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때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 안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있긴 하지만
이 기억이 꿈인지 진짜 기억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
아버지의 빈자리로 인해
엄마와 나만 차가운 이 세상에 남겨졌다
모텔과 찜질방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다
고모 집에서 살게 되었다.
흐릿한 기억속에 정확한 나이도 기억이 안나지 않는다.
아마 7,8살 이었던 것 같다.
고모랑 고모부는 정말 좋은 분이었다.
사촌형 두명이랑 지내는 것도 어린마음에 너무 좋았다.
엄마,고모부가 일하러 가면
온전히 고모가 우리를 보살펴야했다.
고모는 자식교육에 있어 엄격한 사람이었다.
나에게도 사촌형들과 똑같이 대했다.
나는 이런점에 대해 고모에게
지금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점이 엄마가 떠나게 된 이유가 될지는 몰랐다.
그날의 기억은 너무 깊게 남아있다.
고모는 밥먹는 시간외에
인스턴트 같은걸 못먹게 하는 분 이셨다.
어느날 내가 라면이 너무 먹고싶었다.
엄마가 일을 다녀와서 라면을 먹고싶다고 졸랐다.
하지만 고모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해 할 수 있었다.
나에게 라면을 해주면 사촌형들에게도 라면을 줘야하고,
그러면 고모의 교육틀이 깨지는 일이었다.
어린 나는 뜻대로 되지 않자 엄마에게
라면도 못해주는 엄마가
해줄 수 있는게 뭐냐며 울며 떼를 썼다.
엄마는 나를 꼭잡고 라면 먹으러 가자며
나가서 컵라면을 사줬다.
그게 어릴적 엄마와의 마지막 식사였다.
그날 저녁, 내가 자고있을때
엄마가 살며시 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결에 느꼈다.
그렇게 엄마는 떠났다.
그리고 몇날 며칠을 울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된 후 고모에게 들은 얘긴데
엄마가 그날 100만원을 두고 갔다고 했다.
당분간만 잘 봐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그리고 고모는 날 정말 잘 키워줬다.
크면서 내가 사촌형들 보다
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형들과 똑같은 사랑을 받고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렇기에 날 버리고 자기 인생 위해 떠난 엄마가 더욱 싫었다.
머리가 커가면서 이해는 됐지만
이해가 될 수록 증오심은 더 커져만 갔다.
그렇게 20살이 되고 군대도 다녀왔다.
그동안은 아직 철이 없는 미성년자라
얼굴에 철판 깔고 얹혀살 수 있었지만
군대에 다녀온 뒤로는 철이 없는 척 할 수 없었다.
고모에게 더이상 신세 질 수 없었다.
그동안 조금씩 모은 돈으로 독립하여
열심히 알바도 하면서 학교를 졸업했다.
그렇게 우연한 기회에 들어간 회사에서 만난
직장 동료랑 의기투합해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이 순조롭게 풀려갔다.
사업이 커지고 직원도 조금 생기고 하니
금전적인 여유가 생겼다.
엄마 생각이 났다.
생각 안 하려고 해도 계속 났다.
이제는 내가 엄마를 먹여살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처음엔 이해했다.
근데 계속 생각해보니 이해 할 수 가 없었다.
그래, 자기 자식하나 라면 못끓여주는 처지에
엄마 입까지 고모집에 맡길 수 없었겠지
라고 이해하려했다.
그래도 자기 자식인데 눈 감고 조금만 참으면
아들보며 살 수 있었을텐데
왜 꼭 그런 선택을 해야했을까.
궁금해졌다.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엄마를 보고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엄마한테
나를 버려야만 했던 이유를 꼭 들어야만 했다.
고모에게 엄마를 찾고 싶다고 얘기했다.
고모는 잠시 머뭇하더니
나를 두고간지 3년동안만 연락이 되었고
이후론 연락이 안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통장으로 아직까지도
매달 20만원가량 들어오고 있고
내가 독립한 이후엔 통장에 따로 모아두고 계신다고 했다.
그럼 연락이 됐던 3년간은 왜 날 보러 안올걸까요?
라고 물으니
고모가 오지말라고 말린거라고 했다.
연락이 두절 되기 전
엄마가 계속 날 만나고 싶어해서
고모가 단호하게 얘기했다고 한다.
날 만나면 어린 나이에 혼란스러워 할 것이고
만나면 책임 질 수 있겠느냐?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하는게 낫지 않겠느냐
라고 했다고 한다.
고모도 그렇게 연락이 두절 될지는 몰랐다고 하면서
엄마가 마음을 강하게 먹으려고
연락을 끊은게 아니겠냐 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텐데 하며
고모는 나에게 크게 미안해하셨다.
고모에게 애써 나는 잘하셨다고 했다.
그날 엄마에 대한 오해가 전부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나 뿐인 엄마가 날 버린게 아니구나,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내 엄마구나.
다음날부터 미친듯이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엄마를 찾으며 많은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긴
꽤나 큰 금액의 빚이 있었고,
그 빚을 엄마 혼자 감당해야 했기에
식모살이, 식당일, 잡부 등 가리지 않고 일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빚을 아직도 변제하고 계신다고 했다.
필사적으로 자리를 잡으시려다
내가 성인이 되었고, 성인이 된 내게
빚이 짐이 될까 안 찾은게 아니실까 지레 짐작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를 찾았다.
어이없게도 나랑 그리 먼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20분 거리에 있는 노점 시장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찬거리를 팔고 계셨다.
처음엔 너무 허망하고 눈물이 너무 나서
아는척도 못했다.
멀리서 지켜만 보고 돌아왔다.
다음에 갔을땐 매우 큰 용기를 내서
찬거리를 사러온 손님인척 찾아갔다.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한쪽눈이 하얬다.
그 남은 한쪽눈 으로 쳐다보며 엄마는 웃었다.
아들이어서 웃은게 아니라,
손님이라고 생각 하고 짓는 웃음 이었다.
날 못 알아보셨다.
울컥 눈물이 나와 그냥 자리를 피했다.
세번째로 엄마를 찾았다.
최대한 담담하게 엄마를 마주했다.
엄마는 지난번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찬거리를 건내주는 엄마 손을 꼭 잡았더니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눈물을 쏟으니 엄마는 그제서야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는 미소를 지으셨다
훌륭하게 컸다 우리 아들.
머뭇거리던 엄마의 첫마디 였다.
철부지 마냥 끅끅 대며
왜 날 두고 갔냐, 왜 찾아오지 않았냐 라고 묻지도 못하고
미안해. 엄마 라면 먹고 싶다고 안할게, 미안해
만 계속 반복했다.
엄마는 나를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끌어안으며
엄마가 미안하다 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엄마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