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때문에 인생이 제대로 꼬인 32살 아들

1992년 포항

나는 현대제철소 현장직에서 근무하시는 아버지와

비디오가게를 운영하시는 어머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3살 위의 누나가 있었으며

기억은 안나지만 사진으로 봤을땐

당시에 지극히 평범한 가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4~5살부터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어렸을 적부터 기억력이 꽤 괜찮았던 것 같다.

당시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 1층에서 살았으며

아마 방이 3개 였던걸로 기억된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유치원 친구랑 놀았던 기억,

아파트 뒷편에 미술학원을 다녔던 기억.

짧지만 선명한 옛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흙수저 인생을 시작하게 된건

아버지의 사고 혹은 IMF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와 별개로 뚜렷한 이유가 있다.)

아버지는 근무중

오른손 엄지손가락 반마디 정도가 절단되었으며

그로인해 당시에

꽤 큰 보상금(2억)과 함께 퇴직하시게 된다.

어려움이야 있었지만 흙수저들이 그러하듯

흙수저 인생은 돈으로 부터 시작되는데

2억이나 생겼으면서 왜 흙수저냐 물을것이다.

나 역시 궁금하긴 마찬가지다.

95~96년도에 2억이라 함은

‘꽤’가 아닌 ‘엄청나게’ 큰 돈이였을 것이다.

정확한 전후 사정은 모르겠으나 외가집에서.

정확히는 외할머니가 그 돈을 탕진했다고 들었다.

그 이후 아버지는 매일 술로 보내게 되었고

모든 비난은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매일을 술로 지내던 아버지는

결국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질렀고,

어머니는 그의 피해자가 되었다.

폭언, 욕설, 구타.

자식이 보는 앞에서도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4살이었던 나는 그저 작은방에 들어가

항상 끌어안고자던 곰인형만 꽉 움켜쥔 채

숨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작은방에서 기어나오면

어머니의 얼굴은 항상 피투성이였다.

그러다 여느날처럼 지내던 한때.

어머니가 당시 근처 아파트에 사시던 고모에게

누나와 나를 잠시 봐 달라고 맡겼다.

그 어린 7살, 4살이던 누나와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울며불며 안간다던 누나와 나를

고모가 직접 오셔서 데려갔다.

아마 고모는 알고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나의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이혼 이후 양육권을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고 늦게나마 들었다.

양육권은 두분다 원하셨는데

그 당시에 아버지 쪽에서 우리를 거두기로 했다.

정확히는 합의를 했는데 누나와 내가 3살 차이이므로

누나가 대학을 진학할때,

내가 고등학교를 진학할때

어머니 쪽으로 인계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물론 초,중학교 시절에

한두달에 한번씩 어머니가 오셨기 때문에

얼굴을 아예 안본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강원도 시골동네로 이사를 온 아버지,

누나, 그리고 나.

그 시골동네는 아버지의 고향이자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이었다.

나무골자재와 흙으로 지은 정말 시골집.

비오는 날이면 집에 물이 샜으며,

겨울엔 나무장작을 떼워야 했던 그런 시골집.

읍내와도 꽤 동떨어진 정말 산골마을 그 자체였다.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6.25전쟁당시 피난을 온 동네였는데,

두 가문이 피난을와서 동네에는 거의

사촌~팔촌 이런식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지냈었다.

이사를 왔을 당시엔 5살이 됐기때문에

시골초등학교에 있는 병설유치원에 다녔다.

대인관계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누나 역시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붙어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알콜중독은 나아지질 않았고,

아버지 노릇을 하질않으니 당연히 수입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하게도 우리 남매는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 같은동네에 또래 사촌~팔촌들이 있어서

같은 학교를 다니다보니 등하교를 같이 했는데,

사촌~팔촌들의 부모님이 차로 태워주고 태워오고 그랬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났을무렵

아마 내가 10살 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날은 누나가 몸이 아파서 학교를 안가게 됐는데

나 혼자 사촌의 차에 얻어타고 등교를 할 때 였다.

운전을 해주시던. 나한테는 큰어머니 되시는분이

보조석에 앉은 중학생 자기딸과

나의 누나에 대한 얘기를 했다.

