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꼰대는 군대 선임이었다.
내가 만났던 이 새끼는
삶에 대해 근거없는 확고한 철학이 있어서,
자기만 옳고 남들은 무조건 틀렸다 것에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는 것에 이미 훌륭한 꼰대라 할 수 있겠다.
예를 하나 들자면,
이 새끼는 치킨을 시키는 방법에까지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는데,
치킨은 무조건 후라이드가 근본이며,
간장과 마늘은 어쩌다 일탈로 허용되는 것이고,
양념은 사문난적이란 확신이 있어서,
어쩌다 양념을 시켜먹는 게 눈에 띄면 지가 먹을 것도 아닌데
입에 거품을 물고 길길이 뛰다가
반반으로 나온 후라이드를 던져주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지나가던 선임이 말려줘야 비로소
“다음부터 그러지 마라” 같은 소릴 하며 지 할일로 돌아가곤 했다.
물론, 요즘 군대는 매 사사건건 그러면
별것도 아닌 일로 마편 찔러서 날아가게 십상인 터라
이 새끼도 처음엔 성질을 죽이고 살았지만,
이 새끼가 부분대장을 달면서부터 다시 미치기 시작해
소대가 이 새끼 꼰대질에 시달리며 살곤 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요즘 종종 그 때 진짜 병1신 같았던 그 새끼 꼰대질이
의외로 지금 생각하니
참 괜찮은 성질의 것이었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너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려 하는 것이다.
1.엄마한테 전화할 것. 예외 없음.
요즘엔 핸드폰을 쓰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지만,
그 때는 이게 그렇지 않았던 터라
전화를 하려면 공중전화던 콜렉트콜이던 뭐가 됐던
거기까지 가서 전화를 해야 했다.
근데 얘는 무슨 확신이 있었는지,
분대 보고 (분대장이 얘한테 떠넘김)를 쓰게 되면서
꼭 확인했던 것 중 하나가
“오늘 엄마한테 전화 했냐?” 였으며,
여기서 대답이 좀 시원찮다 싶거나
자기의 관심법(…)을 통과하지 못하면
무조건 다시 내려보내 엄마한테 전화를 시켰다.
가끔은 진짜 할일이 없는지
“전화 하고 와~” 이러고 몰래 쫓아가 전화를 하는지 감시했으며,
하는 척만 하고 올라오는 애들이 있으면
예의 그 거품 물고 길길이 뛰는 걸 반복하거나
“엄마가 안 받습니다” 해도
진짜 안 받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같이 올라오곤 했다.
그 때 생각하면 군인의 개인 시간은 정말 일분 일초가 중요한 터라
이 새끼 전역하면 진짜 존나팬다 다짐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지만,
전역한지 2년이 다 돼가는 지금에도
가끔 우리 엄마는 이모들을 만나면
“우리 아들이 군대에서 얼마나 전화를 열심히 했는지”를 두고 자랑을 하곤 하신다.
심지어 어느 날은 전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의 관심법을 통과하지 못해서 2번 한 적도 있지만,
우리 마더는 이것에 대해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계시고
아들이 효심이 깊네 하고 생각하신다.
2.공부는 무조건 영어공부
얘는 영어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본인이 이 사실을 꽤 뿌듯하게 여기면서 자랑하는 게 꼴불견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나아가 종종
“토익 900은 전혀 영어를 잘하는 것이 아니며,
900이란 점수는 목표가 아니라
못 넘는 것에 문제가 있는 최소요건으로 여겨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 친구의 철학에 의하면,
“영어를 한다”는 것은 토익 900같은 하찮은 성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늘날을 살아가는 너희들은 무조건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기에
이 최소요건을 도달하기 이전에는
다른 일로 시간낭비를 해서는 안 돼야 했었다.
