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 때 빚 있던 거 와이프가 전부 갚아주고 애도 5명이나 낳은 애국자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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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난 올해 38살인 애아빠임

애가 다섯..

뭐 신세한탄하는 사람들 특징대로

태어날 때부터 집에 돈이 없었음.

우리집도 없고 이모댁에 얹혀살았고,

이모댁도 허덕이면서 살았는데

거기다 딸까지 셋 있었음ㅋㅋ (죄다 누나들)

어무이가 나 낳기 전부터 암투병 해오셨고

나 낳고난 뒤에도

6년을 더 투병하시고 완치 판정 받으심.

당시 빚이 억대였으니까

지금 시세로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98년에 imf때 아버지 고등학교 중퇴하고 나서부터

다니시던 회사 짤리시고 술만 드시다가

알콜중독와서 가뜩이나 허약해지고

힘든 우리 엄마. 더 괴롭게 함..

내 인생에 내 와이프보다 우리엄마를 더 사랑했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다섯 아이들보다도

우리 엄마를 더 사랑했음.

세상에 엄마도 나만이 전부였고,

나도 엄마만이 전부였고.

이제 막 말하기 시작한 애기가 생전

떼써본 적도 없고 옷도 누나들 입던 거 물려 입거나

동네 어른들이 자식들 입던거 그런거 입고 다녔음.

그래도 난 불평한번 한적 없다 하셨었고

오히려 그 어린놈이 뭘 안다고

그런거 입는거 좋다고 그러면서

다른 친구들 놀이터나 어디서 놀때

동네 돌아댕기면서 주운 가방에

공병 넣어서 팔고 그 돈으로 엄마 아프니까

뭔지도 모르고 쌍화탕만 사다드린..

항암중에 매일 토하고 설사하고 그러시는데

그 어린애가 죄다 닦아주고 치워주고

토사물 범벅된 엄마 하루종일 안고 있고 그랬다.

어릴적 나 아는 어른분들이 지금도 말씀하심.

지금도 나만 보면 눈물 흘리시고

어린애가 어떻게 저러냐고..

어찌어찌 초등학교 가서도

요즘 말로는 인싸 그 자체였음.

웃기다 귀엽다 애 진짜 착하다~

내 입으로 말하기 죤나 부끄럽지만

실제로 그랬음..

좀 너무 이른 나이에 철 들었다 해야하나?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심리적 방어기제라고

할만한 행동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마저도 우리엄마 먹칠하기 싫어서..

열살쯤 될무렵인가.

그때부터 아버지라는 인간이

매일 술먹고 난리를 치기 시작하더라.

그냥 욕하고 그런 수준이 아니고

칼들고 엄마 쉬고 있는 방문 찍어가면서 욕하고.

그 나이 때에 이미 그런 걸 보다보니

세상 진짜 ㅈ같다 내 인생에 가족은 엄마뿐이다.

딱 그 생각뿐이었음

꼴도 보기 싫을 만큼 싫었고 괴로웠다.

그때부터 불면증이 걸린듯

거의 30년 전인데

지금도 하루 세시간 이상 못자고 있음.

이게 많이 좋아진거임..

다행히 초딩 때 교재나 준비물 같은 것들은

동네 학부모님들이 거의 다 도와주셨다.

참 나이 들고 보니 눈물나네

그런 행동은 계속 됐고, 날이 갈수록 심해졌음.

어머니는 어렵사리 주변도움으로

나 12살 때 동네 작은 호프집 양도 받으시고

치킨 튀기는 법, 오토바이 타는 법 배우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다.

난 그때부터 걸어서 배달까지 다녔다.

아는 집에서 배달시키셔서 가져다드리면

꼭 천원 이천원씩 주시면서

마실거라도 사먹으라 하셨고

고스란히 또 난 쌍화탕 사서 엄마 드리고..

중학교 때부터 내 꿈은 천문학자였다.

