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건드려도 로스쿨생 3학년 엄마를 건든 다단계 업체..

3학년의 시작은 모든 게 완벽했다.

빵빵해진 지갑의 두께만큼이나 마음의 여유가 생겨났다.

이전보다 더 집중할 수 있었고,

더 오래 공부할 수 있었다.

1년을 버티기 위해 운동 강도를 높여

체력도 서서히 끌어올렸다.

몸도 마음도 건강했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사람 일이 꼭 뜻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실무수습 중이던 내게

당시 만나던 친구로부터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어머니가 화장품을 보낸다고 하시는데,

좀 이상해서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머니와 그 친구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화장품을?

안 좋은 일이 벌어질 때 사람의 촉은

거의 빗나가는 일이 없다.

집에 들어가서 집안 곳곳을 뒤졌다.

큼지막한 상자가 20개 넘게 나왔다.

다단계임을 확신했다.

어머니는 예전에도

두 번이나 다단계에 손을 댔던 전력이 있던 차였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아버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해결해야 했다.

나가 살던 동생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일단은 어머니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집에 돌아와 거실에 꺼내져 있던 상자 더미를 보고

오히려 화를 내던 어머니를 진정시키고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Q.지금 다단계를 하신 건가?

A.다단계가 아니라 네트워크 마케팅이다.

다 합법적으로 물건을 만들어서 파는 회사다.

Q.얼마짜리를 하신 건지?

A.1구좌에 2,250만 원이다. 선결제로.

Q.돈은 어디서 났나?

A.내 돈으로 내가 장사하겠다는데 왜 너희들이 뭐라고 하냐.

신용카드 두 개로 카드론을 최대한 받아 현금으로 내고,

모자라는 부분은 카드로 긁었다.

보험도 깼고,

또 다른 보험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것도 있다.

Q.다단계는 갑자기 왜 하신 건지?

A.다단계가 아니다.

이 화장품 브랜드 제품 품질이

매우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이걸 주변에 공짜로 뿌려서 쓰게 하고,

써 보고 좋으면 다들 이 제품을 구입할 것이다.

내 친구들도 이런 방식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Q.선결제를 유도하는데 다단계가 아니라고 볼 수 있나?

A.지하철 역사에 광고도 하고, 홈페이지도 있고,

정부에서 무슨 인증도 받았고,

다음 달에는 인천공항 면세점에도 입점하는데,

어떻게 다단계라고 매도만 하는 거냐.

Q.그럼 계약서는 어디 있는지?

A.그런 거 쓴 적 없다.

Q.ㅋㅋ..

다단계는 사이비 종교와 비슷하다.

가입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못하게 한 후

사람을 철저히 세뇌시킨다.

어머니도 이 단계를 착실히 거친 상태였다.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돈은 잃더라도,

어머니는 지금 사기를 당한 것이라는 점을

설득시키고 싶었다.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 보아도,

감정에 호소를 해 보아도,

어머니 때문에 내가 학교를 휴학해야 할 것 같다고

협박을 해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통보를 했다.

내일 이 물건들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물건들을

다 모아서 환불 처리를 할 것이다.

어머니 신용카드는 다 우리가 관리하겠다.

어머니는 일 그만두시고 당분간 집에만 있으시라.

길길이 날뛰시는 어머니를 외면한 채,

나는 대책을 강구하고,

동생은 어머니의 스마트폰을 뒤졌다.

일단은 해당 업체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검색을 통해 내린 결론은,

이곳은 합법과 불법의 선을 밟고 있는,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으로는 악취를 풍기는 다단계 업체라는 것이었다.

이 업체는 합법적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방문판매사업자 또는

다단계판매사업자로 등록이 되어 있었다

(현재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동시에 불법적이었다.

해당 업체의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피해자’가 떴다.

다음 카페에 해당 업체의 피해자 모임이 개설되어 있었다.

겉은 그럴싸해 보였다.

해당 업체의 화장품 광고가 지하철역에 개시되어 있었다.

여러 신문에 홍보성 기사도 게재되어 있었다.

인천공항 면세점에 입점한다는 기사도

여러 군데 실려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구린내를 진하게 풍겼다.

피해자 중 하나였던 장애인 단체의 시위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유로 중단되었다.

심지어 그 장애인 단체의 대표가

자필로 사과문까지 써서 지역 신문에 실었다.

사기죄로 고발당했던 것은

검찰 수사 단계에서 무마되었다.

해당 업체의 불법성을 특집기사로 내보냈던 지역신문은

오히려 위 업체로부터 명예훼손 등 이유로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한 상태였다.

사람들이 속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법이 교묘했다.

겉으로 내세우는 화장품 업체는 진짜다.

나름대로 품질도 좋다.

대외적으로는 위 화장품 업체만 홍보된다.

하지만 화장품의 독점판매권은

또 다른 다단계업체(A)가 쥐고 있다.