“씻질 않아 냄새나고, 옷도 항상 같은 옷이다.”

“너도 똑같다. 남의 차에 타려면 최소한 씻고서 타라.”

10살이던 나에게 그랬다.

그 일이 있고난 후로

한겨울에도 얼음장 같은 물에 몸을 씻었으며

하루 입었던 옷은 꼭 그날 빨아서 말렸다.

또 더이상 같은 동네의 사촌~팔촌들의

등하교길 차를 얻어타지 않고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10살이던 어린아이의 걸음으로는

1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부나 걸어다녔고

가끔 지나가던 동네사람들이 태워주려고 하면

극구 사양하며 절대 타지않았다.

오히려 동네사람들에게 반감이 생겨

또래 형누나동생들이 학교에서 누나와 날 놀리면

무슨짓을 하더라도 응징을 가했다.

학교를 걸어다니기 시작한 뒤부터

알게 모르게 근육이 붙기 시작했고,

당시에 나름 발달이 좋아서 육상부도 했었다.

그러다보니 또래들에 비해서 힘이 좋았다.

놀림을 당하면 위아래 할것없이 두드러 팼으며,

다음날 그러면 또 패고, 또 다음날도 또 패고..

내가 보고 배운게 이런 것인데.

집에 동네사람들이 툭하면 찾아와서

“우리 애 얼굴 이모양으로 만들어서 어쩔거냐고”

라며 지랄들을 해댔다.

그와중에도 아버지는 술로 인해 폭력적인 성향이었으며

나에게 손찌검을 하진 않았지만

집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었다.

티비며 전등이며 다 깨부시기 일수였고,

우린 양초를 키고 사는게 일상이었다.

그마저도 고쳐서 티비를 보거나 전등을 키면

초등학생이던 내가 전기세 많이 나온다며

집에 불도 안키고 살았다.

그 어린 초등학생이 어쩌다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됐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게 말많고 탈많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을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더이상 사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교복을 살 돈도 없어

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거둔 교복들을 물려받은 것이지만

너무 좋고 멋있었다.

사이즈도 제각각에 어린아이가

어른의 옷을 입은것처럼 헐렁했지만

아무렴 어떻겠나 싶었다.

하지만 중학교를 들어가도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내 폭력적인 성향도 그대로였으나

한 학년에 100명도 안되는

시골동네의 중학교였기 때문이었을까..

하나 둘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친구들에게는 내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낼일이 없었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많았고

한부모가정, 조부모가정인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고

집을 안들어가는 일이 잦아졌다.

중학생때부터는 초등학교와 다르게

용돈이 꽤 많이 필요했었던 것 같다.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시진 않았지만

피시방을 가도 돈이 필요했고

친구들과 놀고 먹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방학때 안될걸 알지만

주변에 알바할곳이 없나 수소문을 했고

읍내에 작은 피시방에서 알바를 써주겠다고 했다.

피시방 크기가 워낙 작아 컴퓨터가 50대도 안됐었고

이용하는 사람이 몇 없는 그런 피시방이었다.

9시 출근 21시 퇴근.

하루 일당 1만원. 그게 내 일당이었다.

그럼에도 돈을 벌 수 있다는것에 감사했으며

한달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일하니 한달 뒤 내 손에 쥐어진 30만원..

중학생이 열심히 산다며

사장님이 10만원을 더 주셔서 40만원을 받았다.

그 40만원으로 학기 내내 돈을 쪼개 썼으며

어떻게든 다음 방학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다음 방학부터는 지역 특성상 바닷가가 많았기에

횟집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다.

횟집에서 일하니 월급이

피시방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이 받았다.

팁도 꽤 많이 나오고..

덕분에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나름 해결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한살 어린 여자친구도 사귀고

데이트도 하고 그랬다. 순수하게.

물론 집에는 알리지 않았고

돈은 철저하게 현금으로 받아서

집 밖에 꽁꽁 숨겨놓고 써서 아버지에게 뜯기진 않았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진학 할 때가 되었고

누나는 지방에 전문대(물리치료과)를 가게 됐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고등학교를 진학 할 때

누나와 같이 어머니에게로 갔어야 했었다.

