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호적 안 파줘서 직접 파버린 22살..

세상에는 흙수저,동수저,은수저,금수저가 있다.

동수저 이상의 폭력가정의 무서움은

흙수저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

동수저 이상 부모들은 흙수저 부모보다 돈이 많고

개소리에도 논리가 있기 때문에

그 자식들이 부모님에게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아래는 내가 22년간 폭력가정에 빌붙어

살면서 있었던 일들과

탈출 과정 및 후유증.

정신병 호전 상태 및 사회성 증가를 다루고자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은

아버지가 나를 내다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장면이었다.

5살 무렵으로 기억한다.

나는 엉엉 울었고.

이게 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이다.

그 이전 기억에서도 우리 아버지는

꽤나 무서운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집안 어른 얘기에 따르자면, 그렇다.

쓰다가 멘탈 터질 것 같아서

이것까지 끄집어내긴 좀 그렇다.

우리 아버지는 선비였다.

잔인한 선비.

우리 아버지는

‘나 어릴 적엔 소설책을 읽으면

공부 안 한다고 혼났는데

니들은 그런 소리 안 들으니 얼마나 좋냐’

라고 하시며

책읽기를 강조하셨다.

문제는 책읽기 이외의 문화를

다 개쓰레기로 치부했다는거다..

그래서인지 나는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도 잘 몰랐다.

집안이 그런 걸 안 듣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당시 노래를 잘 몰랐고,

이제서야 유튜브에서 그 시절 노래를 찾아 보고 있다.

이건 초등학교 시절 기억인데,

영어 시간이었다.

원어민 선생님이 대중가요의 일부분을 잠깐 틀어주면

그걸로 노래를 맞추는 게임을 했는데

나랑 같은 조가 된 애들이

나는 쳐다도 안 보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더라

그러다 아는 노래가 하나 나와서 하나 맞추니까

“박OO이가 노래를 안다고?”

이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얼마나 또래 문화와 유리되어 자라왔는지

요즘 들어서 알겠더라.

테레비에서 연예인들이

노래 부르길래 쳐다보고 있으니까

언제 오셨는지 아버지가 옆에 있었다.

끄라고 압박하셔서 껐다.

그리고 나한테 다 들리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선 시대 같았으면

기생으로 살다가 비참하게 죽었을 것들.’

가수들의 노력을 비하하는 그 발언에도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래는

FT아일랜드의 ‘바래’ 라는 노래였다.

개띵곡인데.

우리 아버지는 부산대 이과 나온 586이다.

당시 부산대면 ㅅㅌㅊ인재인데도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유사과학을 많이 믿으셨는데

대표적인 것이 아래의 개소리다.

“입안에 상처가 났을 때는 짠 걸 먹어라!”

“물을 많이 마시면 살이 된다!”

“양약은 독이니 한약을 먹어야 한다.”

대가리가 커서 이것들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을 때도

나는 함부로 이를 지적하지 못했다.

지적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것을

학습에 의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권을 가진 자는 집에서 왕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왔기 때문에

그가 한 모든 폭력이

‘그냥 가족 대하는 것에 서툰 사람’

정도로 합리화 되었다.

아예 ‘내 돈 없으면 니들은 다 길에 나앉는다’

라고 대놓고 말하기까지 했으니.

우리 이버지가 얼마나 이런 것에 밝은지 알 수 있다.

어이가 없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머니한테

‘집에서 살림이나 잘 하라’면서 일을 못하게 했고

어머니는 경력 단절 여성이 되어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어머니는 아버지와 많이 싸웠는데

최근에는 ‘니가 아버지를 이해해라’ 이런 말만 하셨다.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의 3주력기인

“X년”

“X같은년”

“X신 같은년”

콤보를 20년 맞다 보니

뇌에 이상이 생기신 듯했다.

불쌍한 분이긴 하지만

저런 사고는 내 발전을 막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정 손절할때

부모님 두분 카톡 다 차단했다.