이 업체는 대외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화장품 업체를 보고 다단계에 뛰어든다.

실제로 해당 화장품 업체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다단계 업체는

머지않아 폐업하고

또 다른 이름의 업체로 대체될 것이다.

주식회사인 다단계 업체가 폐업하면

선수금을 지급하고 물건을 공급받기로 한

다단계 판매원들은 돈을 받을 수가 없게 되는 구조다.

인터넷을 뒤져 다단계 업체로부터

돈을 돌려받는 방법을 알아봤다.

거의 돌려받을 수가 없다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방문판매등에관한법률’도 공부했다.

청약철회의 사유와 효과,

철회 시 3영업일 내에 돈을 돌려줘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머리에 구겨 넣었다.

다음날 다단계 업체에 가서 힘차게 따지려면,

그래서 돈을 돌려받으려면 잠을 자둬야 했다.

하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많은 상념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하룻밤 새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일처리를 시작했다.

우선은 또 다른 다단계 업체(B) 문제였다.

어머니의 스마트폰을 뒤져본 결과,

어머니는 또 하나의 다단계에 손을 담그고 계셨다.

가상화폐와 관련된 것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트렌디한 것인지,

다단계 업체가 트렌디한 것인지 헷갈렸다.

이 다단계 업체는 아예 실체가 없었다.

단톡방만 존재했다.

단톡방 관리자에게 보이스톡을 걸어,

공손하게 여기가 도대체 뭘 하는 곳인지 물었다.

툭 하고 전화를 끊은 그 관리자는

카톡으로 되레 화를 내었다.

요지는 왜 어머니가 하는 일에

자식들이 간섭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카톡으로 답장이 오는 꼬락서니를 보고,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어머니께 물으니, 여기에 투자된 돈은

3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돈은 포기하기로 하고 단톡방을 나오고,

해당 앱을 지웠다.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머니를 억지로 데리고

원래 목표로 했던 다단계 업체(A)로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수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번화가에 위치해 있고,

간판도 자신들이 판매하는

화장품 업체 이름을 크게 내걸고 있었다.

내부는 뭐랄까, 묘한 곳이었다.

큰 공간에 둥근 테이블과 의자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30~40명의

잘 차려입은 아주머니들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표정이 좋고 평온해 보였다.

이 점이 나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업체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덩치 큰 기도

(문지기의 일본식 표현),

아주머니들 중간중간에 서서

무언가 일을 처리하고 있는

덩치 좋은 슈트 차림의 아저씨들 때문이었을까.

본능적으로 이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런 곳에서 아주머니들의 표정이

그토록 평온할 수 있다는 점은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안내 데스크에 계약 철회를 하러 왔다고 하자,

우리들은 회장에게로 보내졌다.

뒤늦게 중간관리자에 해당하는 직원 아주머니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회장이 직접 계약 철회를 상담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 같았다.

회장은 건달이었다.

달리 표현할 것도 없었다.

그냥 건달이었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그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계약 철회를 원한다는 말에도

만류하거나 하지 않고 바로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이럴 리가 없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나는 계약서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회장은 거부했다.

당시 경황이 없던 탓에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물품수령서는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을 통해 선금 2,250만 원 중

환불액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물품수령서를 뽑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침묵을 깨고 어머니는 회장에게 사과를 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어머니의 그 말보다, 비굴한 표정이 더 화가 났다.

마치 호랑이 앞의 토끼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

자신이 대역죄라도 지은 것인 마냥.

어머니가 왜 그래야 하는가.

그리고 왜 그런 모습을 자식들 앞에서 보여야 하는가.

답답했다.

회장이 여유로웠던 이유는 곧 드러났다.

2,250만 원 중 돌려받을 수 있는 금액은

300만 원에 불과했다.

이미 1,950만 원 상당의 물건을 수령했다는 것이었다.

물품수령서를 하나씩 사진 찍으며

꼼꼼히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중 제일 첫날 구매한 내역의 서명이 이상했다.

다른 물품수령서의 어머니 서명과 달랐던 것이다.

그 물품수령서를 회장에게 들이대니,

무언가 착오가 있었다며

해당 물품수령서의

500만 원도 추가로 취소해 주겠다고 했다.

친구들을 불러 모아

어머니가 공짜로 뿌린 화장품들을 긁어모았다.

1,000만 원 정도는 보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이 정도로 막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보다 가까운 게 주먹이다.

법으로 먹고살게 될 내가

이 말에 동의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들은 계약 첫날 500만 원짜리

물품수령서에 대한 사문서위조 행위를 했다.

선금을 최대한 빨리 쓰게 해야,

가족들이 계약 철회를 하더라도

환불 액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문서위조는 형법 제231조

사문서위조죄에 따라 처벌된다.

그렇다면 내가 이들을 위 죄 위반으로 고소할 수 있는가?

