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30살이 되면
엄청 어른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냥 애였다.
40살이 되면 세상을 다 아는 줄 알았는데
아직 그냥 애어른이더라.
요즘 사람들은
“아줌마”라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나는 그게 좀 슬프다.
나에게는 “아줌마”라는 말은
따뜻하고 포근하고 그립고 미안한 이미지라서.
당연히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이 있다.
아줌마가 있었다.
우리 가족이 빌라로 이사를 왔을때,
아랫집에 살던 아줌마는
이삿날부터 올라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줌마는 채 마흔도 안됐었다.
아니 서른 다섯은 됐으려나.
나는 8살이었고 아줌마는 내 또래 아들이 있었다.
아줌마는 엄마의 절친이 되었고
나에겐.. 그냥 아줌마였다.
너무 숨쉬듯이 그냥
또 다른 가족의 호칭이 아줌마였다.
그러다 엄마가 일을 다니기 시작했고
우리를 돌봐줄 수 없게 되자
아줌마는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 동생을 돌봐주었다.
나와 동생은 내 집처럼 아줌마네 집을 드나들었고
내 동생은 아줌마네 형들과
형제처럼 어울려 지냈다.
난 어릴땐 제법 같이 뛰놀았지만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아줌마네 아들들과 새침하게 내외를 했다.
부모님이 늦어 나와 동생만 남게 되는 밤이면
그냥 너무 자연스럽게 아줌마네 집으로 갔다.
아줌마는 아들방을 나에게 내어주고
혼자 편히 있게 냅두라며
본인 아들들은 거실로 쫓아내곤 했다.
그땐 그게 당연한 건줄 알았다.
아줌마가 나와 내 동생에게 잘해주는 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냥 윗집 사는 애들이라는 이유 만으로
아줌마는 본인 아들들보다
나와 내 동생에게 더 잘해줬다.
“엄마”라는 말보다
“아줌마”라는 말을 더 많이 했던 거 같다.
방과후엔 늘 엄마 대신 아줌마가 있었으니까.
어느날은 6시인가 6시 반에
티비에서 하던 세일러문이 보고 싶어서
아줌마집에 동생만 보내고
혼자서 만화를 보고 있었다.
혼자 있는 내가 걱정됐는지
아줌마는 혼자 우리집에 올라왔다.
“머 이런걸 보노?” 하면서
세일러문 한편을 끝까지 같이 봐줬다.
나는 초등고학년이나 되어
아직도 세일러문을 좋아하는게 부끄러워서
아줌마한테 괜히 틱틱대며 집에 가라고 했다.
한번은 옆집 살던 약간 불량한 친구네 놀러갔더니
그 애가 아빠 담배를 훔쳐피우며
너네도 피워보라 했다.
호기심에 슬쩍 입을 대보고는
바로 아줌마네 집으로 뛰어가
쟤네 담배 피운다고 일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줌마는 디게 한심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그래 “니는 안폈나?” 물었고
나는 어쩐지 민망해져
“아니 나도 펴봤는데..”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는 밥달래서 밥이나 먹었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채집통에 넣고 키우던 사마귀가 죽어있고
온방에 개미가 들끓고 있었다.
나는 꽥꽥대며 뛰쳐내려가 아줌마를 데려왔고
아줌마는 뭐라뭐라 잔소리를 하시며
개미떼를 휴지로 꾹꾹 눌러 버리고
죽은 사마귀도 치웠줬다.
한번씩 아줌마는 밀가루 반죽을 해서
도너츠를 왕창 만들고
커다란 냄비에 기름을 끓여 튀겨주곤 했는데
옆에 앉아 있다가 받아먹는 갓튀긴 도너츠가
그렇게 포슬하고 맛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도너츠를 좋아한다.
그런데 어떤 도너츠를 먹어도
아줌마가 해주던 그맛은 안난다.
우리 가족이 그 빌라에서 이사를 나온 후에도
아줌마네는 계속 그 빌라에 살았고
엄마와 아줌마는 계속 친하게 지냈다.
