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잘못 만나서 밥 굶고 있던 초등학생이 생존할 수 있었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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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쯤 초등학교 입학 얼마 안 남은 시점에

부모님이 이혼했음

합의도 아니고

걍 아버지가 막무가내로 집에서 엄마 내쫓음

빠른년생이라 학교갈래? 유치원 갈래?

선택하라길래 학교간다 했던게 신의한수

막상 초등학교 등교 시작하니까

새로움 반 설렘반은 개뿔

한두달 다니기 시작하니

이미 예습복습 잘해온 정상가정의 아이와 다르게

나는 이제 맞춤법 맞추기도 힘든 저능아 였음

그무렵 아버지가 어머니랑 이혼 후

출근은 하는데 집에 돈 가져오는건 없었음

수도,가스,전기,집세 전부 미납

그렇게 목 좋은 자리 15평 투룸 아파트가

안산역 앞 6평 원룸으로 거의 수직추락

허구헌날 집주인 집세 내놔라 독촉오고

수도 계량기는 잠금 상태

가스도 잠금상태

(억지로 몇번 풀어서 썼다고 벨브도 뽑아감)

전기도 중단

그렇게 아무것도 안되는 집에서

빨래도 못하고 학교 다니니까

학교가면 거지에 엄마없는 새1끼라며 왕따 당함

왕따가 싫어서 학교를 안갔더니

아빠가 학교는 왜 안가냐며 전화오게 하지말라고 때림

오죽하면 하도 뚜두려 맞아서

담임이 증거 남긴다고 디카로 벗겨놓고 사진찍고

사진 찍다가 질질짬

그리고 아빠한테 전화해서

한번만 더 애 건드리면 신고한다고 싸우더라 ㄹㅇ..

그러다 방학이었나?

내 유일한 식량조달 수단인 급식을 못먹으니..

물은 동사무소 아리수 알음?

옛날에 ‘님들아 수돗물 마실 수 있어요!’ 하고

병에다 담아서 무료로 냉장고에 넣어주면

시민들이 꺼내마셨음

그거 가져다 마시고

밥은 굶다굶다 너무 배고프면

주택가 돌아다니며 배달음식 빈그릇 내논거 뒤짐

라떼는 1회용기 없던 시절이라

한식집은 무조건 반찬 5개 들은 동그란 반찬통에 내놨음

그래서 남이 먹다 버린 잔반 주워먹는게 내 밥이었다

하루는 그렇게 남이먹다 남긴 짜장면 주워먹다가

울음이 터져서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싶길래

외할머니한테 배고프다고 전화함

하나뿐인 외손자가 다른것도 아니고 배고파서 죽겠다는데

마음 안 아픈 할머니가 어디있음?

그 시골 촌구석에서 외손자한테 돈 붙여주러

시내까지 나가서 외할머니 체크카드에 돈 붙여줌

카드는 내가 소지중이었고..

그걸로 라면 사먹고 배가 부르니 뇌가 좀 돌아가더라..

그길로 전단지 배포 사무실 찾아가서

사장님한테 일시켜 달라고 울면서 빌었다

이만저만 해서 집이 이런데 나 돈 벌어야 먹고살 수 있다

배고파서 너무 힘들다..

초딩이라 안되는건 알지만 어떻게 안되겠냐

사장님이 ㅇㅋ 대신 많이는 못시킨다

하루에 100장, 학교 끝나고 와서 100장 돌리고

1만원 또는 1.5만원 너 하는거 봐서 주겠다 함

매일 하교 후에 전단지 룰루랄라 돌림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100장 돌리는거 일도 아니였음

100장은 그냥 핑계고 사장님이 돕고 싶은데

그냥 돈을 줘버리면

아이의 자존심을 누르는거 같아서 그런거였음

그러던 어느날

누가 어린애 고용시켜서 일한다고 신고했고

그당시 경찰이나 시청직원이 출동해도

서류 가져와라 이딴게 없음

아~그거 저희집 애예요~

심심해서 놀다 오라고 용돈 겸 주는거예요~ 구라침

무난히 문제는 넘어갔지만

또 걸리면 진짜 뭐될거 같았는지..

