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플 때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신을 미친듯이 증오하게 된 아들

우리 집은 4인 가족임.

나이는 아빠 66세, 엄마 62세,

형 36, 나 34

아빠 엄마는 노후 대비 안되는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셨다

두 분 합쳐서 월 300도 못 버는 것 같고

노후 연금도 인당 30씩이나 나오시나..

1달 전, 7월 14일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심방세동으로 인한 혈전이 뇌로 날아가서..

뇌로 통하는 혈류를 막아버렸다.

몇 주 전, 심방세동을 1분 정도 검색해보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버린 내 오산이었다.

뇌졸중에 걸릴 확률이 5배가 높다는걸

왜 터지고 나서야 알게 된걸까..

쓰러지시기 전 7월 6일 카톡..

7월 21일 강남세브란스에서 진료 받기로 했는데

그 1주일을 못참고 그렇게 쓰러지셨다.

못난 아들은, 새로운 일에 적응한다고

저렇게 무책임하게 대답했었다.

‘별 일 없을거야’ 가 아니라,

당장 뇌 검사를 하자고 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들 걱정 뿐이었다.

미련하게도..

쓰러지기 전 날 심한 두통이 왔는데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얘기도 안하고

그 와중에 내 걱정만 하고 있었다.

엄마가 쓰러진 다음 날 7월 15일,

일 하고 있느라 아빠와 형은

나에게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사주 한 번 보겠다고

병원 집중치료실에 들어간 엄마에게

저런걸 물어보고 있었다니 정말 한스럽다.

난 쓰레기 같은 못난 불효자 놈이다.

골든타임에 응급실에 갔지만

심방세동 때문에 혈전용해제를 사용하지도 못했다.

뇌 손상이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것을

매일 CT, MRI 를 통해 확인 할 수 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생명과 지장있는 숨뇌, 소뇌가

집중적으로 손상되기 시작했다.

저 하얀 부분이 손상 된 부위인데..

심지어 숨뇌에서는 부종까지 자라나기 시작했다.

부종이 더 자라 뇌가 부풀게 되면

뇌압을 낮추기 위해 뇌를 열어야 한다고 했다.

그나마 드는 약인 만니톨을 때려 넣기 시작했다.

기적인지 다다음날 부터 부종이 멈추기 시작했는데,

이미 부종이 생긴 뇌의 일부분은

나중에 빈 공간으로 남는다고 한다..

뇌세포를 잡아먹고 남는게 빈공간이라니..

어쨌든, 우리 엄마는 숨뇌와 소뇌의 절반이

뇌경색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균형 감각이 제로가 되어 혼자 서있지도 못하고,

왼쪽 얼굴엔 마비가 오고, 말은 어눌하고,

코에 줄을 꽂아서 죽 처럼 되어있는 영양식을

위에 바로 공급하고 있다.

물도 아무때나 못 마신다.

뇌질환은 장기전인 경우가 많다.

수술하고 몇 주 고생하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일반 환자들 같은 경우는 없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쓰러져

지금까지도 의식 없이 누워만 계신 모친을

간호하는 백발의 형님과 같은 격리 병실을 썼다.

대학병원이라도 보호자 베드는

정말 여기서 어떻게 자라는건지 모를 정도로

불편하게 만들어져 있다.

175cm 넘는 사람이 누우면 다리가 삐져나온다.

182cm 정도 되보이는 형님이

이런 곳에서 9개월을 주무셨다고 한다.

뇌질환은 환자 본인이 가장 힘들지만,

보호자도 정말 힘들다.

가족 간병이 힘들어서

조선족 간병인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다.

하루 12~14만원의 비싼 간병비는 기본이고..

형이 보호자로 있다가 코로나에 걸렸다.

밖에서 음식을 사먹다가 확진자와 접촉 했나보다.

다행히 환자 본인인 엄마는 음성이었고,

형은 아빠로 보호자 교대를 했다.

며칠 뒤, 아빠의 엄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이니 조모상이다.

아빠는 배우자도 뇌경색으로 쓰러져있는데

엄마도 하늘나라로 가셨다.

엄마는 환자, 형은 코로나,

나는 아빠랑 보호자 교대.

아빠만 급하게 내려갔다.

장례식장에서 아빠를 든든하게

옆에서 지켜드리는게 소원이었는데,

이런 개 엿 같은 상황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아빠와 교대 한 날,

원래 내 희귀병인 근육병 때문에

강남세브란스에 6일 동안 입원해서

고용량 스테로이드를 맞아보기로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다.

전전날 분명 PCR 음성이었는데,

교대한 날 컨디션이 좀 좋지 않았다.

목이 아팠다.

잘 때가 되니 오한이 시작되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랬을거라 생각했다.

다음 날, 오전에 병원 근처 내과에서

신속항원을 했고, 나는 양성이 나왔다.

순간 자리에 주저앉고 엉엉 울었다.

왜 이런 개 좃 같은 상황이 계속해서 생기는거지?

하늘이 있다면 왜 이런 시련을 계속 주는지

물어나 보고 싶었다.

나는 쫓겨났고,

아빠는 할머니의 임종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올라왔다.

다다음 날, PCR 검사 음성이 나왔던

엄마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열이 38.3도 까지 올라갔다.

우리 가족은 모두 직감했다.

코로나구나..

이때는 정말 자포자기 상태였다.

엄마는 뇌경색이자 심방세동이자

코로나 환자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1주 넘게 몸을 씻지 못한 엄마가

음압병실에 혼자 격리되기 전

마지막으로 씻겨주겠다며

마스크를 다 벗고 1시간 넘게 목욕을 시켜준

66세가 되신 아빠의 마음을 난 알다가도 모르겠다.

엄마는 어제 낮에 음압병동으로 옮겨졌다.

이제 보호자도 없고,

거동이 불가한 환자에게 답답함은 치명적이다.

2시간 정도 전화가 되지 않더니,

입원하고 처음으로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히드러어어어어어어어” “사려저어어어어어”

나는 이성을 잃었다.

무례를 무릅쓰고 음압병동 간호사실에 전화를 미친듯이 했고,

울면서 엄마 상태를 제발 봐달라고 했다.

공기가 완전 차단되어 있는 음압병실에서

에어컨도 안 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 코로나 환자들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엄마는 조금만 온도 조절이 안되도 치명적이다.

조금만 더워져도 마치 관에 들어가

옴짝달싹 못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에어컨을 빠르게 켜달라고 했고,

다행히 어느정도 나아진 것 같았다.

코로나 때문에 아픈건 그렇다 치더라도..

걱정되는 마음에 오늘 새벽에 계속 깼다.

엄마가 카톡을 읽었는지 확인했고,

조금만 더워져도 내게 전화를 하라고 했다.

오늘은 드디어 병원 영업일,

국립재활원에 해당 상황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재활이 한시가 급한 환자

(발병 후 3개월 내를 보통 재활의 골든타임으로 본다.

잘해도 정상인의 60~70% 수준밖에 안되지만..)

인데..

코로나 때문에 8월 18일에서 8월 29일로 입원이 밀렸다.

그럼, 다음 주는 또 지금 병원에서 쫓겨나서

일주일 동안 어디에 있어야 할까..

미칠 것 같다..

좃 같은 상황에 집안에 돈 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서 병가든 휴직이든 쓰지도 못한다.

업무로 연락 올 때 마다

솔직히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이 모든 것이 한 달 동안 일어난 일이다.

정말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너무 많아

속이 타고 심장이 사라져버릴 것 같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걸까.

어렵게 잠들고 일어나서

잠시동안 현실에 대한 생각이 안들 때,

그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일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