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외박 2번”

결혼생활 6년차

남편이 말도 안하고 처음으로 외박을 했다.

술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닌 사람이라

한달에 한 두번 정도의 술자리는

그다지 신경쓴 적 없는데

어느날 아침 눈을 떴는데 침실에 없어서

이상한 느낌에 거실로 나와보니

귀가한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서 전화했더니 받지도 않고

네이버에 남편 회사 검색해서 전화해도 안 받고

(당연히 시간이 아침 6시 반..)

그때 든 생각은

‘이런 적 한번도 없었는데 무슨 일 생긴건가?’

온갖 안 좋은 상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데

그때 다짐했다.

살아만 있으면 용서하겠다고

제발 무슨일 있는거 아니고

그냥 술 취해서 안 들어온 것이기를.

그리고 부랴부랴 평소처럼 출근 준비하고

아이 등원 시키고 회사에 도착해서

엘베 타려는 8시 반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같이 마신 동료가

회사 근처 비지니스 호텔에 데려다주었다고.

?

나는 의문이 들었다

왜 미안하다는 말을 안하지?

제일 먼저 미안해 라는 말로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단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화가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아침의 다짐을 떠올렸다..

살아만 있으면 용서하기로 다짐했으니까.

일단 진정하고 업무를 보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가니 남편이 현관문에서 반겼다.

보글보글 김치찌개 냄새와 함께

저녁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더라.

그리고 자기가 해명을 하겠다면서 말을 시작했다.

회사동료 2명과 함께 술을 마시고

2차로 노래방에 갔는데

본인이 너무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자

동료 1명이 호텔에 데려다주고 집에 가버렸단다.

??

아침에 전화로 잠깐 들은 상황을

좀 더 디테일하게 푼거 말고

뭔 해명을 한다는건진 모르겠는데

조용히 밥을 먹다보니 여전히 화가 치밀러 올랐다.

‘이새끼 왜 미안하다고 하지 않지?’

‘제일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물어봤다

“왜 미안하다고 안하냐?”

그러자 남편은 큰 목소리로

“미안한 짓은 하지 않았는데? 난 떳떳한데?”

???

“우리 서로 미안함에 대한 기준이 다른가본데

내가 아침에 놀라고 당황하고

걱정하게 만든 부분에 대해서 전혀 미안하지 않니?”

라고 한 뒤 너무 충격적이라 그런지

그 다음 남편의 대답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나는

‘끝까지 왜 미안하다고 안하지?’ 라는 생각을 하며

묵묵히 밥을 먹었던 거 같다.

그게 남편의 첫 외박이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평소와 똑같았다.

나는 더이상 화가 나지도 않았다.

얼마 후

친하게 지내는 여자 동료들끼리 티타임하다가

지나가듯 이 일에 대해 얘기를 했더니

어린 20대 여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라고 물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했지..”

그러자 그 여직원은 펄쩍 뛰며 확인 안해봤냐고

자기 같으면 차 블박부터 다 확인하고

진짜 동료들하고 노래방을 갔는지

호텔을 혼자 갔는지

영수증이며 씨씨티비며 다 확인하고 난리치기 전에는

열받아서 잠을 못잘거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차를 호로록 마시며 대답했다.

“그래서 만약에 바람이면? 이혼할 것도 아닌데.

나는 남편의 행동이 아닌 말을 믿기로 했어.

어차피 같이 살거면 진실을 모르는 게 낫지..”

여직원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펄펄 뛰고

나이 지긋한 선배님은 웃으며 또 말한다.

“ㅇㅇ씨는 남편을 정말 사랑하네~ 금방 용서해주고~”

그렇다.

나는 회사 여직원들 사이에서

남편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있다.

물론 저건 비꼬는 말이겠지.

그런데 농담이 아니고 나는 남편을 정말 사랑한다.

언제나 남편의 출퇴근을 챙기고 식사를 걱정하고

진심어린 조언과 격려를 주고받고 스킨쉽도 잦다.

하지만 남편의 첫 외박 이후

나는 종종 의구심에 휩싸였다.

왜 나는 화가 나지 않지?

난 진짜 그날의 진실을 알고 싶지 않은건가?

이새끼를 너무 사랑하니까?

아니면 반대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두번째 외박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결혼생활 5년만에 남편의 첫 일탈이었지만

원래 처음 한번이 어렵지

두번부턴 다 쉬운 법이니까.