누나는 대학을 갔으니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됐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고등학교까지만 여기서 지내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계속 만나고 있던 여자친구도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더 큰 이유였다.

아버지의 알콜중독과 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폭력적인 모습은 안밖을 안가렸으며

이젠 자신의 새부인,

부모에게도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중에 나도 딱 한번 맞은적이 있었는데

노가다 아재들이 차는 벨트? 같은걸로 맞았는데

왼쪽 어깨 승모근쪽에 살이 터져나갔었다.

새엄마는 3~4명 정도 바뀌었던걸로 기억하는데

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피해자였다.

그러니 옆에 붙어있을 미련한 여자가 어디 있었겠나 싶다.

하지만 나는..

나만큼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지켜야겠다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지키지 못했다.

그 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피신시키고

나 역시도 도망나왔다.

그게 18살 때였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삼촌에게 인계하고 포항으로 모셨다.

나는 시내에 원룸을 알아보다가

운이 좋게도 1층은 칼국수집

2층은 칼국수집 사장님네 가족들이 사는

건물에 아주 싼 값에 입주하게 되었다.

사정을 설명하여 보증금은 안 받으셨고

월세는 20만원만 받으셨다.

원래는 아들이 쓰던 방이었는데

아들이 군대를 가게되어서 빈 방이 났다고 했다.

그 칼국수집 사장님이 정말 이것저것 많이도 챙겨주셨다.

물 밖에 없던 냉장고엔 김치와

오래두고도 먹을 수 있는 젓갈들로 채워주셨다.

덕분에 굶지는 않고 살았던 것 같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들이다.

그렇게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시점.

흙수저에 개망나니처럼 살았을지 언정

공부는 나름 했기에 내신 2등급을 받았고

누나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물리치료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을 감으로써 나는 흙수저 탈출,

해방이 될 줄 알았다.

어머니의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중고등학생 때에도 약간의 지원은 있었으나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고

대학을 갈때를 대비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누나의 대학진학은

어머니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학비, 용돈, 물론 누나도 알바를 꾸준히 했다.

그러나 대학 등록금은

단기 알바로 매꿀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어머니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왜 그러셨을까

어머니는 나에게

등록금을 지원해주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단순히 경제상황이 어려우셨을까 라고도 생각해봤지만

그때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 결정에 대해 의아했고 그 대상이 가족에게서.

누나와 나는 다른 취급을 받는다는게 못마땅했다.

그 소식을 듣고 며칠 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통보했다.

“대학을 가던 안가던 어떻게든 알아서 살겠다.

그동안 받았던 금전적인 것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겠다.”

“그러니 앞으로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말아달라.”

대학진학을 한것도 어머니의 뜻이었고

학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안 사정이 그러하니 당연히 취업을 생각했고

일찍이 돈을 버는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에게

“대학을 나와야 사람취급을 받는다.” 라며

그렇게 대학진학을 밀어부치셨는데

그런 어머니의 배신이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어머니와는

연락처는 있을지라도 연락을 하진 않는다.

10년이 넘게 지났어도

당시에 돈 때문에 생겼던 그 골이 꽤 깊은 것 같다.

아마 메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엔

나처럼 흙수저들을 위한 제도가 있었으니

바로 ‘국가장학생’ 이었다.

어찌저찌 절차를 밟아 첫학기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었고

동시에 ‘생활비대출’ 이란것도 있었기에 같이 받았다.

‘생활비대출’은 한학기에 한번.

최대 150만원까지 신청이 가능했는데

나는 150만원을 다 받았었다.

1학년 1학기.

생활비대출로 자금에 여유가 있었던 나는

그동안 못놀았던것 + 성인이니 여느 친구들과

같이 술마시고 흥청망청 놀았다.

덕분에 학기성적은 개판을 쳤고 F를 3개나 받았다.

