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따였다.
대학생이 된 지금이야
‘난 그냥 혼자가 편해’ 라며 웃을 수 있지만
학창시절의 왕따는 단지 혼자라서 힘든 것이 아님을
당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이유는 없었다.
‘치과에 간다고 체육대회 연습을 빠져서?’
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연습일정을 잡기 시작한 순간부터
미리 말해두었던 것이니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몇 주 동안을 방안에서 밤새 울며
동이 트는 것을 두려워하다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엄마, 나 급식 취소해줘. 도시락 먹을래요.”
“왜? 밥이 별로야?”
“아니, 우리 학교 급식 먹으려면 지문인식 해야하잖아요.”
“응.”
“내 손에 땀이 많아서 그런지 인식이 잘 안돼서..
그래서.. 친구들이 쟨 사람 새X도 아니라서
그런가보다고.. 비웃어 나를..”
얼마나 정적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겨우 꺼낸 말에,
아빠는 선생님께 전화를 해야겠다며 화를 내셨고
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학교에 말하지 말아달라고
나 그냥 조용히 전학 보내주면 안되겠느냐며 울었고
다음 날 엄마는 오늘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며
늦은 점심까지 나를 깨우지 않으셨다.
이튿날 학교에 갔을 때 나는 여전히 왕따였고
다만 아빠가 참지 못하고 학교에 전화를 했는지
담임 선생님께서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로 부르셨다.
정년을 앞둔 할아버지 뻘의 수학선생님이셨는데
첫 쉬는 시간엔 내 손을 꼭 잡으시고는
내가 나이가 많다는 핑계로
너희를 너무 방치한 거 같다며 미안해 하셨다.
두번째 쉬는 시간엔,
내게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물으셨고
난 이 학교를 떠나고 싶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그랬다.
선생님께선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 지옥 같던 쉬는 시간에
나를 가만히 두지 않으셨다.
일부러 교무실 청소를 시키시고,
일부러 화분에 물을 주러 오라하시고,
수학성적이 이래서야 되겠냐며
옆에 앉아 수능 4점짜리 주관식 문제를 풀게 하셨다.
등교 후 내 자리엔 우유가 터져있거나,
걸레가 올라가 있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아침일찍 와 치우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턴 항상 깨끗했다.
친구들의 장난이 끝난 줄로만 알았는데
평소보다 10분 정도 일찍 등교를 한 날
교실 창문으로 비춰진 선생님께서
내 책상 낙서를 지우시고 물티슈로 닦고 계셨다.
그 모습에 나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첫교시도 들어가지 않고 펑펑 울었다.
이후로 나는 전학을 포기하고 학교에 남았고,
졸업식은 가지 않았다.
단지 선생님 사진 한 장 없는 것이 후회가 되어,
시간이 많이 흐르고 성인이 됐을 때
친구에게 졸업앨범 속
선생님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얼마 전 선생님의 장례식이 있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쉴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선생님께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너무 잘 안다고,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그 한마디를 못 한게 가슴에 메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선생님의 방식이, 대놓고 나를 위해
왕따 주동자들과 싸워주지 않은 것이
나 아닌 모든 사람들의 기준에도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도 눈만 감으면 물티슈를 쥐고 있는
그 주름진 손등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