사장님 아내분이 일하는 식당 설거지 셔틀로 이직됨

매일 학교 끝나고 가서 점심손님이 드시고 간 설거지 모아둔거

식당 주방 뒤편에서 고무 다라이 놔두고

물받아서 그릇닦고 티비 좀 보다가

저녁밥까지 야무지게 얻어먹고 집에감

그당시 얼마나 가난했냐면

정부컴 이라고 집에 컴퓨터 없는 애들 컴퓨터를 지원해줌

근데 그것도 집주인이 집세 대용이라며 뺏어감

근데 담임이 그거 정부귀속 물품이라

가져가면 구속한다고 협박해서 다시 가져옴

다시 돌려준다 했지만 졸업하며 못받아감

그러다 학교에서 소풍 가는 날이 됐는데

늘 아버지가 내준다 해놓고 막상 닥치면 돈없다 드립

소풍날 울고있는데 같은반 친구 어머님이 데려다가

운동장에 놔두고 가방 버억 열어서

버스터콜 마냥 주변 아주머니들이

과자며 도시락을 담아주기 시작함

거기에 돈 몇천원 용돈하라고 주머니에 쏘옥 찔러줌

어린 마음에 마냥 좋다고 울다가 또 헤죽거렸다

그뒤로 소풍비도 안냄

도시락?

위에 같은반 친구 어머님이 맨날 싸줌

더 웃긴건 그 같은반 친구 여자애는 나랑 안 친함

나랑 친해서 잘해주는 것도 아님..

급식비도 살면서 내본적 없고

방과후 학교?

고등학교 가면 그 학교 끝나고

선생님들이 과외해주는 그것도 공짜였음

그리고 초1~ 중1 까지

라떼는 가정방문 그런거 없었는데

본인만 특별히 가정방문옴

매년 모든 담임선생님들이..

그후 결론은 모두 다 똑같음

용돈주기+ 슈퍼가서 과자 한보따리 사주기

인사하고 돌아가며 울기

모든 담임 선생님들이 내가 사는 집을 보고 울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음

초딩이 그런게 어디있음? 아 과자 먹을 생각에 신나있지..

나중에 들은 사실인데

나는 항상 왕따를 당해도 웃고 다녔는데

세상에서 저렇게 해맑게 웃는 아이가

저런 환경에서 자란다는게 믿겨지지 않았다고함

매년 다음 담임에게 인수인계를 해주는데

“에이 저 아이가요?” 해도 안 믿었다고..

그렇게 다사다난한 초딩을 끝마치고

아버지랑 지옥같은 삶에서 7년을 살음

중1 올라갈 무렵

아버지가 황달도 오고 몸져누으셨는데

거의 이러다 죽는거 아닌가 할시점에

큰아버지가 집에 찾아왔음

주민등록은 진작 말소되었는데 어찌알고 왔더라고..

아버지는 폐결핵 이었고

치료비 전액 무료인데 그걸 몰라서 개기고 있던 것

큰아버지가 입원 시키고

본인은 큰아버지 집으로 가게 됨

사실 나한테 아무것도 해줄게 없었음

빨래도 혼자 설거지도 혼자 다 알아서 했음

그러던 어느날 본인을 키우기 좀 짜증 났는지

보육원에 넘기려고 각보는걸 어머니가 캐치하고

어머니에게 인터셉트 당함

근데 어머니도 30대 후반의 나이에 집에서 내쫓겨서

뭐 할 줄 아는게 있나..

미용일 부랴부랴 배워서 강원도 철원 촌구석에서

막내스탭 하고 있었는데

월 100만원 남짓으로 엄마, 누나, 나

그렇게 3식구가 살았음

겨울에는 실외 영하 27도

실내 영하 20도 입김 나오는 집에서

패딩입고 전기장판 틀고 잠들고

(보일러가 기름 보일러라 못 켬)

화장실이 실내에 없고

실외에 푸세식 화장실까지 도보 1분 이동

그게 너무 좀 그래서 휴지통에 응가하고 가져다 부웠음

반찬은 맨날 무생채 계란말이 콩나물 무침

ㄹㅇ 가성비 반찬만

고기? 그딴게 어디있음 돈이 없는데..

아 이때도 군청에서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지역상품권 줬음

그렇게 1년 살다가 다시 안산으로 돌아옴

어머니랑 살면서 가장 행복한건

수도 가스 전기 집세

단 한번도 밀린적 없다는게 그게 행복했음

그러던 어느날 고2 올라갈 무렵

아버지 담낭암 말기 판정..

학교 끝나고 아버지 병문안 이라는 하루일과가 생김

그렇게 1년여간 간병하고

고3 되니까 마약성 진통제에 취해서

아들도 못 알아보는 지경에 이름..

이때 복선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가 복지수당이랑

암보험료를 고모명의 통장으로 수령중 이었음

보험금 수령을 위해 보험 가입시

수혜자가 본인에서 고모로 변경되어 있었고..

아버지 임종 한달 전

누나에게 아버지 통장 1일 인출 한도 풀로 땡겨서 매일 뽑자니까

들킬 것 같아 두렵다며 하지말라함

그러고 한달이 지나 아버지 임종 후

고모와 친척 일가는 장례식 치를 비용도 아까워

가족중 막내가 사망시에는

장례식을 치루지 않는거라며 개소리를 시전

그딴게 어디있냐며

당신이 뒤지면 그렇게 하라고 대판 싸움

그래서 장례식도 겨우겨우 했고..

