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마리모’가 수세미란 걸 알게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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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모를 키운지 3년이 훌쩍 넘었다.

저 어항 밑바닥에 찌그러진 까만 돌처럼 보이는 게

나의 3년생 마리모다.

이름은 딱히 없었지만

편의상 막시무스라고 부르기로 하자.

우리 막시무스는

내 생일날 친구들이 선물해준 예쓰(예쁜 쓰레기)였다.

먹이를 준다든가

관심을 가지고 이름을 불러준다든가

잘 자라고 자장가를 불러준다든가는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생각날 때마다 물도 갈아주고

이사를 올 때도 나름 고이고이 챙겨왔었다.

무엇보다 3년동안 내 책상 위에서

마리모로 키워지고 있었다. (이게 중요함.)

그런데 어느날,

막시무스의 어항에 물을 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진짜 자라고 있는거니?”

마리모는 원래 1년에 5mm는 자란다던데

막시무스는 작아도 한참 작았다.

마치 시간이 3년 전에 멈추어버린 것처럼.

“왜 그래 막시무스..?”

처음에는 막시무스의 성장부진을 걱정해서

마리모 먹이를 사려고 했었다.

마리모가 안 자라는 이유도 검색했다.

그러다..

가짜 마리모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짜 마리모라니..

100년동안 키우는 인생의 반려이끼, 마리모를

플라스틱 수세미 재질로 따라 만들어서

살아 있는 척, 광합성 하는 척 속이다니..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걸 위해 몇 년간 물을 갈아주게 하다니..

그 가짜 마리모를 애지중지 키우다가

몇 십년의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되어서

어항에 물을 갈아주고

몇 년간 꼬박꼬박 마리모 밥도 넣어주다가

죽을 때쯤 손녀에게

“이건 내 유품이니 잘 간직하거라..”

하고 플라스틱 덩어리를 대대손손 넘겨주게 만들다니.

세상에 이런 악덕 시장이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런 가짜 마리모가 아주 많다고 한다.

마리모는 원래 물이 차가운 유럽이나

일본에서 수입되어 오는 것인데

날씨가 더운 동남아시아에서 수입되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것들은 전부 가짜 마리모라고 한다.

느낌이 쎄했다.

가짜가 있다니..

게다가 많이 있다니..

그때부터였다.

내 책상 위의 막시무스가 생경하게 보였던 것이.

인터넷에 가짜 마리모 구별 후기들을 다 뒤져봤다.

여기저기 카더라가 속출했다.

가짜 마리모를 태우면 플라스틱 타는 냄새가 난다,

가짜 마리모를 뜨거운 물에 끓이면

갈색으로 갈변하지 않고 푸르딩딩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진짜 마리모로

그런 실험을 한 예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카더라가 사실이 되려면

가짜와는 달리 진짜 마리모를 태우거나

뜨거운 물에 끓였을 때 어떤 식으로 되더라

하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증거가 아무데도 없었다.

하긴 진짜 마리모를 그런 식으로 처형하는 것은

비인도적인 일이었다.

당장 가짜 마리모를 물에 끓여서

풀어놓은 사진만 봐도 좀 마음이 싱숭생숭 했다.

하지만 카더라가 입증된 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게다가 사람마다 말도 다 달랐다.

어떤 사람은 마리모를 끓는 물에 넣는다고 해서

갈색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마치 시금치를 데쳐도 파란 것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막시무스를

그런식으로 뜨거운 물에 넣을 수는 없었다.

3년간의 세월이면

아무리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사이보그 막시무스라 할지라도

진짜 마음을 지닐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한 번 나 혼자

막시무스의 정체를 간파해보기로 했다.

1.막시무스의 질감?

말랑말랑하다.

굉장히 말랑말랑하다.

맘만 먹으면 호떡처럼 납작하게 누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뭔가 솜뭉치 같다.

속이 빈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어떤 사람에 의하면

말랑말랑하다고 다 가짜는 아니라고 한다.

질감으로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2.막시무스의 냄새?

쾌쾌하다.

플라스틱 냄새인지는..잘 모르겠다.

사실 살면서 한번도

제대로 된 플라스틱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다.

