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탈출하려 했을 땐 이미 늦은 걸 직감해버린 사람

집에 나 혼자 누워서 티비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탄내가 나기 시작함

설마 가스렌지 불을 안껐나?? 싶어서

호다닥 뛰가봤는데 꺼져있음

이거 그럼 컴터 오래 켜놔서

싸구려 멀티탭이 타는 냄샌가? 싶어서

코드 스위치 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크게 남

어 이거 어딘가에 불났구나

라는 생각이 번쩍 드니까

바로 수건에 물 묻히고

마스크 쓰고

폰 지갑 패딩 챙겨서 무작정 뛰어 나왔음

근데 단 몇걸음 내려갔는데

연기가 너무 뜨겁고

너무 매워서 눈을 뜰수가 없었음

내가 눈을 뜨고 있는데

내 눈이 먼건지

아니면 앞이 시커먼건지

눈이 아파서 내가 눈을 감고 있는건지를

내 느낌으로 전혀 구별할 수가 없더라

앞이 안보이는 상태로 숨이 안 쉬어지니까

갑자기 패닉에 빠졌음.

낮은 자세로 내려가고 있다가

방향을 잃고 바닥을 짚었는데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랜지 조차 모르겠었음

어둠 속에서 뜨겁게

익사하는 느낌을 느끼면서 바닥 헤집던 중에

비상표시등 딱 발견하고

집까지 겨우 다시 돌아왔음

불빛으로 위치 감 잡았는데

표시등이 없었다면 아마 못 살았을 거임..

계단에서도 길을 잃을 수가 있더라.

그러고 집에 돌아와서 컬록컬록 하면서

창문에서 숨쉬고 있으니까

위에서 “살려주세요!!!!” 소리도 들리고

“여기 사람 있어요!!!”도 들리고

밑에서 소방관 아저씨가

“가만히 집에 계세요!!”

하고 소리 치는게 들렸음

엄마한테 전화해서 불났다고

집에 오지말라고 하고 있었는데

밑에서 들리는

‘집에 계세요!!!’가

사람들 안심 시켜줄 때 쓰는

사망플래그 같은 느낌이 갑자기 확 들더라.

온사방이 불타는 냄새에

빠져나갈 수도 없이 갇혀있으니까

진짜 끝이란 생각이 들었음

아 나 죽는구나.

그래서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작별인사 했음

그동안 속 썩여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전화 끊고 머리는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해져가는데

창밖에 뛰쳐나오는

반대동 사람들 보면서

‘좋겠다.. 나도 살고싶다’ 생각하는데

조금 있다보니까 문에서

쾅쾅쾅!! 하는 소리가 들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더라

엄마가 밑에서 우리집에 사람 있다해서

소방관 아저씨가 무전듣고 온거같았음

문 여니까

연기속에 방화복 입은 소방관 아저씨가

딱 서서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그냥 영웅이었음

그냥 슈퍼맨이고 슈퍼 히어로였음

너무 멋있고 눈물나게 고맙더라

소방관 아저씨가 올라오면서

계단에 창문 다 열어놓은건지

연기가 많이 빠져있었고

계단등도 그제서야 켜져서 앞이 보이더라

부축 받아서 아파트 밖으로 나오니까

소방관인지 구급대원인지

요앞에 화단에 앉아있으라고 하시길래

앉아있는데

그 상태로 쓰러지면서 구토 미친듯이 했음

누가 계속 토닥토닥 해줬는데

토하다 보니까 앰뷸런스에 실려있었음

앰뷸런스에서 토 한번 더하다 보니까

병원에 도착함

일산화탄소 중독엔 산소 마셔야 된다고

산소 마시면서 혈액 분석 했는데

다행히 결과는 정상치 떴고

거기서 친구 전화도 받고

괜찮다고 전화로 연락 돌리다가 집왔음

그러고 코 풀었는데 시커먼 콧물 나오더라

집에 있다가 불난다는 생각은

상상도 해본적이 없는데

이번에 느낀건

사이렌 울리고 정신없는 상황되니까

딱 훈련받은거 밖에 생각안남

물에 젖은 수건

엘리베이터 이용 x

낮은자세

비상구로 빠른 탈출 등등 같은 기본적인 것들.

근데 마스크에

물에 젖은 수건 올리니까 숨이 안 쉬어지더라

여과해서 공기가 들어올 줄? 알았는데

입코에 들러붙어서 오히려 숨을 막음

결국 숨참고 나와야되는데

앞이 안 보이는 상태로

고층에서 1층까지 숨참고 내려갈 자신은

불안나는 상태에서도 없음

엘베 안 타는건 당연한거고

낮은 자세로 내려가야 했는데

계단으로 내려가려니까

사실상 계단통로 자체가

하나의 굴뚝이 돼서 의미 없는거 같았음.

어차피 내가 밟고 있는 계단도

나한테만 아래일 뿐이지

아래에서는 윗부분일거잖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냥 제일 나은 방법은

베란다 창고쪽 벽 뚫고

옆동으로 나가는거였음

그동안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잘 탈출하면 되지 머가 문제임?

라는 생각 갖고 살았는데

진짜 화재교육 받은거 기억하기도 힘들고

아무 생각이 안들더라..

넘 무서웠음

원인은 아직도 안 밝혀졌고

아파트 1층에서 났다고만 들었음

이날 엄마 생신이였는데

밖에서 밥 먹다가 내 전화받고

헐레벌떡 뛰어오셨더라..

진짜 화재교육 주기적으로 받아..

주변 사람들한테도 꼭 받게하고.

언제 누구한테 일어날지 모르는 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