못 한다.

계약서를 발급하지 않은 것 또한

방문판매등에관한법률

제66조 제3항 제3호 위반에 해당한다.

그러나 역시 위 죄 위반으로 고소를 하거나,

공정위에 신고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는 돈을 돌려받지 못하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고소에 따른

다단계 업체의 피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사문서위조야 업체에서 꼬리를 자르면 그만이며,

계약서 미발급으로 인한 공정위의 처분은

초범의 경우 경고 조치가 전부다.

반면, 내가 법적 조치를 취했을 경우

다단계 업체는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시간만 질질 끌다가 폐업해버릴 가능성이 높다.

여유롭다 못해 거만한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는 회장이

저토록 뻔뻔하게 나오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 였을 것이다.

친구들을 불러 모아

어머니가 여기저기 뿌린 물건들을 회수해서 반품 처리했다.

장사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좁은 사무실에서 반품 처리 확인 작업을 거쳤다.

어머니를 믿을 수가 없어서

동생을 옆에 붙여 놓고,

나는 덩치 좋은 아저씨와 함께

반품수량을 확인했다. 이들은 프로였다.

반품 처리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내가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물건 하나를 툭 던지며 이건 반품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포장 스티커가 떼어져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마 내가 안 본 틈을 타

가장 비싼 물건의 스티커를 뗀 것이 틀림없다.

30만 원짜리 에센스였다.

당했다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반품확인이 끝나고

젊은 여자 직원이 반품확인서를 건네주었다.

법인 인감조차 찍혀 있지 않은 종이 쪼가리였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언제쯤 돈이 입금될지는 알 수 없다고도 했다.

나는 방문판매등에관한법률 제9조 제2항에 명시된 대로

3영업일 안에 입금해 달라고 버텼다.

귀찮았는지 그 직원은 회장의 허락을 받더니

3일 안에 환불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반품확인서 자체로는

아무런 법적 효력을 기대할 수가 없어서,

대화 내용을 몰래 녹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돈 1,000만 원을 잃은 것보다

신뢰가 깨진 것이 더 아팠다.

어머니는 사회복지사 학원을 다닌다며

매일같이 아침 일찍 집을 나서고는 했었다.

어머니가 너무 힘들게 사시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려,

내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다.

또한, 장학금 1,000만 원을 탄 뒤

어머니께 간청했던 것도 떠올랐다.

1년만 버티면 아들이 변호사가 되니,

그동안만 아무 일 없이 지내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때도 이미 어머니는

다단계에 발을 담갔던 것이다.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가족은 일종의

한 팀을 꾸린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IMF와 아버지의 암으로 인한

기나긴 투병생활을 거치며 집이 폭삭 망한 후,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시 집을 정상궤도로 돌려놓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투쟁하고 있다고 여겼다.

내가 그런 것처럼 어머니도

어머니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다단계는

내게는 예상 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어머니가 마트에서 하루 종일 서서

힘들게 버는 돈이 6만 원 남짓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다단계를 통해

그 수십, 수백 배를 쉽게 버는 것처럼

현혹을 하니 흔들렸을 것이다.

다단계 업체에서 봤던 다른 아주머니들처럼

예쁘게 옷도 차려 입고 일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소속감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을 테다.

또한, 어머니 입장에서는

충분히 정상적인 업체로 오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정하고 속이려 들면 속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속인 사람이 나쁜 것이지,

속은 사람은 죄가 없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가며 내 속을 달랬다.

남의 손에 들어간 돈은 내 돈이 아니다.

3일 안에 환불해 준다는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우리가 다단계 사기를 당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도 중요했다.

친한 친구들을 불러 모아 대책을 강구했다.

사진으로 찍어둔 물품수령서를 돌려 보다가

서명이 위조됐다는 사실을

어머니께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마트로 달려가

어머니께 서명이 위조된 사진을 보여드렸다.

역시 어머니가 한 것이 아니었다.

내내 뚱해 계시던 어머니는

그제서야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아차 싶으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다시 다단계 회사에 가야 한다고 하셨다.

사실은 한 구좌를 더 했다는 것이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4,500만 원을 다단계 업체에 선입금한 것이다.

두 번째 건은 더 복잡했다.

업체 측에서 두 명이 한 팀을 이뤄

한 구좌를 개설하게 하는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이는 해당 구좌를 통해 얻는 수익과

손실을 반씩 부담하게 되는 일종의 동업계약이었다.

어머니의 짝은 그를 다단계 회사에 데리고 간 K였다.

K는 자신이 지금 돈이 없다며

어머니로 하여금 선입금을 하게 하였다.

나중에 얻는 수익으로

자신의 투자금을 갚겠다는 것이었다.

K에 대한 조치는 뒤로 미루고,

일단 해당 계약을 철회해야 했다.

친구들과 함께 다시 다단계 업체로 향했다.

