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나가라고 하지 않는 ‘자신의 집’을 얻은 고아원 출신 남자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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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혼모의 아이로 19년의 세월을 고아원에서 보냈다.

그말인즉슨 나는 19년동안은 돈 한푼 내지 않고

내 한몸 뉘일 수 있는 곳을 제공받았다는 것이다.

그안의 삶이 어떠하든, 내게는 집이 있었다.

여름에는 햇빛을 피해

미지근한 보리찻물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고,

겨울에는 텅텅 소리를 내는 라디에이터 옆에서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건

매우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하지 않은 축복이었다.

그걸 그땐 당연하게 여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배가 불렀던 고아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유예받았던 퇴소를 목전에 두었다.

퇴소.

그 느낌을 일반인들은 잘 모를 것이다.

남들은 허름하다 말하는 거적떼기일지라도

몸을 가려주는 천옷을 벗어야하는 느낌이었다.

외면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느닷없이 다가왔다.

내가 홀로 서야하는 시간이.

다행히 나는 졸업 전에

지금까지 다니는 회사의 입사가 확정되었지만,

그 회사는 기숙사를 제공해 주지는 않았다.

고아원 출신 고아들은

숙식이 제공되는 공장에 취직하는게 일반적이라

나는 좀 특이한 경우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수녀님께 첫월급이 나오기 전까지

지금 지내는 곳에서 계속 지낼 수 있는지 여쭤보았는데,

수녀님은 퇴소를 하면 일단 나가야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뒤에 힘들면 연락을 하라고 하셨다.

퇴소 후 첫 월급이 나오기 전.

그 기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기간이었다.

자립지원금 500만원이 계좌로 들어왔지만

나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어찌해야 할까? 나는 내일 출근해야하고

집은 없고 수중의 돈은 500만원이 전부였다.

나는 사회를 잘 몰랐고

그래서 그저 어쩔 줄 몰라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 때 내게 조언해준 선배가 있었는데,

PreSTC에서 만난 선배였다.

SDS에서는 입사 전 트레이닝 코스를 제공해주는데

그것이 PreSTC였다.

그 선배의 조언에 따라 나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낙성대에 위치한 저렴한 원룸을 계약할 수 있었다.

그 원룸은 노부부가 가진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작은 원룸이었다.

보증금 500만원, 월세 30만원.

할머니가 계약금으로 50만원을 받아야한다고 했고

나는 그러마하고 눈을 멀뚱히 뜨고 있다가

가벼운 타박을 들었다.

계약금은 계약 당일 현금으로 드려야한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급하게 근처 ATM에서 뽑아온 50만원을 드리고,

두 장의 종이를 겹쳐 도장을 찍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 한 최초의 계약이었다.

그리고 내 삶에서 내가 최초로 마련한 집이었다.

비록 창문이 똑바로 닫히지 않아 우풍이 들고

형광등이 자주 나가는 원룸이었지만

나는 그 곳에서 5년을 살았다.

그 5년동안 집주인인 노부부께서 나를 참 잘 챙겨주셨다.

늦게 퇴근했을 때

현관문 문고리에 걸어둔 비닐 봉투를 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된장찌개와

오이지 무침이 있었다.

집주인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결국은 내가 고아인걸 아셨을 것 같다.

내가 방을 뺀다고 이야기했을 때,

어디 갈 곳이 정해졌는지를 물어보셨을 때 확신했다.

그런 분들을 내 첫 집주인으로 만난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나는 오래된 아파트지만

온전히 내 것인 집에서 살고있다.

집이 있다는 건 너무나도 큰 행복이다.

때때로 고아원 시절의 악몽을 꾸다가 깨어났을 때,

나는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

내 집인 것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내 집이다.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이다.

집이 있다는건 눈물나게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