회복할 길이 없을 것이라 여겨

1학기만에 군대로 도망치듯이 입대를 했고 (20살 10월)

사회생활엔 큰 문제가 없어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자대배치를 받기 전 보충대에서 대기중에

여자친구에게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여자친구도 나만큼 흙수저였지만

어머님이 계셨고

어머님이 애를 굶길 수준은 아니셨다.

그런 어머님이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여의었고

남아계시던 어머니마저 보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여자친구는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선택했고

홀로서기를 강제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던 탓일까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군인이던 나는

별다른 조치도 취해보지 못하고 이별을 당했으며

천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담으로 힘들기야 했겠지만

꼭 여자친구 어머님의 부고소식 때문에

헤어진것은 아닐것이다.

문제는 나한테 있었으리라 여기고

군생활을 하는동안 수많은 다짐과

나름의 노력으로 지금의 내가 된 것 같다.

이후에 서술하겠지만 덕분에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나는 여전히 지금보다도 못한놈으로 살았을 것이다.

나 역시도 사람인지라 이별의 아픔을 느끼고

동기, 선후임들과 으쌰으쌰 지내며 잊어가던 때에.

어느날 행보관이 나를 불러서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당직실로 오라고 했다.

가보니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교도소에 관한 얘기였다.

전화를 끊고 나한테

아버지가 지금 어디있는 줄 알고있냐 라고 물었고

나는 모른다고 답했다.

(행보관도 내 가정사는 어느정도 알고있었다.)

그러자 행보관이

“지금 아버지가 춘천교도소에 있으니

면회를 다녀와라” 라고 했다.

나는 안간다고 했으나

행보관은 무조건 다녀오라고 했다.

이유인즉슨 아버지가 2년전 3년형(폭행치상)을 받고

이미 복역을 시작했는데

모범수로 선정되어서

10개월 일찍 출소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혼자서도 잘만 출소하는데

왜 내가 가야했던걸까.

정확한 내용은 아니겠지만

받았던 형량보다 일찍 출소하게 되면

그 범죄자를 누군가가 보증?을 해야한다는.

그런 비슷한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을 나를 지목했고

그렇기에 군인이던 내가 가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때 나는 신병휴가도 못나갈 짬이었는데

그로인에서 강제로 신병휴가를 쓰게 되었다.

어찌저찌 교도소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출소를 도와주었다.

술을 안 드셨으니 멀쩡하게 얘기를 나눴지만

나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사람은.

아니 아버지는 변하지 않을걸 알았기에.

역시나 아버지는 10개월 보호감찰 기간에 사고를 쳐

다시 복역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다사다난한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하여

바로 복학을 했었어야 됐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1학년 1학기 학점을 망친탓에

2학기 복학을 하더라도

국가장학금이 나오질 않았으며 생활비도 없었다.

그래서 1년 더 휴학을 신청했고

냉장냉동 공장에서 알바를 했다.

당시에 최저시급이 4,500~4,800원 정도였는데

냉동파트가 8,000원을 준다길래 냉큼 지원했다.

덕분에 최저시급보다 돈을 많이 받게되어

10개월 정도 일하고 2개월은 쉬고 복학을 했다.

딱 1,000만원을 모았다.

복학을 하고 나서도

금전적인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기에

(복학생이라 놀고 먹는데에 돈을 더 많이 지출했다.)

학기중에 알바를 시작하게 됐고,

학기 중이니 당연하게도 야간알바를 하게됐다.

지방에 전문대라 그러한건지

아니면 내가 다니던 대학만 그러했는지.

기숙사가 있었음에도

오후10시부터 출입자체가 제한됐다.

그러니 야간알바를 하면서

기숙사에서 지낼수가 없었고 원룸을 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란법은 없는지

나는 또 다시 좋은 주인을 만날 수 있었고,

그 건물주분께서도 내 사정을 딱히 여겨

싼값(보증 200에 월25만원)에 지내게 해주셨다.

알바는 호프집에서 했는데

19시 출근 5시 퇴근. 10시간 근무였다.

(일당 6만원 정도)

5시 퇴근 후 자취방에 도착해서 씻고 누우면

6시 그리고 시간표마다 달랐지만

보통 3~4시간 정도 잠을 청했다.