나는 본래 관상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일종의 사후확신편향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다단계 사건을 겪으며

적어도 인상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믿을 만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시치미를 떼었다.

어머니의 계약은

어제 취소 처리해 주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프로모션건을 취소하러 왔다고 말하자,

그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좁은 사무실이 사람들로 꽉 찼다.

나와 어머니, 내 친구들이 한 쪽에,

다른 한쪽에는 중간관리자로 보이는 A와

슈트를 차려입은 덩치들이 들어섰다.

A는 여러모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화술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나 사이를 갈라 치려 했다.

왜 돈을 벌 수밖에 없는 기회를 놓치려 하느냐,

자식들의 말을 듣지 말고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하시라, 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줄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을

엄청난 속도와 정확한 딕션으로,

누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내리꽂았다.

그토록 다양한 사례를 들어가며

내용을 변주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A의 곱게 화장한 얼굴은

어딘가 무서운 데가 있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서 였을까.

아니면 독살스러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흘겨 보아서 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의 인상과 표정이 어우러져

그 자체로 표독스러웠기 때문이었을까.

어머니가 더 이상 설득당할 것 같지 않자,

발톱을 드러낸 A의 얼굴은

나로 하여금 뱀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A는 ‘찐’이었다.

두 번째 계약건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안 그들은

비신사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취소해 줄 수 없다고 나왔다.

내가 방문판매등에관한법률을 언급하자,

그렇게 법을 좋아하면 법대로 하라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했다.

그 뒤를 지키고 서 있던 덩치들도

은근히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성량 경쟁이었다.

우리가 말을 못 하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내 친구들도 목소리를 높이자,

그들은 우리를 업무방해로

신고할 것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하나의 잘 짜인 블랙코미디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위협을 한다고

우리가 그 돈을 포기하고 나갈 리가 없다.

배울 만큼 배운 우리들이

업무방해에 이를 정도로 위력을 발휘할리도 없다.

밖에는 영문도 모르는 피해자 아주머니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이쪽 얘기를 듣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백날 소리를 지른다고 뭐가 해결될까.

이것도 일종의 매뉴얼 대로의 행동인지 궁금해졌다.

결국 취소 신청은 접수되었다.

어제와 같은 반품확인서를 받았다.

법인 인감도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것을 말이다.

이 모든 과정을 녹음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번에는

3일 안에 환불 처리도 불가능하다고 우겼다.

당신들 앞에 취소 처리를 하려는 사람이 많으니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제 순순히 3영업일 안에

환불 처리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은,

우리에게 숨겨진

두 번째 계약 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무엇 하나 쉽게 처리되는 것이 없었다.

이들이 순순히 돈을 돌려줄 생각이 없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돈을 어떻게 돌려받을 것인가.

이들은 사실상 합법적인 다단계 회사다.

사기 혐의로 진행되던 검찰 수사는

불기소처분으로 무마되었다.

유명 전관펌을 썼기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다.

따라서 우리가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이들은 음지에서 힘을 쓰는 듯해 보였다.

관련된 피해자 단체들이

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유로 와해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피해자 단체와 합심하여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어떨까.

1.회사를 상대로 우리가 소송을 제기하면,

이들은 당연히

자발적으로 환불 처리를 하지 않을 것이고,

소송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데

그때까지 회사가 존속하리라는 보장이 없었고,

법인격 부인론을 적용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졌다.

2.회장을 상법상 업무집행지시자로 보아

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도 생각해 보았지만,

법리적으로 가능한가를 떠나서

회장을 상대로 한 조치는 위험부담이 커 보였다.

결국 사실상 소송을 통해

돈을 돌려받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그러자 생각이 동업자 K에게 미쳤다.

만약 다단계 업체로부터 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될 경우,

두 번째 구좌 금액의 절반을

K에게 청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업체와의 두 번째 계약을 취소함은

조합의 해산에 해당하고,

그 경우 출자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K에게

출자재산의 절반을 반환 청구할 수 있으리라는 논리였다.

교수님께 여쭤보니 충분히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K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적은 K 스스로 위 동업계약에 대해

진술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계약서가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에

녹취의 형태로라도 계약 내용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K는 어머니의 마트 동료였다.

마트에서 일을 하며

그곳의 아주머니들을

하나둘씩 다단계로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K는 이 무대에서 두 번째로 현명한,

아니 교활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단계 업체에 발을 걸쳐두고 있었으나

물건은 일절 판매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아주머니들을 끌어들여

수수료를 받아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니, K가 우리의 전화에

자신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펄쩍 뛰는 것은 당연했다.

살살 구슬려야 했다.

우리는 여사님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계약을 취소했는데

업체 측에서 돈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해서

걱정이 크다.

우리는 계약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부탁이니 어떤 계약이었는지,

그 내용만이라도 설명해달라.

