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아버지가 결혼 두 번이나 잘못해서 인생이 꼬여버린 아들 썰

우리집은 할아버지가 거의,

아니 평생을 일 한번 안하시고 사셨기 때문에

아버지 대의 학창시절은 언제나 가난하셨다.

할아버지는 일을 시작해도 3개월을 넘긴 적 없다고 하셨다.

당시의 우리집은 할머니의 품팔이와

친가쪽 재산 땅을 팔아서 생활을 했다고 했다.

(당시 친가쪽은 땅부자였다고 한다.)

그 와중에 할아버지는

도박이랑 술, 여자도 좋아하셨다고 한다.

아버지 대에는 할머니께서 형제, 자매도 많아

한명, 한명 케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실업계고(당시 농고)를 나와서

중장비 기술로 취업을 하셨고 자수성가 하신 편이다.

다른 사람들은 IMF가 위기였지만,

우리집은 IMF 시절에 잘나갔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IMF 당시

아버지는 원래 다니던 회사에 구조조정으로 퇴사하셨다.

같이 퇴사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다니시던 회사의 하청업체를 창업하셨고,

회사를 다닐때 보다 오히려 더 버셨다고 하셨다.

언제고 아버지가 내게 자랑했던 내용대로면

당시 월에 800만원 정도를 버셨다고 하셨다.

지방 도시였던 내 고향은 당시

신축 아파트의 매매가가 3,00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하실때 아버지는

당시 아파트를 사두지 않은 것을 후회하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아파트는

이 이야기를 듣고 시세를 확인 했을때

2억 중반대였다.

아무튼 당시에도 학창시절을 보내셨던

오래된 판자촌 자가 주택에 부모님을 모시고 사셨고,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지만)

돈을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아끼는 법만 배우셨 던 아버지는

당시 기준으로 이사를 생각도 안하셨던 거 같다.

800만원 중 중장비 새끼 기사를 두고

월급 200만원여를 주셨고,

200만원으로 당시 할아버지, 할머니 포함해서

우리집 7명의 생활비로 사용하셨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열심히 살아 가셨지만

우리집의 위기는 참 어처구니 없는 곳에서 왔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쯤으로 기억하는데

친어머니는 전업주부 였지만,

그 당시 다단계를 시작하셨다.

(어디까지나 할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 가난한 동네였던 내 고향 마을의 주부들은

계모임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결혼와서 어울리는 계모임 멤버들과

나이 차이가 조금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해당 모임에서 어울리기 위해서

계모임 비용을 조금 더 지불하게 되고

(아버지가 당시 기준으로 잘 번다는 명목으로)

계모임 행사에 나서서 참여해야 했다고 한다.

당시 계모임의 사랑방은 동네 슈퍼 안방이었는데,

그 슈퍼에 출입하는 젊은 음료 납품 사원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어머니는 그 젊은 음료 납품 사원과

불륜관계로 발전하였고,

(할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당 계모임의 멤버들이 그 관계를 도와줬다고 하셨다.

그 납품사원을 나도 어릴 때 본적 있었다.

내가 어릴 적 굉장히 아픈 적이있었는데,

나는 출근한 아버지 대신하여

그 남자의 차에 타고 종합병원에 갔다 온 기억이 있다.

그 남자의 차는 당시 그랜저였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차는 어머니가 사줬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가 몰던 차는 갤로퍼였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그 남자의 집도 친어머니가 얻어줬다고 한다.

아무튼 그 남자는 다단계를 했었고

중간 관리자 정도로 올라갔던 것 같다.

어머니도 그 당시에 다단계를 하셨고,

내가 5학년 쯤에 집에서 난리가 났던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크게 싸웠고,

외할머니도 집에 와 계셨던거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그 길로 도망가셨고,

아버지는 나와 남동생을 불러서 앉혀놓고 말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거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제 같이 못살게 되었으니

어머니를 따라갈 생각이거든 여기서 죽으라고 하셨다.

당시에 아버지가 칼을 들고 계셨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내가 동생을 내 등 뒤로 숨긴 것만 기억 난다.

다만 아버지가 예전 삼촌과 싸울 때 칼을 꺼내신 적 있어서

꺼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고는 있다.

내 기억에는 당시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울면서 말렸던 기억이 있는데,

재작년 쯤 할머니와 이야기 해보니

할머니는 당일은 기억하지만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고 하셨다.

20년 가까이 지난일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는게 당연할 수도 있다.

아무튼 그 이후로 나는 아버지가 불편했고,

우리집은 내가 6학년 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는 다른 동네 친척 집을

당시 기준으로 좀 싸게 사서 이사 가셨고,

1억 중반이라고 들었다.

어머니는 다단계를 하며,

또 다른 사유인지 모르겠지만

이혼 시점에 집에 빚을 남기셨고,

아버지는 그 빚을 갚아주셨다고 들었다.

