을 쓰긴 한 건가 싶도록

잔뜩 젖은 치킨 박스가 들어있었다.

내가 예전에 치킨을 가장 좋아한다고

수첩에 썼던 게 생각나서 좀 찡했다.

우리는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서

다 젖은 치킨을 한 조각씩 뜯어먹었다.

젖어도 치킨은 맛있더라

내가 자기 놀리는 애들한테 뭐라 하다가

맞은 거 어떻게 어떻게 알게 됐다더라.

치킨은 사과의 선물 같은 것이었고.

늦은 건 어물쩍거리면서

그냥 미안하다고만 하더라.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비 오는 날에 여자애랑 치킨 먹고 있으니까

굉장히 설렜다.

그때 딱 알았다

아 나 얘 좋아하고 있구나.

하지만 고백할 생각도 용기도 없었다.

그냥 그때는 그런 걸 잘 몰랐던 것 같다

치킨 먹으면서는 손을 쓸 수가 없잖아.

그래서 난 입 모양으로

그 애는 어물거리는 발음으로 대화했는데

학교에서는 입 안 열다가

나한테만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내가 그 애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서

괜히 우쭐거리는 마음도 있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날 그 애와 먹은 젖은 치킨의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며칠 뒤 그 애는 전학을 갔다.

내가 담임한테 양아치들이

ㅇㅇ괴롭힌다고 꼬질렀던 것처럼

담임도 ㅇㅇ이 부모님께 그 사실을 말한 듯했다.

그리고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셨는지

특수학교로 보내기로 하셨다고 한다.

중2 감성이라 그런

그 애가 전학 간 뒤에 많이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근데 그때는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감정이 낯설어서

고백이라던가 뭔가를 해 볼 생각을 못 했다.

그 뒤로 그 애를 만나지 못했다.

괜히 담임한테 말을 했나 싶을 정도로 후회했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애써 위로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머리가 좀 크고

고등학교 올라갈 때쯤에

용기를 내서 연락을 해봤지만,

번호가 바뀌어있었다.

일찍 전화 하지 않은 것을 또 후회했다.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물어볼걸.

아마 첫사랑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첫사랑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그 애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겨우내 안 오던 비가

오랜만에 내려서 문득 떠올려봤다.

앞에서는 하하 호호하다가

뒤에서 호박씨 까대는 삭막한 인간관계에 지치다 보면

불쑥불쑥 그 애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리워진다.

잔뜩 찡그리며 웃던 얼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