그러자 우리의 의도를 모르는 K는

계약 내용을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무사히 필요한 주요사실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K에 대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K에 대한 소 제기는 최후의 방안이었지만,

가장 돈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높은 방법으로 보였다.

일종의 보험을 들어둔 셈이었다.

불운 속에는 행운이 숨겨져 따라오는 듯하다.

나는 당시 실무수습 중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로스쿨 동기인 P가 있었다.

P가 없었다면 나는 다단계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년 내내 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기약 없는 휴학을 하게 되고,

내내 돈만 벌다가 법 지식은 다 까먹어 버리고,

뭐 이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싶다.

매년 새해가 되면 P에게 감사 메시지와 함께

선물을 보내야 할 만큼의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의 행운이었다.

P는 내 사정을 듣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P는 다단계 업체의 기도 만큼이나

좋은 체격을 가졌고,

다년간의 격투기로 단련된 몸이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한편으로는 공부로 한창 바쁠 시기에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 것 같아

P에게 몹시 미안했다.

함께 다단계 업체에 방문하여

그곳의 분위기를 대략적으로 파악한 뒤

P가 아이디어를 내었다.

다단계 업체가 언제 폐업할지 모르니,

회사를 상대로가 아닌

회장과 중간관리자 B를 상대로

연대보증을 받아내자는 것이었다.

그럴듯했다.

회장이 우리 앞에서 돈은 돌려줄 것이라고 공언한 이상

연대보증을 거절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부하직원들 앞에서 체면도 있을 테고 말이다.

중간관리자 B는 자금세탁 담당이었다.

어머니의 선입금 중 현금 부분은

업체 명의 통장이 아닌

B의 개인명의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이 점이 우리가 B를 연대보증 대상으로 삼는

그럴듯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B는 다른 중간관리자 A와는 달랐다.

A가 전문적인 ‘꾼’의 냄새를 진하게 풍겼다면,

B는 그저 어느 곳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아주머니 ‘B’에 불과했다.

교활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강하게 요구하면

쩔쩔매며 끌려다니다가

결국은 그 말을 들어주고 마는,

어리숙한 사람이었다.

A가 회장의 최측근으로

다단계 업체의 핵심적인 인물이라면,

B는 언제든 잘라질 수 있는 꼬리로 보였다.

아마 어머니처럼

일반 판매원으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단계에 대한 믿음도 강하고

회장에 대한 충성심도 있어

중간관리자로 뽑힌 인물인 듯했다.

우리의 목표는 처음부터 B였다.

B가 아직 회장에게 쓸모가 있는 인물이라면,

어쩔 수 없이 돈을 돌려줄 것이라고 봤다.

우리는 회장을 만나기 위해

매일 다단계 업체를 방문했다.

실무수습 중이어서 출근 전과 퇴근 후 시간을 이용했다.

그들을 최대한 귀찮게 만드는 것이

또 다른 목표였다.

우리가 좀처럼 포기할 것 같지 않고,

우리의 잦은 방문이 그들의 영업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어야 했다.

복장에도 신경을 썼다.

나는 어려 보이지 않게끔 차려입었다.

P는 건달 냄새가 약간 베어 있는 느낌으로 옷을 입었다.

금목걸이를 두르거나 일수가방을 든 것도 아닌데,

묘하게 날티를 풍겼다.

P는 자신이 일종의 심부름센터

직원으로 여겨졌으면 했다.

다단계 측에서 P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냥 아는 동생 또는 먼 친척이라고 답하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안전에 주의를 기울였다.

차는 다단계 회사에서 거리가 떨어진 곳에 주차를 했다.

가급적 판매 아주머니들이

회사에 남아 있을 때 업체에 방문하려 했다.

그들이 있는 한 다단계 측에서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P는 나와는 접근 방식이 달랐다.

내가 논리적, 공격적으로 그들을 대했다면,

P는 능글맞은 방식으로 그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중간관리자 A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소용이 없었지만,

적어도 다른 중간관리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들의 안부를 물었고,

제품의 성능을 칭찬했으며,

고생이 많다며 마실 것을 들고 가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가 갈 때마다

그들의 표정은 쟤네 또 왔다는 듯이 구겨지고는 했다.

한번은 중간관리자 B를 설득해서

우리 앞에 있는 환불대기자 명단을 본 적이 있다.

(당연히 우리에게 보여주면 안 됐던 건데,

B가 실수를 했다)

우리 앞에만 300명 정도가 있었다.

그 말인즉슨, 이들의 선의에 기대어

환불 순서를 기다린다면

절대로 돈을 돌려받을 수가 없다는 의미였다.

엑셀 파일에 새겨진 이름과

남아 있는 금액을 보며 슬픔을 느꼈다.

피해자 한 명 당 4명의 가족이 있다면,

지금 우리 앞에 1,200명이

다단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일 터였다.