위의 3단콤보는 그냥 하품 내는 수준이고

온갖 상스러운 욕을 다 하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였다.

하루는 고2 동생이 10시 넘어서 놀다 들어왔는데

이것 때문에 술을 마시며 동생을 욕했다.

대충 약한 걸 적어보자면

‘인간 같잖은 년’

‘날라리 같은 년’

이라는 식으로 동생을 창’년 취급하면서 욕하다가

동생이 10시 30분쯤 들어오자 머리채를 잡아뜯었다

내가 어그로 끌어서 대신 맞았기를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동생 예쁜 얼굴에

상처 하나쯤을 났을거다.

집에서 인터넷이나 하던 나와는 달리 동생은 예쁜 십인싸였다.

아버지는 자기가 잘못하는 줄은 아는 분이셨는지

내가 어머니랑 얘기할 때는

항상 큰 소리로 말하라고 하셨다.

아버지 뒷담까다가 걸린 이후

나는 어머니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해야 했다.

정말로 자기가 잘못하는 줄은 아는 분이셨는지

친척들 앞에서는 허허 웃으며 아주 호인이 되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어차피 집에 가서 원래대로 돌아올거면

그냥 여기서도 하던 대로 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대졸 출신 폭력가장의 무서움이 드러나는데

이들은 지능을 갖추었기 때문인지

가정폭력을 은폐하는 것에 능하다.

그래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내가 말씀드리기 전까지는

외삼촌 외숙모는 아예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몰랐다고 슬퍼하시고 미안해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회사생활을 짐작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기분 안 좋은 일이 있던 날은

집에서 폭언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맨날 집에 들어오면서

‘오늘은 아버지 기분이 좋게 해주세요’

라고 빌었던 기억이 있다.

그 기도는 대개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상 내 방문을 열어놓게 하셨다.

나중에 내가 크고 나서 문을 닫을 수 있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이걸 해 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좋은 아버지라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머리가 귀두컷으로 고정이었다.

이렇게 안 하면 집안에 난리가 났다.

이렇게 하면 애들이 놀린다고 하자

‘왜 너는 너만의 길을 가지 않고

남들 따라하려고만 하느냐?’ 라고 하셨다.

아니 나만의 길은 내가 원해서 가는 길이지.

내가 좀 크고 나서는

머리에 터치를 안 하는 척 하면서도

은근히 압박을 넣었다.

항상 ‘너만의 스타일’이라는 식으로

자기가 내게

옳은 길을 가게 해 준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래도 귀두컷은 아닌 것 같다.

아버지는 항상 말했다.

‘다른 집에서도 다 이러고 산다.’

이게 아니라는 것을 대충 깨달은 게 13살 전후였다.

하도 이상해서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욕하는 걸 녹음한 뒤

친구들한테 물어보려다가 걸려서 뒤지게 혼났다.

집안 말아먹으려는 호로자슥이라면서.

아버지는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폭력 합리화에 능했다.

아버지는 자기가 할배 할매한테 당한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니

자기는 가정폭력을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친구들 10명에게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설명해주고

여기가 한국이 아닌 미국이었으면

가정폭력으로 감옥갔을 일이라는 것을 안 뒤

이걸로 따지자 하시는 말이

‘그게 부모한테 할 말이가?’ 였다.

동생이 왜 자신에게

‘X년’이라고 했느냐 그거 하나 따졌는데

아버지 왈.

“니가 그런 소리 들을 짓을 했으니 그랬겠지?”

어머니한테 함부로 하는 것을 따지자

‘원래 여자가 남자보다 말발이 세니까

남편들은 자연히 손찌검하고 그러는게

일반적인 가정이니 오바하지마라.’

라고 하셨다.

말이 안 통했다.

언제는 어머니한테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지 말라고 분명히 했을텐데’

라고도 하셨다.

내가 손절 직전에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따지며 사과를 요구하자

하시는 말씀.