그렇게 한달 정도 지나고

남편이 또 술 약속이 있던 날.

이번엔 금요일이었다.

토요일 아침 6시 반에 깨서 거실로 나가니까

남편이 없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놀라거나 화가 나지 않았고

덤덤히 생각했다.

아. 두번째다.

침실로 돌아가서 아기 자는 옆에서 핸드폰하고 있는데

일곱시 반쯤 되자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폰 내려놓고 자는척 했다.

근데 모르고 잠들었다 미친.

9시 넘어 느지막이 깨어 거실로 나가자

남편이 있었다.

약간 어색한 표정이길래 얼른 선수를 쳤다.

“미안해~ 어젯밤에 일찍 잠들어버려서

남편 들어오는 것도 못봤네 몇시에 들어왔어~?”

남편이 뭐라 어정쩡 넘어가려고 하는걸 보며

콧노래를 부르며 아이밥 챙기고 집안일도 했다.

남편은 평소보다 좀 오바해서 잘해주긴 하더라.

그렇게 두번째 외박은

아내 모르게 (라고 남편이 생각하도록) 조용히 잘 넘어갔다.

왜 모른척 했을까?

사실 나도 그날 내가 왜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현관문 열리는 소리 나는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아 화내야 할 텐데. 따져야 할 텐데.’

매우 귀찮다.

그래서 그냥 모른척 했다. 그게 끝이다.

싸우기 귀찮아서. 그게 이유인 것 같다.

여전히 나는 남편을 사랑했고

서로 잘해줬고 대화도 많이 했고

가끔씩 내 마음속의 의구심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혹시 3번째도 있을까?’

하고 조용히 기다려봤다.

그리고 3번째는 외박이 아닌 좀 다른걸로 왔다.

그날은 평일이었고 다음날도 평일이었다.

남편이 전화와서 오늘 술한잔 할건데

집에 안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것이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안되지 들어와.”

그러자 남편은 조금 투덜거리며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3시 반이 넘어 귀가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아기 병원진료가 있어서

오전 반차를 냈었고

부산하게 병원갈 준비를 하는데

남편은 느지막히 9시쯤 깨어나서

물한잔 마시는 것이었다

“오늘 회사 안가?”

“아니 가야지”

“이렇게 늦게 출근해도 괜찮아?”

“괜찮아”

“그냥 출근하지 말고 집에 있어”

“왜?”

“어제 술마셔서 피곤하잖아ㅋ”

남편은 대답이 없었고

나는 아기 데리고 병원 갔다가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점심먹고 출근하기 위해 집에 들렀다

남편은 집에 없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출근했어? 집에 없네”

“어 출근했지 왜”

아니 혹시 출근 안했으면 같이 점심 먹으려고 했지

“어 출근 해야지 회사야”

“알겠어”

전화를 끊고 혼자서 밥 차려먹고 출근했다

남편은 출근도 늦게 하더니

퇴근도 일찍 했는지

오늘은 아기를 본인이 픽업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덕분에 모처럼 여유로운 퇴근길을 즐기고

집에 도착하니 남편이

아기 목욕도 해놓고 저녁밥도 해뒀다.

웬일이지? 너무 예뻐서 뽀뽀 해주고

씻고 나는 아기와 놀아주고

남편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회사 업무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잠깐.

주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눈길이 간 노트북 화면에서

나는 보았던 것이다.

“내일은 회사 창립기념일이자 휴무입니다”

라는 한줄을.

내일은회사창립기념일이자휴무입니다

내일은회사창립기념일이자휴무입니다

내일은회사창립기념일이자휴무입니다..

순간 번개같이 내 머릿속에 퍼즐이 맞추어지고

아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구나.

하지만 보다 정확한 증거가 필요했다.

남편이 전날

술을 진탕 마시고 왔으며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한 바로 오늘이

남편 회사의 창립기념일이자

휴무라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서

일단 남편회사 홈페이지를 뒤져봤다.

창립연월까지 밖에 나와있지 않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회사 전화로 남편 회사에 전화를 걸어볼까?

(혹시 어제가 창립기념일 휴무였나요?)

만에 하나 전화 받은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다시 걸기라도 하면 뽀록난다.