그들의 대응은 다 달랐을 것이다.

쓴 교훈을 얻은 셈 치자며

포기한 집도 있을 것이고,

업체가 돈을 돌려준다는 말만 믿고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집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심정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기를 당했다는 분노,

가족에 대한 배신감,

이미 잃은 돈에 대한 쓰라림,

앞으로 잃을지도 모르는 돈에 대한 걱정이

교차하고 있을 것이다.

다단계는 단순히 돈을 편취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피해자 한사람 한 사람과,

그들의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총체를 전달한다고나 할까.

한 단계가 지날 때마다

그 크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형태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네트워크 마케팅이란

말 같지도 않은 용어보다는,

‘OO의 가지치기’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OO에는 고통이든, 슬픔이든, 악행이든, 아픔이든,

어떠한 부정적인 단어를 넣어도 적절할 듯하다.

열흘쯤 매일 출석도장을 찍은 후에야

우리는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의 ‘가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연대보증각서가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겼을까.

회장은 쿨하게 각서에 사인을 했다.

자신이 왜 연대보증을 서야 되냐며

완강히 거부하던 B도

회장의 지시에 따라 마지못해 서명을 했다.

1382에 전화하여

주민등록증 진위 여부도 확인을 하려 하자

회장은 짜증을 내었다.

특히 P를 향해, 당신 누구냐,

어디서 왔냐며 신경질을 부렸다.

회장의 말을 들어보니,

이들은 정말 P를 심부름센터 직원쯤으로 여긴 듯했다.

험악한 분위기에,

우리는 주민등록증의 진위 여부만을 확인한 후

잽싸게 회사를 빠져나왔다.

연대보증각서를 받아내자

조금이나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만약 돈을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내가 변호사가 된 후

이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휴학 옵션은 당분간 넣어 두기로 했다.

여러모로 씁쓸했다.

우리가 돈을 받으려면

다른 피해자들이 돈을 받지 못해야 되는 시스템에

나는 숟가락을 얹었다.

다 같이 살 방도를 찾으려 한 게 아니라,

비겁하게 우리만 빠져나오려고 애쓴 것처럼 여겨졌다.

어머니도 역시 가해자가 될 뻔한 상황 자체도 그러했다.

우리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머니도 누군가에게 물건을 팔아먹고,

또 누군가를 끌어들였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친척들이 어머니에게 그랬었던 것처럼.

내가 그토록 경멸하는 종류의 사람이 될 뻔했다는 것이

아찔하게 느껴졌다.

감상에 젖어 있기에는,

어머니가 진 빚은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카드론 이율이 연 23%에 달했다.

당장 갚아 나가야 할 원리금은

200만 원이 넘었다.

내가 받은 장학금과 마통으로 급한 불을 껐다.

동생도 적금을 깼다.

아무래도 다음 학기에도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생겼다.

강용석처럼 언제든

내가 내킬 때면 ‘너 고소!’라고 외치고 싶어졌다.

1년만 늦게 다단계가 터졌으면,

회장에게 삿대질하면서

‘고소장이나 드시라’라고 외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닌가. 어쨌든,

나와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자그마한 힘이라도 가지고 싶어졌다.

그렇게 반년 후,

B를 연대보증인으로 세운 것은 효과가 있었다.

자신이 덤터기를 쓸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탓인지

B는 적극적으로 환불 절차를 진행했다.

일이 주에 한 번씩,

조금씩이나마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예정된 날짜를 넘기게 될 경우에는

B가 먼저 문자로 양해를 구하고는 했다.

이쯤 되니, 사실은

이 회사가 정상적인 업체인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연락이 뚝 끊겼다.

B는 더 이상 전화도 문자도 받지 않았다.

약속했던 날짜가

한참 지나도록 돈도 들어오지 않았다.

업체에 전화를 해서 B를 바꿔달라고 했다.

업체 측에서는 항상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B가 자리에 없다고 둘러대었다.

콜백을 하게끔 전달하겠다고 매번 약속했지만,

B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에 약간이나마 환불 절차를 진행했던 것이나,

B가 돌연 잠수를 탄 것,

업체 측에서 전화 응대를 하는 방법

모두 매뉴얼 대로의 행동으로 보였다.

돈을 소액이라도 돌려줌으로써

사기죄에 걸릴 여지를 없앴다.

B의 잠수와 업체 측의 전화 응대로 인해

나는 다단계 회사에 찾아가지 않는 한

그들에게 항의할 방법이 없었다.

업체 측에서는 환불 관련 전화가 오면,

아마 전화기를 멀리 드는 등의 방법으로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게 만들었다.

말을 못 알아듣는 척을 하며 시간을 끌어

상대가 제풀에 지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각자 생업이 있는 피해자들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매번 업체에 찾아가기란 힘든 일이다.