사촌누나쪽에 천문연구원분이 있는데

직접 찍은 혜성사진을 본 이후로ㅋㅋ

교복 맞출 돈도 힘들었고,

수학여행 갈 돈도 없었지만,

난 늘 밝았다. 나 혼자 있을 때 말고는..

아버지라는 인간이 또 칼들고 난리치다가

내가 참다참다못해 방문 열고 나가서.

처음으로 부모 앞에서 욕을 했다.

진짜 다 뒤지고 끝내자고.

나부터 죽이라고 했다.

난리도 아니었다. 감당하기 힘든 개같은 감정.

그러면서 고등학생이 되기전,

동네 아주머니가 신문 돌리고 우유배달 하시고.

그러시는거 보고, 나도 좀 하고 싶다했고,

사정 아시는 분인지라 어찌 다리를 놔주셨고,

걍 푼돈이라도 받아가면서 매일매일 새벽마다했다.

그 생활을 4년을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여전히 직장 다시 잡을 노력도 없었고,

완치 되었다곤 하나

이미 만신창이 상태에서 제대로 회복도 못한 채

매일 14시간 이상씩 호프집 하시는 어머니 혼자

감당하긴 너무 힘든 일상이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집에 있던 당시 몇억대 빚은

고스란히 독촉을 불러왔고,

너무 이른 나이에 돈의 소중함을 깨달은 나는

헛돈을 쓴적도, 무언가 어린 나이에 해볼 수 있는

소소한 장난거리에도 돈을 써보질 않았다.

수학여행도 고등학교 때 한번 가본게 끝이고,

고등학교 때부턴 밤에 당구장 알바까지 시작했다.

당시 우리 고등학교. 새벽 6시등교,

야자 끝나면 12시 넘고 집에오면 1시였다.

난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께 사정설명 드리고

매일 10시에 집에와서

당구장 알바 세시간 좀 넘게하고,

새벽엔 신문, 우유알바하고 6시까지 등교했다.

당연히 잠잘 시간은 없었다.

다행히 성적은 이상하게 잘 나와서 대학 진학할 때쯤

내가 원하던 학교 물리학과 합격은 됐더라.

(본인 천체물리 전공임)

등록금도 어찌 모아졌고..

대부분 내가 땀 흘려 번 돈이었고,

부모님껜 지원 받았다 했다.

맘 아파할 엄마 모습이 너무 선했거든..

대학 가서도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더욱 빠듯해졌고,

군대도 가야하는데 집은 힘들고..

다녀오면 더이상 학비마련도 힘들 것 같았던..

그래서 알바를 더 늘렸다.

기본 3잡이었다.

편의점, 당구장,노래방.

주말엔 노가다가 기본이었다.

이미 내 미래는 내던졌고,

더이상 빚에 허덕이는 집이 견디기 힘들어서

한달에 나에게 쓰는 돈 많아야 십만원 외에는

중학교 때부터 죄다 빚 털어내는 곳에 썼다.

그렇게 네살 다섯살 때부터 살아왔다.

엄마랑 둘이.

군대가서 기흉 걸리고

마산통합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부리나케 먼 길 달려온 부모님을 보니

그간 짧지만 힘들었던 모든 감정이 터져나왔다.

이미 많이 야위신 부모님들 보고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엄마 하나 보고 잘 추스렸고,

병원 진료 받으면서 지금의 와이프를 만났다.

옆 병실에 있던 아주 어릴 때부터

발레하면서 치료받던 여자와

인사정도 주고 받으면서 친해졌다.

와이프가 나보다 두살 많다ㅋㅋㅋ

그간 살아온 얘기들이며 이것저것 이야기 하면서

와이프가 날 엄청 챙겨주기 시작했고,

지금의 장인 장모분들도

날 너무 대견스러워하고 이뻐하셨다.

아직 전역 전이었다.

전역 석달 전쯤 외박 때 치료 받으러 갔는데

와이프가 나 갑자기 끌고 자기 병실 가더니

장인 장모 앞에서 뽀뽀를 하더라.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 결혼하자. 내가 많이 웃게 해줄게”

라며 울면서 안아주더라.