(우리회사는 네 ㅇㅇ업체입니다 하고 전화를 받는 회사다)

핸드폰으로 걸어볼까?

안된다.

내 폰번호 뒷자리는 남편번호와 동일하다.

다른 사람 폰을 빌려볼까?

설명하기 귀찮아서 안된다.

고민 끝에 친구에게 카톡을 했다.

“야 내가 되게 별로인 부탁을 하나 해도 되냐”

“아 뭐야 듣기도 전에 별로야 하지마”

“ㅇㅇㅇ-ㅇㅇㅇㅇ 이번호로 전화 걸어서

혹시 어제가 창립기념일 휴무였나요? 물어봐줄래?”

“뭐야 미친거 아냐ㅋㅋㅋㅋ”

친구는 ㅋㅋㅋ를 200개 정도 보내더니

사정을 물어보고

남편 회사 페북에서

정확한 창립기념일 날짜를 찾아 보내주었다.

어제가 맞았다.

이로써 남편이 회사 휴무인데

뻥치고 출근한 척 했다는 정황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친구는 진지하게 조언했다.

화내지 말고 조근조근 너의 개빡치는 마음을 설명해봐.

회사 휴무라서 혼자 조용히 쉬고 싶다고 하면

내가 이해 못해줄 거 같았냐.

휴무 자체를 숨겼다는게 서운하다.

부부사이에 이런 작은 일도 숨겨서야

어떻게 신뢰가 유지되겠느냐.

이렇게 말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친구는 전제부터 틀렸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아~그랬구나”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정황 증거를 들이밀며

남편에게 해명을 요구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궁금증을 해소한 후

나는 평소대로 회사업무를 보고

평소대로 퇴근하고

평소대로 아이를 돌보고

평소대로 남편에게 저녁밥을 차려주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내 마음의 의구심이 커져갈 뿐이었다.

난 남편을 사랑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어느날 아주 사소한 계기로

앗 하고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평소처럼 남편이 나에게 무언가 질문을 했고

나는 무심하게 대답을 했다.

평소처럼 남편은 나에게 설교하듯 잔소리를 했다.

“너는 다른 사람들한테 너무 관심이 없어.”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사랑하는 건 남편을 사랑하는 나였구나.

다정한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고

사이좋은 부부로 지내는

나 자신을 사랑한 거였구나.

남편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남편을 사랑하고 가정에 충실한

내 역할 내 모습을 사랑한 건 진심이었구나.

나는 어쩐지 즐거운 마음이 되어 남편에게 질문했다.

“내가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없어서

당신은 나하고 사는거 편하지 않아?”

남편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여기까지 소소한 나의 결혼생활 이야기.

나는 더이상 4번째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어차피 지금까지처럼

그냥 그렇게 지나가버릴 걸 아니까.

결혼생활 6년 차

나는 남편의 월급날도 모른다.

월급이 정확히 얼마인지도 모른다.

남편이 연차쓰고 쉬는 것도 한번도 못봤다.

남편이 그 회사에 다닌 3년동안

남편 회사가 창립기념일에 휴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아마 남편은 내년에도 말을 안하겠지.

아이가 여름방학 중이라

나도 회사에 휴가를 내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남편은 여전히 계속 출근한다.

휴가 시즌이지만 휴가는 없다고 한다.

오늘 아침 출근하는 남편의 아침밥을 차려주면서

그래도 아이 여름방학인데

평일 하루 휴가내고 다 같이 놀러가지 않겠어요?

물어봤다.

장모님과 다녀오라고 한다.

다들 나와서 일하는데

어떻게 자기 혼자 쉬겠냐고 한숨을 쉰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 회사 사장님한테 전화 한통 해야겠네~

(사장님이 친한 형)

아니 이러려고 우리 신랑 데려갔어요?

여름휴가 하루도 안주고 일 시켜먹으려고?

악덕 사장이네

그럼 당신 회사 사장님이 막 당황하면서

이렇게 말하는거 아냐?

무슨 소리예요 제수씨.

우리 회사 저번주부터 휴가였는데.”

내가 말을 마치고 혼자 낄낄대며 웃자

남편은 아무말도 없이 밥을 먹고 출근했다.

남편을 배웅하고

나는 아기 깨어나길 기다리며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오늘은 아기 데리고 근처 공원 물놀이터 가서

같이 물총놀이하며 재미있게 놀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