게다가 내 어항 속 조개껍데기에

시퍼렇게 끼어 있는 녹조류?를 감안했을 때

3년 동안 몇 주간격으로

환수되는 물 속에 있다보면

아무리 무생물 플라스틱이라 할지라도

물에 젖은 퀴퀴한 생명의 냄새가 날만 했다.

3.막시무스를 조금 뜯어봤다.

결국 막시무스를 아주 살짝 뜯어봤다.

솜뭉치를 떼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솜 같다.

납장하고 얼기설기 뭉쳐져 있는 것이

꼭 천 조각을 조금 뜯어낸 것 같았다.

나는 막시무스의 조각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마리모는 직사광선을 받으면

누리끼끼해지면서 죽는다고 하니까

햇빛이 잘 비치는 곳에 놓아두고

가만히 지켜볼 예정이었다.

진짜라면 바싹 마를테고

가짜라면 푸르딩딩하겠지.

근데 너.. 너무 신난거 아니니?

생각해보니 막시무스는 꽤 자주 떴다.

원래 마리모는 끽해봐야

일년에 한 두번 정도 뜬다던데

우리 막시무스는 물 갈아줄 때

조금만 만져줘도 저렇게 두둥실 떠오르곤 했다.

그때도 그걸 보고

아, 저거 속에 공기가 차서 뜨는 거구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광합성해서 떠올라야 정상인데

속에 공기찼다고 떠오르는 너.

제발 아니라고 해줘..

그렇게 다음날 아침

막시무스를 확인해봤다.

-푸르딩딩-

막시무스..이녀석..

Suseme..였구나?

배신감이 들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막시무스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사실 막시무스는 아무 잘못이 없다.

막시무스를 애완 수세미로 안 팔고

애완 마리모로 판 그 사람들 잘못이다.

괜찮아, 미리 심리적 안정망을 설치해뒀으니까..

사실 막시무스를 조금 떼어서

휴지조각에 올려놓은 그날 밤,

인터넷에서 1년생 마리모를 구매해 두었다.

막시무스가 가짜일 것이 판명나더라도

어항 속에 진짜를 넣어두어서

공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함이었다.

가짜 마리모 영상을 찾아보다가

찾은 업체이기도 했고

그래도 사장님이 미디어에

얼굴도 비춘 적이 있는 사람이니까

적어도 사기는 안 치겠지 싶어서 구매했다.

1년생 마리모는 이틀 뒤에 왔다.

물론 그때까지도 막시무스 조각은

갓 자란 잔디처럼 파릇파릇했다.

1년생 마리모.

“마리모의 원산지를 속이지 않습니다.

훗카이도, 유럽 등지에서 양식되어

정식 수입된 마리모만 판매합니다.”

저렇게 문구로 딱 쓰여있으니까

그래도 한 시름 놓였다.

새로 주문한 1년생 마리모(왼)와

3년동안 키운 막시무스(오)

이렇게 비교하니 확실히 막시무스가

왜소하다는 게 한 눈에 보인다.

절대 3년생 마리모라고 볼 수가 없다.

이쯤 되면 확인사살 수준..

나는 막시무스와 새 마리모를 함께 키우기로 했다.

새 마리모에 수세미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이젠 1년 뒤에 수세미가

혹시라도 또 수세미로 판명될지라도

수세미는 계속 수세미일 수가 있다.

그렇게 막시무스와 새 마리모,

수세미의 행복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둘도 서로가 좋은지 꼭 붙어다닌다.

앞으로 막시무스와 수세미가 함께

이 어항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가식과 거짓이 난무하지 않는

진실된 세상 속에서 살 수 있기를..

처음 막시무스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

이 사건이 어떻게 끝나게 될까 걱정했었는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어 다행이다.

세미도 조금 뜯어서 실험을 해 봐야 하나 했는데

그런 머릿속 마구니는 떨쳐버리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저 두 아이들이다.

나는 앞으로 이 마리모들을 적절히 방치해두면서

생각날 때마다 물을 갈아줄 것이다.

1년 후, 5mm자란 세미와

여전히 4년 전 모습을 간직한

막시무스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