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SD를 무릅쓰고 써본다
아침 7시 반, 신촌 원룸에서
X같은 알람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뜬다.
대충 옷을 구겨입고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
회사로 도착하니 벌써 피곤하다.
BMW는 바라지도 않고
연말 성과급 받으면 아반떼라도 사고 싶은 마음에
회사 근처 월주차를 알아보고 있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고릴라처럼 생긴 부장이
주말에는 여친이랑 뭐했냐며 음흉하게 묻는다.
대충 밥이나 먹었다고 대답하고 자리를 피했는데,
끝끝내 쫒아와서는 주말 내내 힘쓰느라 피곤해 보이는거 아니냐면서
별 개소리를 다한다.
컴퓨터를 켜놓고 커피를 사러 갔다 왔는데
돌아오니 사무실은 전쟁터다.
‘X바! 이 지경이 되도록 뭐했어!’
듣자하니 주말에 동남아 화학공장 한곳에서 불이 난 것 같은데
우리와도 거래관계가 있는 곳이라
일정 차질은 불보듯 뻔하다.
제발 트레이딩에서 알아서 처리해라 제발
나한테 불똥 튀지 말아라 기도를 하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야 임마 기획팀이란 색기들이 하는 일이 뭐야!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응할건지
미리미리 계획을 세워놨어야 될거 아냐!!’
하고 상무가 어거지를 쓰는 소리가 사무실을 뒤흔든다.
납작 엎드려 있는데 승진에 미친 부장놈이
쓰잘데기 없는 일을 만들어 온다
‘예 상무님, 다음부터는 이런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참에 주요 거래처 안전 현황과
상황 발생시 대응계획을 싹 정리해 놓겠습니다’
아니라 다를까 부장놈은 나를 부른다.
주요 거래처 30곳을 나래비 세워서 자연재해 발생 빈도랑
안전관리 등급을 파악해서 사고위험을 ABCD로 나누고
A급은 품목이랑 물량을 파악해서 대응계획을 짜놓자고 한다.
아니 이게 뭔 개소리야
그래도 까라면 까야지.
일단 해외영업팀에 전화를 해서
주요 거래처 명단과 거래 품목,물량을 정리해서 달라고 전화를 하니
‘야 이 ㅁl친색갸 우리 지금 발등에 불 떨어진거 몰라?
그딴 쓰잘때기 없는 짓은 한가할때 부탁해’
하고 앙칼지게 끊는다.
맞는 말이라 팀장한테
‘지금 해외영업팀 바쁠텐데, 자료협조도 안되고
급한불 먼저 끄고 시작하면 안될까요?’ 라고 물으니
‘야 이색기야 상무님 화나셨잖아,
내일 아침까지 보고서 올려야 될거 아냐!
언제부터 기획팀이 현업들 사정 봐줘가며 일했냐?’
라고 까이기나 한다.
할 수 없이 동기한테 읍소해서 자료를 부탁하니
‘정리는 네가 알아서 해라’ 라면서
가독성 개판인 수mb짜리 액셀파일 몇개를 던져준다.
오전 내내 낑낑대며 주요 거래처 명단을 추리느라
점심도 못먹고 김밥 한줄을 사와서 후다닥 먹는다.
명단이랑 물량을 추리느라 오전이 다 갔는데,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공장들에
허리케인은 언제 오고,
안전등급이 A인지 B인지는 알게 뭐람.
대충 구글로 이미지 검색해서
공장 건물이 지저분해 보이면 A주고,
웬 백인 아저씨가 웃고 있는 사진 있으면 D주는 식으로 정리해보니
A가 너무 많다.
다시 추려서 잘사는 나라에 있는 공장들은 B로 낮추고
못사는 나라에 있는 공장들로 A를 꾸렸더니
대충 그럴싸하다.
대응계획은 대충 생각나는 판매처 이름 아무거나 같다 붙여놓고
‘구두 확인’이라고 써갈긴다.
보고서를 들고가니 부장이 흡족해하며
상무한테 들고가잔다.
하루종일 걸린 개삽질의 결과물을 들고가니
상무가 흠흠 읽는척을 하다가
또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야 임마 너 일 똑바로 안해? 여기가 왜 A급이야?
여긴 내가 지난달에 출장 가봤는데
최근에 리벰프 끝나고 X나 잘해놨어!
어 이것봐라 이건 또 왜 D야?
여기 지난달에 리크 있었던거 몰라?
이색끼.. 너 일 이따구로 할래?’
부장놈 얼굴을 보니 아연실색이다.
‘상무님, 김대리가 오래된 자료로 확인을 한 모양입니다.
최신 자료로 다시 확인하라고 하겠습니다’ 하고 나왔는데
담배나 같이 피우잔다.
‘OO아.. 회사일 만만하냐?’
‘아닙니다’
‘내가 언제까지 네 뒤치다꺼리 해야되냐?’
‘죄송합니다’
‘잘하자’
‘예’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서
이 일을 어찌 처리하나 막막하게 앉아있다가
혹시 안전관리팀 동기한테 물어보면
뭘 알까 싶어 전화를 해본다
동기 (고향: 서울, 특징: 장기간의 울산 근무로 현지 패치 완료)가
구수한 동남방언으로 받는다
’뭐라카노? 동남아 공장들 안전관리 현황 자료 같은게 있냐고?
뭔 개소리를 해쌋노?’
할 수 없이 하나하나 구글링 해가면서
최근에 사고 난놈 있나 찾아보고
상무놈이 알만한 사고이력이 있으면
A급으로 조정하고 나니 9시.
상무랑 부장은 진작 퇴근하고 없고
속으로 C8을 외친 뒤
나도 가방을 싸들고 나온다.
9시에 택시타고 택시비 청구하면 ㅈㄹㅈㄹ을 해대니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다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 (콜라 증정 이벤트중) 하나를 사서 입에 쑤셔 넣는다.
다음날, 부장도, 상무도
내가 작성한 보고서를 묻지도, 찾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