이혼을 하면 빚을 안갚아도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왜 인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갚아주셨다고 알고 있다.

내가 중학교 1학년때 나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1학년 1학기까지 하는 방법도 전혀 모르고

집중도 되지 않았었다.

당시에 나는 방과 후면 집에 있었고,

집에 원하는 것이나 갚고 싶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못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삶에 목표도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전교 기준으로 130등 정도를 했었고,

아버지에게 주먹으로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2학기부터 아버지는 나를 학원에 보냈고,

다행히도 머리는 나쁘지 않았는지

2학기 기준으로 전교에서 20등 정도를 했다.

그 이후로 고등학교까지

전교 30등 정도에서 왔다 갔다 했었다.

더 노력하거나 하지는 않아서 모르겠다.

내가 중학교때 우리집 집안 살림은 할머니가 하셨고,

할아버지는 이미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당뇨병이 심하여

발가락부터 시작해서, 다리를 절단하셨지만,

그 때도 술을 끊지 못하셨다.

할아버지는 다리가 없어서 일어나시지 못했다.

당시 초등학생인 나에게

찬장 위에 담가둔 석류주를 약이라며 내려달라고 하셨고,

그게 술인걸 아는 나는 내려드리지 않았고,

할아버지에게 맞을 뻔한게 기억 난다.

나는 도망쳤고,

할아버지는 쫓아오지 못하셨다.

다리가 없었으니까.

나중에 들으니

할아버지에게 술을 내 동생이 내려드렸다고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내 동생은

할아버지 말을 그대로 믿었나보다.

아무튼 중학생 때 나는 한달에 용돈을 2만원 정도 받았고,

그 안에서 준비물이며 뭐며 해결했었다.

나는 그때고 지금이고 집에 손 벌릴 줄을 몰랐다.

손 벌린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있었나보다

내가 중학교 3학년때 우리집에 새어머니가 오셨다.

나는 아직도 새어머니와 친하지 않으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새어머니는 노래방 도우미 출신이라고 했다.

그 시점부터 우리 집안 살림은 새어머니가 하셨다.

새어머니에게는 딸이 두명이 있는데

둘다 나보다 누나였다.

그리고 지금이고, 그때고

새어머니는 내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고등학생 때 나는 속옷이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갈 무렵

아버지는 내 인문계고 진학을 강하게 원하셨다.

지금까지 글을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리집에서 강하게 원한다는건 일반적인 기준이 아니다.

아버지는 내게 인문계고에 못 갈거면

그냥 죽어버리라고 했다.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야간 자습을 하고,

주중이고 주말이고 아침 8시에 학교에 가서

밤 10시에 집에 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짧게라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야 했다.

그런 부분에 대해 어린 시절에 난 잘 몰랐고,

주어진 스케줄대로 살기 바빴던 나와 달리

내 동생은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내가 대학생까지 금전적으로 동생이 더 풍족했다.

동생은 알바비로 옷을 사는걸 좋아했고,

고등학생 때는 옷장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음식 장사를 한다.)

아무튼 고등학교 때 나는 속옷은 동생걸 입었고,

옷은 친척형이 물려준 티셔츠 3개?

여름, 겨울바지 각각1개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학교는 교복을 입고 다녔다는 거다.

점퍼는 교복을 입고 다녔으니 있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패딩 점퍼는 대학생때 알바해서 산

싸구려 인터넷 패딩이있었는데

그 전까지는 뭐 입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때 쯤

내가 옷쪼가리가 저게 다라는걸 아버지는 물론이고

새어머니도 그때 아셨다고 했다.

집안을 왔다갔다 하다보면

안방 안에 옷 쇼핑백이 가득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쯤 이명박 대통령 때였는데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났다.

IMF로 흥했던 우리집은 그때 가세가 기울었는데,

아버지는 중장비 사업을 정리하면서

중장비를 전부 처분하셨다.

그 돈으로 직원들 퇴직금을 줬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이후 먹는 장사를 하시다가 적자로 정리하시고,

현재는 중장비 경력으로 회사에 속해서 일하고 계신다.

아는 지인 통해서 들어가셨는데 바로 취업하려고 하니,

당뇨 병력이 있어서 취업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대학교에 진학할때,

그러니까 2010년 즘 성적은 서울 쪽으로 쓸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생활적인 부분이 걱정이 되더라.

그래서 지방 국립대,

그리고 취업이 잘되는 쪽으로 대학교를 진학했다.

학비, 생활비, 기타 잡비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어찌저찌 충당 되는 정도였다.

대학때가 내 인생에 제일 힘든 시기였던거 같다.

필요한 비용은 많았는데 충당하기는 힘들었다.

다른 친구들이 하는 학원이며, 교환학생이며,

다른 스펙은 생각도 못했다.