그곳에서 위협을 느꼈던 피해자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던 중 K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머니에게 줬었던 50만 원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K의 주장은 이랬다.

어머니를 다단계 업체에 끌어들인 대가로

약 300만 원의 수수료를 받았었다.

그중 어머니에게 카드 이자를 갚으라고

50만 원을 준 적이 있다.

그런데 당신들이 계약을 철회한 탓에

그 돈을 회사에 뱉어내야 했다.

그러니 내게 그 돈을 돌려주는 것이 이치에 맞다

라는 것이었다.

K의 뻔뻔함에 화가 났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계약 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K를 적으로 돌리는 일은 피해야 했다.

우리로서는 K도 업체 측에

환불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를 바랐고,

50만 원 때문에 그가 업체 쪽에 붙는 것은

더욱 원치 않았다.

그래서 업체로부터 돈을 돌려받으면

여사님의 50만 원도 돌려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단지, 돈을 돌려받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자 기타 비용 중

절반을 당신이 부담해야 한다는 말을

K에게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B와의 연락이든, 업체와의 통화든,

K를 달래는 과정이든, 너무 피곤했다.

별거 아닌 일인데 왜 이렇게 지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지막 입금일로부터 3주 정도 기다린 후

나는 B를 상대로 소송을 하기로 결심했다.

소가를 3,000만 원 이하로 잡아

소액사건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이는 변호사 없이

내가 직접 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책과 인터넷을 뒤져가며 보전처분을 공부했다.

대략적인 감은 잡을 수 있었는데,

내가 궁금해하는 핵심적인 노하우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부동산 등이 없는 상대방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낼 방법은

신용전문업체에 문의하는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우선 B에게 내용증명을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연대보증 각서에 적힌 B의 주소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

주소를 적다 말았던 것이다.

회사에 연락해봤자 B와 연락이 안 될 것을 알기에

내가 직접 발품을 팔기로 했다.

각서에 적힌 주소 근방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다행히도 1시간 만에

우편함에 꽂힌 B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의 실거주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B 명의의 부동산이 있기를 바랐다.

등기부등본을 조회했더니

B의 실거주지는 웬 젊은 남자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친인척인가 싶어 그 남자 주소의 등기부등본을 조회했다.

그 집 역시 다른 남자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4단계에 걸쳐 등기부등본을 조회했지만

그중 자기 명의로 된 집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같은 동네에 위치한 값싼 빌라였고

하나같이 명의가 젊은 남자 이름으로 되어 있던 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설마 회사 차원에서 집 명의를 돌려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찌 됐든, 부동산에 대한 가압류는 불가능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B의 은행 예금에 대한

가압류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내용증명은 B에게만, B의 집 주소로 보냈다.

회장에게는 전혀 법적인 조치를 취할 의사가 없음을

B에게 알림으로써

B가 회장을 좀 더 압박해 주길 바랐다.

그럼에도 답변이 없으면,

신용정보회사에 의뢰를 한 후

보전처분에 들어가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카드사에 대한 조치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카드사에 대한 채무는

4,500만 원 중 절반 정도가 12개월 할부거래,

나머지 절반 정도가 카드론에 따른 것이었다.

이 중 할부거래에 대해서는

다단계 초기부터 카드사에 대해

할부항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항변권이란

“20만 원 이상, 3개월 이상 할부거래에 대해

할부 계약의 해지 또는 물품·서비스 등이

계약 내용대로 이행되지 않은 경우

잔여 할부금 납부를 거절할 수 있는

소비자 권리다.

다단계 업체가 우리와의 할부 계약 해지를 했음에도

환불 절차를 진행하고 있지 않았기에,

우리가 할부항변권을 행사할 여지는 충분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할부항변권을 행사할 경우

다단계 업체 측에서 나머지 돈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다단계 업체가 환불 의사가 없음이

명백해진 때가 돼서야

우리는 항변권 행사에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항변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당시 너무 높은 이율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는 할부대금 상당 부분을

이미 납부한 상태였다.

큰 기대 없이 우선 현대카드에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카드사 담당자는

우리의 설명을 듣더니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항변권 접수를 해줌과 동시에,

그는 직접 다단계 업체에 전화를 해서 경고를 했다.

이런 식으로 영업을 하시면

귀사와의 가맹점 계약을 해지할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이었다.

이 통화가 결정적이었다.

이 업계에서의 왕은 공정위도 경찰도

다단계 업체도 아닌, 카드사였다.

다음 날 바로 B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카드사에 민원을 넣으셨냐고.

자신들이 지금 상황이 좋지 않지만

환불 절차는 약속대로 진행을 하겠다고.

카드사에 민원은 취하해 달라고.

솔직히 당황했다.