49제도 본인 집에서 진행함

근데 재산은 고모가 꿀꺽함 ㅋㅋㅋㅋ

돈 왜 안주냐니까

아버지가 생전에 교육비 명목으로만 주라고 했다함

구라치지 말라고 아들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그런게 어디있냐며 대판 싸웠지만 아몰랑 시전

그래서 발인날 친척들과도 연을 끊었음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누나가 등록금 하게 돈 달라니까

고모가 자기 아들 차사줘서 돈없다 함ㅋ

그나마 몇푼 안되는 아버지 재산에

사망보험금 몇천을 고모가 꺼억함

아버지가 생전에 부워둔 국민연금이 환급되어

2200만원을 받긴 했지만

그마저도 아버지가 이혼전 만들어둔 빚 4천을

어머니가 허덕이며 갚고있던 터라

그거 갚는데 다 씀

졸업하면 인생이 좀 편해질 줄 알았는데

졸업하고 나니 기초생활수급자가 끊김;;

6개월간 군대에 가보려 노력했지만

아버지 간병하며 생긴 무단결석과

잦은 지각이 출결에 보기 좋지않아

군대마저도 번번이 낙방함

결국 주야 2교대 공장에 취직해서

주7일씩 1일 12시간씩 일함

당시 시급 4800원 얼마 하던 2013년도에

월 280 언저리 받았음

받은 돈의 대부분은 집세 내고 생활비에 씀

빠른년생이라 일찍 졸업해서

19살의 나이에 나는 가장이 되었음

누나는 진즉 대학가서 자취하고

나 혼자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됨

그렇게 2년 후 군대 입대영장이 날아옴

사실 본인은 어머니가

일을 못하실만한 수준의 부상이 있어서

가족을 부양해야되는 생계형 군면제 대상자임

하지만 면제 받으면

살아가며 좋지않은 시선을 받게 될거다 하며

어머니가 다녀오라고 권유해서 군대감

그러고 또 2년 후

전역하고 전에 다니던 회사

아웃소싱 과장님에게 연락해서

전역날 야간근무 뛰러감..

근데 막상 일주일 다녀보니

이제 군대도 다녀왔고 ㅈ소 계속 다녀야 하나? 싶어서

여기저기 찔렀는데

월 매출 7천억원대 중견기업에 취직함

연봉 한 5천쯤 받으며 2년정도 다니다가

이직 몇번 하고

지금은 좀 알짜배기 화학회사 ㅈ소에서

실수령 300 정도 받으며 쉬엄쉬엄 하는중

어머니는 본인명의 15평 빌라 투룸에 살고

본인은 회사에서 내주는 기숙사에서 사는중..

이제는 집세 달라고 쫒아오는 집주인도 없고

가스비 없어서 가스도 안 끊기고

눈치보며 보일러 트는 그런 일도 없고

치킨도 짜장면도 내 맘대로 시켜먹고

모든걸 누리게 되어서 이제는 행복함

솔직히 어렸을 때는 내 삶은 왜 이렇게 힘들까 싶었지만

그렇게 좌절하고 있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음

그 시간에 하루라도 더 열심히 살아야 조금이라도 바뀜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적응의 동물이라

그 힘든 시간도 적응하고 견뎌낼 수 있음

이세상 모든 흙수저들아

남들보다 2배 더 성장하기 위해 2배 더 열심히 발버둥 쳐라..

그래야 평범하게라도 살 수 있음

그리고 커서 제일 좋은점이 있는데..

그동안 나에게 은혜를 베풀던

모든이에게 갚아줄 수 있다는거임

위에서 말한 초딩때 도시락 싸주고

소풍비 내주고 해주시던 어머님

15년만에 찾아가서

홍삼 선물로 드리고 감사했다고 인사드리니까

잘자라주어 고맙다고 우시던데

지금도 수시로 운영하시는 식당에 식사하러 찾아뵘

저 어머님 덕분에 이렇게 잘 자라서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 보여드리는게

그분에게는 큰보람이니까

전단지 사장님은 지금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연락이 닿지 않아서 찾을 방법이 없더라

사실 그때 받은 빚은 남들이 보기엔

그저 도시락과 용돈 과자 현장체험학습비 등등 이지만..

내가 받은 빚은 그 어떠한 걸로도 갚을 수가 없음

살면서 평생을 잘 살거라고 보여드리는게

그분에게 갚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는 중

형들도 다 열심히 살아

지금것 버티며 살아온게 너무 아깝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