잠이 부족하니 수업태도는 엉망이었고

내 사정을 모르는 또는 봐주지않는 교수님들에게

욕도 엄청나게 먹었다.

다행히도 평생지도 교수님께서는 내 사정을 이해해주셨고

힘들지만 이겨내서 졸업하기를 응원해주셨다.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한학기를 지내고 매일이 잠이 부족해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또 다시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웠으니.

기대를 져버리지않고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거두절미 하고 목적은 돈이었고 돈을 보내라는 얘기였다.

대학생인 아들에게 그 어떤 지원도 없었으면서

이제와서 돈을 달라니..

그때의 나는 멍청하게도 야금야금 모아두었던

전재산 100만원을 보냈고

남은 돈을 다 써버린 나는

다음학기를 지낼 여유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다시 휴학을 신청했고

그때가 2학년 1학기를 마친 시점이었다.

1년을 또 다시 알바로 전전하게 되었다.

이때는 한 일자리에서 오래한건 아니었고

노가다 6개월, 제주도에서 무 뽑기 1개월,

그리고 학기중에 일하던 호프집에서 알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다시 1년을 허비하고 2학년 2학기로 복학.

3학년 2학기가 될때까지 호프집 알바를 겸했고

잠은 여전히 3~4시간만 자면서 일했다.

그렇게 수면부족인 상황을 오래 지속한 결과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고

이윽고 외부로 신호를 발산하게 된다.

신장(콩팥)이 과부하에 걸린것인지

문제가 생겼고 혈뇨가 나왔다.

치료비가 많이 나올까 무서웠지만

동네비뇨기과를 찾았고

당장에 큰일이 나진 않겠지만

신장기능에 문제가 있으니

나중에 꼭 큰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당장 손을 써야할거라곤 식이요법과 운동이라고 하길래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 라면과 맥주를 주식으로 삼다보니

그런 것이겠거니 해서

일하던 호프집에서 남는 밥을 가져와

김, 계란만 해서 밥을 먹었다.

운동을 꾸준히 하진 않았지만

식습관만 고쳐도 호전세가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3학년 2학기가 되고 차근차근 모아둔 돈으로

남은 한학기만 보내면 되니 몸은 편해졌다.

그제서야 수업을 맨정신으로 들을 수 있었고

뒤쳐졌던 학업을 나름 열심히 따라갔다.

2학기 중간에야 알았지만

나는 참 머저리였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당시에 내 상황을 알고있던 몇 안되는 지인중에

고향 읍내에 있던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시던 분이 연락이 왔다.

주된 내용은

“어째서 기초생활수급자를 신청하지 않느냐”

는 내용이였고 나는 몰라서 안했다고 했다.

알고보니 난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자였고

당시엔 지금처럼

기초생활수급자 승인이 까다롭지 않았었다.

여차저차 늦게라도 알게 됐으니

기초생활수급자금을 받을수 있었고

그래봤자 흙수저 인생이지만

남은 학기(2~3개월)는 나름 풍족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금까지 같이 받게 된 터라

아버지에게 절반정도의 돈을 보내는건

고역아닌 고역이었다.

그러나 혹시나 나중에라도 돈 내놓으라거나 하는

꼬투리를 잡히기 싫었기 때문에 군말없이 보냈다.

어렵사리 졸업을 하고 물리치료사 면허도 취득했고

취업을 하기만하면 내 인생은 순탄하리라 생각했다.

취업도 오로지 돈만 보고 갔다.

충남 공주로 가게 되었고

28살 그때 연봉이 3,300만원 이었다.

알바만 하던 나에겐 큰 액수였고

기숙사마저 공짜라 나에겐 더없이 좋은 직장이었다.

물론 학자금대출중에

등록금은 근로장학금으로 메꿨으나

생활비대출은 그럴 수 없었기에

약 800만원 정도의 대출금이 남아있었다.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되었으니

그마저도 어려운 일은 아니였다.

천천히 갚기만 하면 되는 정도여서

신경쓸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예상했던대로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에게 한가지 딜을 제안했다.

그 딜은 다름아닌 초중고시절

본인이 지원을 아예 안한것은 아니니

돈을 매달 갚으라는 얘기.