아빠와 아저씨도 한직장에 다니는 등
계속 교류를 했고
나는 엄마랑 자주 아줌마네 놀러갔고
혼자서도 가끔 놀러갔다.
기억이 희미하다.
언제부턴가 아줌마네 집에 가는 횟수가 뜸해졌다.
성인이 되고, 대학생활이다 뭐다
재밌고 바쁜 이십대 초반을 보내다가
어느날 아줌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암이라고 했다.
병문안을 갔다.
그때의 아줌마의 얼굴과 표정은 기억이 안난다.
그렇게 몇년이 더 지나고,
어느날 아줌마 아들한테서 문자가 왔다.
“우리 엄마 한번 보러와”
그때 내가 어떤 감정과 기분이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다만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서 병원에 갔다.
아줌마는 훨씬 말랐었고,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고,
나는 휴게실에서 아줌마 아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고,
그리고 아줌마의 마른 종아리와
발바닥을 오래오래 주물러 드렸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나
아줌마의 소식은 간간히 엄마에게서만 듣던 중
아줌마 아들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우리 엄마 보러와라, 엄마가 너 보고 싶어해.”
그때는 안갔다.
왜 안 갔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나는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이십대 중반의 인간관계들 속에서
세상 폭풍 혼자 다맞는 양
혼자 드라마 찍어대던 시기였을 거다.
그리고 어느날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줌마 돌아가셨대.”
그땐 이미 아줌마를 마지막으로 만난지 몇년이 됐었고
통 연락을 하지 않았기에, 어쩐지 덤덤했다.
엄마차 조수석에 앉아 장례식장에 가는 길에도
나는 뭐라뭐라 조잘조잘
재미나게 떠들었던 것 같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엄마가 주차를 하는 순간 나는 무너졌다.
내방에서 죽은 사마귀와 개미떼를 치워주던
아줌마의 표정, 말투, 목소리.
그런걸 되새기며 오열했다.
그런게 계속 기억이 났다.
왜 한번도 말하지 않았을까?
그때 감사했어요.
당연히 나 혼자 치울 수 있었는데.
온갖 호들갑을 떨며 오바하는
생판 남인 윗집 여자애의 뒤치닥거리를
군말없이 해주던 착한 아줌마.
나는 주체못할 정도로 비명처럼 흐느끼며
엄마의 부축을 받아 장례식장 계단을 내려갔고
절도 제대로 못했다.
아줌마 아들은 묵묵히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러고 끝이었다.
나는 아줌마를 금방 잊었고 다시 바쁘게 지냈다.
세월이 지났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았다.
아줌마 아들들도 잘자라서
각자 결혼하고 아기낳고 잘산다.
우습게도 내 아기가 자라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아줌마가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다.
염치도 없이.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아줌마의
파리한 얼굴은 희미하게 잘 생각이 안나고
어린시절,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내 이름을 불러주던
씩씩했던 내 어린날의 아줌마가 자꾸만 떠오른다.
어떻게 그렇게 남의 자식들을 사랑해줄 수 있었지?
왜 그렇게 아껴줬지?
머리검은 짐승은 거두는게 아니란 말,
딱 나인데.
지 살기 바쁘다고 키워준거나 다름없는 아줌마가
암투병 중일 때도
제대로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나쁜년.
엄마는 아주 가끔 아줌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단 한문장으로 아줌마를 정의한다.
“아줌마 같은 사람 없다” 라고.
요새 애들은 친구엄마를 절대 아줌마라고 안 부른다.
ㅇㅇ엄마, 아니면 이모.
대세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는거지만,
그리고 이건 너무 개인적으로 나한테만 해당되는 거지만,
나는 일부러 딸래미 친구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본다.
“이건 아줌마가 해줄게.”
“아줌마가 도와줄게.”
“두개씩 골라봐, 아줌마가 사줄게.”
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라
절대 아줌마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시절의 아줌마와 비슷한 나이가 되고,
아이를 키우며 문득
내가 나 스스로를 아줌마라고 칭하며
아주 조금 혼자 포근해지기도,
서글퍼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