군대 자체가 시간낭비인데 무슨 개소리인가 싶지마는,
우리 부대는 여느 부대가 그렇듯
공부를 해서 특정 자격증을 따면 특박을 주곤 했는데,
이 자격증이 영어가 아니면 눈에 불을 켜고 훼방을 놓았다는 말이다.
오직 900점이 넘는 애들만이 다른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새끼는 왠지 몰라도
국사를 공부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으며,
국사를 일컬어 “죽은 학문”이라 부르며
이걸 공부하는 걸 굉장히 마뜩찮아 했기 때문에
꽤 만만하게 딸 수 있는 한국사 1-2급 공부를
이 새끼 하나 때문에 못하는 부대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 친구의 논리에 따르면
영어는 단기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아는 새끼가 900을 목표로 잡음)
계속 꾸준히 해야하고
너네들이 1순위로 여겨야 하는 덕목이며,
이것이 충족되지 못한 채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은
눈 앞의 조그만 이익에 눈이 멀어
큰 일을 그르치는 것이라는 선비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실제로 한 말.)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새끼의 논리에 감화돼서
손에 담배가 아닌 토플책을 끼고 다닌 짬찌들이
밑에 줄줄이 늘어났다는 것인데,
얘는 그런 애들을 유독 이뻐해서,
걔들을 대상으로는 공부 시간을 충분히 보장해주려 해서
일각에선 좋은 선임이란 평가를 받곤 했다.
3.아픈 건 죄.
이 새끼는 남들보다 특별히 건강한 몸을 타고 난 것 같은데,
어느 정도냐면
단체로 삼계탕을 먹고 부대가 식중독으로 뒤집어졌을 때
혼자 2그릇을 쳐먹고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이 새끼는
다른 모든 부대원들이 나태하고 나약해서 일어난 결과라고 생각했으며,
선임 후임을 가리지 않고 자기관리를 성실히 함으로써
이런 일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을 전파하고 다녔다.
선임에게는 말을 조심히 한다는 것이
“우리 X병장님도 이제 전역하시기 전에 항상 건강하시고~”
같은 아부성 말만 붙일 뿐이었고,
이후엔 자기관리를 통해 질병으로부터 면역이 되는 신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이비 전도 같은 말을 퍼트리고 다녔다.
그렇다고 특별한 관리법이 있냐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냥 씻고 청결해라라는 게 전부였고,
이것에 한정하여 유독 다른 부대원들에게
시어머니같이 굴어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 소대장들은 오늘은 쉬어라~ 하면
“최소한의 것만 지키자” 같은 것 없이
푹 쉬게 해주는 좋은 지휘관들이었지만,
정작 이 새끼가 이 “최소한의 것만 지키자” 귀신이 붙었는지
하루 죙일 실내에만 있는 애들을 쪼아서 씻겼으며
내무실을 쓸고 닦아서
휴일을 맞은 군인들을 괴롭히며,
“너네가 그러니깐 식중독 걸리는 거야”를 주문처럼 욍알거렸다.
덕분에 전 소대가 이 새끼가 딱 한번만 아프기를 벼르고
또 별렀는데,
기가 막히게도 전역하는 그 날까지
한번을 안 아프고 전역하여
전역날 후임들이 주먹을 통해 물리적으로 아프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도 종종 군대 동기들을 만나곤 하는데,
이 새끼는 결국 우리들 사이에서
전역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까고 또 까이는 양파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근데 이제 나도 졸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할 때즈음
(나는 3학년을 마치고 늦게 군대를 갔다)이 되자,
이 새끼가 시키려 했던 일들이 꽤 괜찮을 일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가 도래한 이후 청결 같은 부분이나 영어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
그 때 좃같았던 것들이 의외로 입에 쓴 약이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요즘 일이 힘들어서 미쳐가나 싶다.
시1발 퇴근을 못해서 직장에 갇혀있다보니 별 소릴 다하네..
혹시 다 읽었으면 긴 글 읽어줘서 고맙다.
사실 좀 심심했는데 글 쓰니깐 시간 잘 가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