집안에서 너무 답답한 나머지 빨리 졸업해서

이 집을 나오는게 나의 첫번째 목표였다.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가

2년제 대학교에 진학했고,

삼성 1차 하청 반도체 업체로 취업했다.

그때 나도 차라리 실업계 쪽으로 진학했어야 하나

크게 후회했었다.

그나마 대학생때 다행인건 고등학생 때는

월 2만원으로 집 밖에 돌아다닐 수가 없었지만

(월 2만원으로 준비물, 참고서 준비하면서

친구들이랑 어울리려면, 어둠의 길로 들어서야 하더라)

대학생때는 알바라도 하니 그 부분은 조금 풀리더라

대학교 2학년때부터 나는 그래도 운동을 시작했다.

투기 종목이었는데 의외로 적성에 맞더라,

학교에 8시에 셔틀버스로 통학하고, 수업듣고

공강시간에는 도서관에서 시험이랑 공부를 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7시부터 체육관에 틀어박혀서 운동을 했다.

11시에 체육관 문 닫을 때 나와서

집에서는 잠만 잔거 같다.

평일에는 특별한 일 없으면 이런 스케줄로 지냈고,

주말에는 하루종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렇게 대학교 3학년때가 되어서

나는 아버지에게 처음 손을 벌렸다.

내가 졸업요건이랑 취업 스펙이나 이런걸 준비하려면,

공부시간이라도 늘려야겠더라,

그래서 졸업때까지 월 20만원을 요청했고,

나머지는 내 최소한의 아르바이트로 충당하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에게 주라고 하셨고,

새어머니는 결국 안 주셨다.

특별한 말은 없었다.

얼마전에 안 사실인데 아버지는 줬다고 알더라.

내가 대학교 4학년때 학교에서

내 앞으로 장학금이 나왔었다.

그 동안에는 부모님 수입 기준이랑

다른 기준으로 다 짤려 왔었는데

준다고 하길래 기쁘더라

통장으로 등록금 기준으로 180만원 가량 입금되었고

이걸로 이제 뭘 준비하고 뭘 준비하고 해야지

기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였다.

학과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더라, 받아보니까

이미 다른 곳에서 장학금이 입금된 내역이 있으니

장학금을 반납해야 한다고 하더라.

무슨 소린가 했더니

새어머니가 매 학기 초마다

등록금 남입 명세서를 달라고 했었던 일이 있었는데

나는 지금까지 그걸로 세금 공제를 받았는지 알았다.

알고보니 동사무소에서 나오는 부녀회 장학금이 있었고

그걸 따로 신청해서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난 거의 10년 가까이만에 처음 분노해서

새어머니에게 따졌었다.

새어머니는 조용히 듣더니 할 이야기 끝났냐며,

더 할 이야기 없으면 끊겠다고 했다.

난 그날 초등학생 이후로 처음 울었다.

창피하게도

학교 복지회권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었었다.

25~6살 먹은 시커먼 놈이 말이다.

아무튼 나는 27살에 취업을 했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지역에서는 기반이 단단한 기업이었고,

일도 할만해서 지금은 5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취업과 동시에 회사 기숙사로 나왔다.

아마 회사 기숙사가 없었으면 나오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도 알바를 하고 있었지만

월급전까지 한달에서 두달 정도 텀에

생활비도 빠듯했으니까

물론 아버지와 새어머니도 알고 있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지원은 없었다.

그 때 친할머니가 동생에게 부탁해서

다만 얼마라도 줘어주셨다.

생각해보니 면접볼때 정장도 할머니가 해주셨다.

할머니도 새어머니가 살림을 맞은 후

10년 가까이 노령연금으로면 생활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할머니 용돈도 줬다고 알고 있더라.

내가 취업하고 3개월 만에 할머니는 집을 나오셨다.

할머니는 새어머니에게 10년 가까이 구박을 받았지만,

자기라도 없으면 우리 처지가 어떨까 해서

끝까지 버티셨다고 하셨다.

이제 나도 일을 시작했으니

이 집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나가시기 전에 또 사건이 있었던거 같지만 알지 못한다.

객관적인 부분은 따져봐야겠지만

나는 무조건 할머니의 편이다.

아버지는 이제 친척들과도 왕래가 없는 상태다.

새어머니 문제로 친척들과 몇번 싸웠다고 들었다.

사실 나도 명절이 아니면 집에 안가고 있다.

명절에 가는 것도

할머니가 그래도 가보라고 하셔서 가는 편이다.

이제 걱정은 없는 편이지만,

사실 연애도 취업 후에는 여러번 해봤지만,

사실 나는 이제와서는 여자를 잘 못믿겠다.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잘 살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혼자 할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인터넷에 보면 더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많아서

부끄럽지만 이야기를 다른 사람한테 할 수 없는게 많아서

답답해서 글을 한번 써봤고

아무튼 긴글 읽어 주셔서 고맙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