업체 측의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우리 앞에 있던 수많은 피해자들 중

일부는 이미 할부항변권을 행사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단계 업체 역시 카드사로부터의

압박에 따른 대응 매뉴얼을

마련해 놓고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마치 카드사로부터 이런 식의 항의 전화를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듯한 다단계 업체의

반응이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설마 다른 피해자들 중 할부항변권을 행사한 사람이

한 명도 없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피해자들 대부분이 현금으로 선결제를 했기 때문에

항변권을 행사할 여지가 없던 것이었을까.

그 뒤로 환불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민재실 기말시험 즈음

다단계 업체로부터 모든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싱거운 결말이었다.

4,500만 원 중 3,900만 원을 건졌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이번에는 다시 K 차례였다.

다단계 업체로부터

모든 환불 절차가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K는 다시 50만 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더 이상 내 의도를 감출 필요가 없었다.

여사님과 어머니는 동업관계로

이는 조합계약에 해당합니다.

여사님께서 지난번에 통화로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손실과 수익을

절반씩 부담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따라서 어머니가 다단계 업체에

선지급한 금액에 대한 이자 및 환불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 역시

여사님께서 절반을 부담하셔야 합니다.

저희는 이 금액을 여사님께서 요구하는

50만 원과 상계할 생각입니다.

정확한 금액을 일단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확인하시고 궁금한 점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만약 납득이 가질 않으신다면,

저희도 내용증명을 보낸 후에

어쩔 수 없이 법적 절차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저 이제는 연락이 오지 않길 바랐고,

내 바람대로 K로부터 더 이상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K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던 사람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몸 조차 좋지 않았던 K는

그 자신의 병원비를 해결하기 위해

다단계에 발을 담갔다고 들었다.

결국 다단계에 빠진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인 듯했다.

그 속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모를 정도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고 입히고,

없는 사람끼리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으로 보였다.

오직 다단계 업체의 핵심 인물 몇몇만

이득을 보는 게임에서 말이다.

한편으로는 어머니와 K를 보며 궁금해졌다.

가난하기 때문에 다단계에 빠지는 것일까,

아니면 다단계 같은 것에

빠지기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일까.

반년간 우리집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인간관계가 좋으셨던 어머니는

여러 친구들을 잃었다.

폰 번호도 바꾸고, 카톡도 지우고,

직장도 기존에 다니던 곳보다

훨씬 먼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어머니는 잔뜩 의기소침해지셨다.

부쩍 말수도 줄고,

나와의 대화는 더 많이 줄어들었다.

동생은 다시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어머니가 다단계에 빠지게 된 것에 대해

동생과 나는 책임감을 느꼈다.

어머니에게 무심했다는 점에 우리 모두 동의했다.

당분간 가계는 동생이 담당하기로 했다.

동생이 돌아옴으로써

나도 집안일에 대한 부담을 조금 덜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다시 금전적 부담에 시달리게 되었다.

다단계 업체로부터 전액을 환불받은 후에야

비어 있던 내 마이너스 통장을 채울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돈에 쪼들리는 짠 내 나는

로스쿨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와의 사이가 어색해진 일도

다단계 여파 중 하나였다.

그 친구의 아내는,

내가 위험한 다단계 업체에

친구를 데려간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일로 친구와 한바탕 부부싸움을 벌인 모양이었다.

가난한 친구와 엮이면

우리 가족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

친구 아내의 주장이었다고 했다.

전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이 내게는 약간 상처가 되었던 것 같다.

이래저래 여러 군데

민폐만 끼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결제 요구하는 곳은 이상한 업체일 확률이 높다.

현금을 개인계좌로

입금하라는 업체는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고객의 카드를 빼앗아

자신들이 카드론 등의 한도액을 알아본 후

직접 결제를 진행하는 곳은

매우매우 이상한 곳이라고 봐야 한다.

한 번에 거액의 금액을 결제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환불 가능성이 의심되는 경우라면

현금이나 일시불 결제가 아닌

할부거래를 하는 것이 좋다.

회사 규모는 작은데, 사장 위에 회장이 있고

회장이 전권을 휘두르는 곳이라면

이상한 업체일 가능성이 높다.

그 사장은 바지사장이다.

누군가가 다단계에 빠졌다면,

일단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점을

인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단계는 피해자와 가족들을 갈라놓은 후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본인이 다단계에 빠졌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 자체가 힘들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가족들이 백날 나서봤자

피해자는 다시 몰래 다단계를 시작할 것이다.

친구를 잘 사귀자.

다단계는 거의 대부분 친척 아니면

친구의 권유로 시작된다.

반대로 다단계를 해결하는 것 또한

좋은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가능할 수 있다.

돈 쓰는 법을 가르치자.

사람이 가난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한번 가난해지면

돈을 제대로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될 확률이 높다.

어머니의 경우도 그러했다.

꼭 필요한 지출을 참고 아껴서

엉뚱한 데 큰돈을 낭비했다.

이 부분이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이었다.

힘들게 번 돈을 어이없이 낭비하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