“니가 진짜 폭력을 안 당해봐서 하는 소리다.”

아버지는 내가 가정폭력의 부당함을

지적할 때만 나를 때리셨기 때문에

시도때도 없이 자식을 패는 가장이 폭력가장이고

자기는 폭력가장이 아닌 줄 지금도 알고 있다.

지금까지 맞은 것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나를 엎드려뻗치게 한 다음에

저 멀리서 달려오면서 몸무게를 실어 차는 것이다.

내가 울면서 계속 피하자

어머니는 ‘빨리 끝나게 맞아라.’ 고 하셨다.

아버지가 나를 때리고 난 다음에

어머니는 이런 말을 종종 하셨다.

“오늘 아빠 많이 참았다.”

“원래 저런 사람이니 니가 이해해라.”

“진짜 폭력 가장들 하는 거에 비하면

너거 아버지는 아무 것도 아니다.”

집안의 누구도 때린 사람 걱정만 하지

맞은 사람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외삼촌 제외 친척들은

우리 아버지가 이런 사람인지 모른다.

아버지는 항상 좁은 문으로 갈 것을 강조하셨다.

그러면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마음에 안 드는 성적을 받고

대학에 합격하자 때려치고 다시 공부해서

수석합격한 파스퇴르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다.

하시는 말씀 중 하나가

‘너는 공기업 간부가 될 자질이 있다.’ 였는데

사회성이 0에 가까운 내가

공기업 내의 정치질을 뚫고

간부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내가 도축업자가 되겠다고 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하셨다.

“니 백정될라고 그라나?”

자기보다 돈 많이 버는 장인을 무시했다.

여기까지 그간 당한 것의 일부이다.

‘탈출 과정과 후유증’

나는 가족이 내 주소지를 떼볼 수 없도록

온갖 서류를 준비하고는

마지막 기회를 드리고자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이

“니가 진짜 폭력을 모르는구나” 였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고

울분으로 온몸이 부들거렸다.

그래서 아버지를 ‘귀하’라고 부르며 개기자

깔끔하게 손절 당했다.

질척하게 달라붙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금세 끝나서 기뻤다.

후유증으로 나는 며칠간 악몽을 꿨다.

손절 3주차인데

나는 지금 학교를 휴학하고

마트 정육점에서 일하고 있다.

정육점이라서 군기 빡세게 할 줄 알았는데

아버지보다 친절하게 대해주시더라

그리고 내가 잘못했을 때만 혼이 나서 좋았다.

나는 여기서 상인이라는 직업의 핵심인

‘신뢰’의 중요성을

유통기한 관리하면서 배웠다.

손절 3주차 좋은 점?

지난 5년간 약을 먹던 우울증이 급격하게 나아졌다.

우울함의 원인이 제거되니 당연한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내가 아버지 욕할때 이런 말을 했다.

‘니가 그런 좃같은 집에 붙어있는 것은

니가 아직 견딜만하기 때문인 것이다.

진짜 폭력가정이면 뛰쳐나왔을거다 물러터진놈아.

아버지 돈 빨아먹고 싶으니까

참고 사는 것 아니냐?’

처음에는 이 말에 화가 났었다.

왜 피해자인 나를 욕하냐고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니까 경제권이 있어야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세상이다.

지금은 그때 나에게 그런 말을 해 준

그 사람들이 너무 고맙다.

진리는 그 새끼들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새 정신적으로 눌려 있던 것이 없어지면서

너무 마음이 편하다.

아마 아버지 돈때문에 계속 당하고 살았더라면

나는 영원히 못 벗어났을 것이다.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이 끊겨서

가난해졌지만 마음이 너무 편하다.

노브랜드 초코링 시리얼 사다가

시리얼 먹고 물 마시는 식으로 같이 먹는데

1월 10일날 월급 나올 때까지만 이러고 살면 된다.

가정폭력 탈출한 내 인생이 자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