둘이 울고 있으니까

장인 장모님도 같이 우리들 안아주시고

참 영화같은 상황이었다

나도 내 아픔 알아주고 사랑한다 해주는

누가봐도 나보다 키도크고 이쁘고

부족할 것 없는 집안에서 자란 아가씨가

너무 좋았다

(와이프 키 178..)

바로 엄마한테 이야기 드리고

우리 엄마 보러 장인 장모도 바로 오셨다.

그리고 내 전역 일주일 후. 결혼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는 안되는거였고

지금도 매번 감사하고 죄송하지만,

나랑 엄마랑 죽어라 살며 갚아오던 빚.

나머지를 우리 엄마와 이야기 하시고

우리 자식들 미래를 응원하는거라며

장인어른이 전부 털어내주셨다..

생각보다 많이 갚았다고 치더라도

남은 금액이 상당했는데..

그렇게 다음해에 사랑스런 첫째가 태어났고,

난 애 돌보면서 일하면서 대학생활을 했다.

욕심이 있었다.

천문학자가 꼭 되려고 죽어라 살았다.

단지 그 힘듦이 즐거워졌다는 변화가 생겼고

첫째가 태어나고 삼년뒤 둘째 탄생!

둘째가 태어나고 이년뒤 셋째 탄생!

그리고 예상치못한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찾아왔다.

말도 안되는.. 참..

어머니가 스스로 삶을 등지셨다.

늘 손주들 보면서 너무 기쁘다고

행복하다고 하시던 엄마는

또 다시 암이 재발하셨고,

당신의 아픔을 또 한번 사랑하는 나와 내 가족들에게

줄 수 없었던 결정이라 하시며.

이제야 행복이라는 거 알게된 나에게

너무 미안하지만 괴로워 하지말고 잘 살아야한다며

그런 유서를 받아들고 정신이 없었다.

괴롭고 아팠다.

가정이 있는 신세가 아니었으면

난 그 당장 삶을 버렸을거다.

그때도 와이프와 장인 장모님이 계속 날 안아주셨다.

우리 엄마는 그 선택이

본인에게 행복한 결과였을 거라고,

다시는 엄마 아프게 하지말고,

말씀대로 잘 살아야 하고 정신 차리고 힘내야한다고.

기절 직전에 우느라 몸도 못가누는 아빠에게 와서

엉엉 울며. “아빠 안돼 울면안돼” 라는 애들보고

정신이 확 들더라.

그게 부모의 마음이었구나. 알게 되더라.

살아가야 할 이유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아버지는

장례식 후로 본인 인생 살러 떠났다. 잘 된거다.

간신히 마음 다 잡고, 살았다.

곧 넷째도 탄생했고, 운좋게 대학원도 가게 됐고.

그때 돌아가신 울 엄마가 준 선물이라 하시더라.

묘하게 그 후로 소소하지만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그리고 작년에 막내도 태어났다.

딸 넷이었는데

처음으로 아들이 태어난거다.

지금도 와이프랑 둘이 나가면 평균나이 39살인데

사람들이 이제 막 대학 졸업하고 연애하는 줄 안다

내 마누라지만 너무..너무 이쁘다..

키가 나보다 훨 큰게 좀 아프긴 하지만

참 분에 맞지 않게 너무 이쁘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가진건

빚밖에 없는 놈을 뭐가 좋다고 자빠뜨렸는지..

살면서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었을 것이고,

뭘해도 안 풀리는 괴로운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난 늘 내가 들어왔던 말 해준다.

열심히 착하게 살아가면 반드시 그 보답 받는다고.

누군지도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인터넷 친구라해도

힘내라는 말 한마디에도

누군가는 큰 힘을 얻고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다 힘들거고 더 힘들어질거다.

그래도 어쩌겠냐 힘내서 살아야지

힘든 모든 이들에게 마지막 한마디

사랑한다 친구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