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첫사랑을 이제 그만 포기하기로 한 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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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조용한 모범생이었다.

어딘가 늘 들떠 있던 나와는 달리

너는 마냥 가지런했던 소년이었다.

같은 반이었음에도 굳이 인사를 나누지 않는 사이.

딱 그 정도의 거리감이

우리 사이엔 당연하게 존재했다.

내 눈에 너는 잘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걸 이상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에,

나는 그 날도 친구들과 계단에서 철없이 웃고 까부는데

눈에 한번도 띈 적 없던 네가 불쑥 나타나더니

내 머리 위로 손을 드밀었다.

고개를 돌릴 틈도 없었다.

그리고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네 손에 맞은 농구공이 튕겨 나갔다.

한 층 위에선 농구공을 떨군 남자애들의 사과가 들려왔다.

넌 내 눈을 빤히 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당연했다.

농구공을 맞은 건 내 머리가 아니라 네 손이니까.

얼떨떨하게 어, 하고 대답을 건넸다.

너는 그럼 됐다는 듯,

아무말도 더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함께 있던 친구들은 장난스레 유난을 떨었다.

뭐야, 오늘부터 1일이야?

그런 실없는 농담을 맞받아치는 와중에 든 생각이 있다면

‘쟤가 저렇게 키가 컸었나.’

‘왜 그 전에는 키가 큰 줄 몰랐지.’

..그랬다.

네가 계단을 내려가던 딱 한 걸음 이후부터

뭔가 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보이지 않던 네가 보이기 시작한 걸 두고,

아니 좀 더 집요하게

내 눈이 너만 쫓기 시작한 걸 두고

시야가 넓어졌다 해야할지

좁아졌다 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너는 너처럼 조용한 몇몇 친구들과만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그 중에서는 꽤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너는 수학을 좋아했다.

눈에 띄게 좋은 성적이 아니라 잘 몰랐는데,

수학, 과학 만큼은 꼭 높은 점수였다.

너는 다른 애들이 다 싫어하는 수학 선생님까지도

꽤 진심으로 좋아했다.

너는 나이에 안 맞게 서태지 노래를 즐겨 듣는 듯 했고,

나이에 맞게 소년만화를 즐겨 읽었다.

너는 스도쿠를 좋아했고,

샌님같은 모습과 달리 농구를 좋아했다.

나이 어린 여동생을 유달리 예뻐했다.

너는 예쁜 귓볼을 가진 소년이었고

짧게 자른 머리가 잘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나는 우리 사이에 당연히 존재했던

거리감을 좁힐 재주가 없었다.

나는 또래보다 덜 자란 구석이 있는 계집애였고,

너는 또래 여자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조용한 소년이었으니.

여전히 데면데면하게.

앞서가는 마음을 뒤따르지 못하는

성장의 속도만을 원망한 채

우린 다른 반이 되었고 졸업을 맞이했다.

그 텅 빈 학창시절만이

나와의 유일한 접점으로 남은, 너는 타인이 되었다.

가끔 네가 생각이 났다.

누군가 남자친구에 대해 물을 때나,

주변의 연애를 볼 때 생각 났던 것 같다.

정말 가끔이었다.

너를 우연히 다시 본 건 낯선이의 타임라인에서였다.

너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주 잘 부르는 건 아니었지만

꼭 너처럼 담백하게 불러낸 노래였다.

그리고 화면 속의 너는

그 노래를 낯익은 여자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여자애였다.

졸업 이후 동창끼리의 첫 연애라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네 첫 여자친구는 너만큼 가지런하고 조용한 애였다.

그러니까,

나랑은 많이 다른.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그 영상을 보고, 또 봤다.

되게 촌스러운 옛날 노래였다.

네가 한껏 부끄러워 하는 게 느껴지는 노래였다.

나까지 부끄러워질 정도로 부끄러운 와중에도

영상을 계속 돌려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네 생각이 가끔 났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내 책장에 꽂혀있는 수많은 퀴즈잡지엔

스도쿠가 있는 페이지만

새까맣게 연필이 묻어있는데.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서태지 노래가 제일 많은데.

나는 아직도 그 농구공만 보면

그 날 그 계단 위로 돌아가는데.

어떻게 그게 가끔일 수 있나.

완벽한 타인이 주인공인 영상을 보고 또 보며,

나는 청승맞게 울고 말았다.

묵은 감정들이 비로소 얼굴을 드러냈다.

참 오래도 끌던 첫사랑은,

시작만큼이나 소리 없이 끝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