참 씁쓸하고 화도 났다.

하루. 아니 몇시간을 고민한 끝에

어머니에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나도 빚지는건 싫으니 갚겠다.

그때 당시의 돈이 지금의 갚어치로

어느정도인지 환산하긴 어려우나

매달 20만원을 드리겠다.”

“기간은 10년동안이고

중간에 내 연봉이 오르는것과는 별개로

20만원 이상은 못드린다.”

어머니는 승낙하셨고

첫 취업을 하고나서부터 지금까지도

매달 20만원씩 드리고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후에 정말 중요한 순간에

꼬투리 잡히기 싫어서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1년 6개월 쯤 지나고 있을 무렵.

간간히 연락하고 지내던 삼촌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었다.

이후 누나에게도 알렸고

친부의 부고이니

병원에서도 유급휴가를 지급해줘서 고향으로 향했다.

약 4시간을 버스를 타고 가게 됐는데

버스 안에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슬프지는 않았다.

왜일까 라는 의문도 들지않을 정도로 무덤덤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다른 친척들이 다 와있었고

누나랑 내가 제일 마지막에 도착했다.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고 상주완장을 찼다.

손님을 받고 입관을 하고 발인을 할때에도

아주 어렸을적 좋았던 기억들이 떠올랐으나

슬프지 않았다.

힘들지 않았다.

장례후에 아버지의 장례 물건들과 영정사진은

내가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서 챙겼으나

할머니 할아버지에겐

아버지 부고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친척들이 그러하길 원했고

나 역시도 비록 자식일 지언정

못난 자식의 부고소식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아버지가 해외로 돈을 벌러 나갔다고 했다.

그러부터 1년후 어떤 경로였는지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아버지의 부고소식을 알게 되었고

마침 첫 기일때가 다가오던 중이라

제사를 지내자고 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내가 떠난 뒤부터 버려지다시피 했던 고향집을

수리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다시 모셨고

첫 기일이 되기 일주일 전에 이사를 마쳐

아버지의 첫 기일을 집에서 지냈다.

그로부터 3년 뒤

치매를 앓으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나는 고향집에 혼자 남게되실 할머니가 걱정되어

고향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나는 나를 키워주고 지켜준건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지금도 후회는 없다.

고향으로 이직하니 시골이라 그런지

같은 일을 하는데도 월급도 많이 주고 좋다.

지금은 연봉이 5,000만원 이다.

더 올라갈 길도 없지만

이정도면 만족하고 살려고 한다.

고향에 다시 오니

군인때 헤어졌던 전 여자친구에게 다시 연락이 와서

몇번 얼굴 보다가 기어코 다시 만나고 있다.

한 10년을 연락을 끊고 그친구는 그친구대로,

나는 나대로 살다보니 서로 다른사람이 되어있었다.

중간에 다른 여자들도 두어명 있었지만

결혼까지 생각한 친구는 없었는데

이번엔 좀 다른것 같다.

대출이 반을 넘지만 신축 아파트도 계약하게 되었다.

이제 1년정도 남았는데

남은 기간동안도 악착같이 모아야 한다.

지금 만나고 있는 친구랑은 2세는 계획하지 않고 있다.

누구라고 말할것도 없이 서로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걸까..

난 아직도 흙수저라 생각하고

내 아이는 흙수저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행복하게 해줄 자신은 있지만

불행하지 않게 해줄 자신이 없다.

그 골을 적어도 지금의 나는 메울 수 없을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다른분들이 나를 비난하고

헐뜯을지도 모른다.

‘누가봐도 행복한 것 같은데 왜 그러느냐고’

나 역시도 문득문득

‘이제는 흙수저가 아니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가난이란 경제적인 부분에서만 오는건 아닌 것 같다.

난 아직도 숫자에 돈에 민감하고,

옛 기억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부모를 원수로 여긴다.

흙수저들의 탈출에 있어서 가장 첫번째는

부모와의 연을 끊는것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그러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

그렇기에 내 머리는 여전히 가난하다.

이건 잊을수도 모른척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흙수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