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09년. 막 스무살. 고졸로 빈둥거리며 살던 시절 이야기.
오 갈 곳 없던 나에게 갈 곳이 생겼다.
이모가 동네에 피씨방을 차린 것이었다.
집에서 눈치만 보고 살던 나에게는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되는게,
그 자리 200미터 반경에 피씨방이 4개,
400미터 반경으로는 7개가 존재하는
피씨방 거리라 불러도 무색할 동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pc방이 많은 이유는
근방에 초, 중, 고등학교가 10개도 넘게 모여있는 동네라서 일거다.
(참고자료 – 피씨방이 많을 수 밖에 없는 동네 구조)
심지어 지리도 좋지 않았다.
다른 pc방들은 대로변에 있는 반면,
이모네 피씨방은 골목 안쪽에 있었기에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손님은 항상 없었다.
방과 후 시간에 초딩들이 몇명 오긴 했지만,
잠시 한 시간 하다 가는게 초딩이었고
밤낮으로는 보통 리니지하는 아저씨 두어분.
뮤 하는 아저씨 두어분이 전부였다.
이모가 pc방에 대해 잘 모르시는 건 아니었다.
이모는 손님을 끌만한 여러가지를 시도했다.
무료 음료수라던지 쿠폰이나 정액제 시스템이라던지.
하지만 이미 그것들은
경쟁력이 심한 주변 pc방들이 이미 하던 것들이었기에
큰 이목을 끌지는 못 했다.
결국 매달 적자를 보던 이모네 pc방은
반년도 못가 문을 닫을 지경에 처했다.
그 때, 거의 게임에 미쳐살던 사촌형이 등장했다.
당시 사촌형은
리니지를 제외한 모든 게임에서
무조건 랭킹권 안에 들어야만 게임을 접는,
끝을 봐야만 하는 심각한 게임 매니아였다.
가게 상태를 본 사촌형은
이모로부터 이미 망해버린 pc방을 인수받았다.
매출도 없는 상태에서 사촌형이 처음으로 손 댄 것은
간식 바꾸기였다.
국제시장을 가서 저렴한 간식을 엄청나게 사들이고,
거의 원가에 팔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미 다른 매장에서도 다 하고 있는 무료 음료수였다.
주변 pc방들은 처음 들어가면 무료로 음료수를 주었는데,
이모네 피씨방은 이걸 무제한으로 제공하고 있었고,
이는 생각보다 매출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
사촌형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생각하다
떠올린게 사카린과 짝퉁 립톤이었다.
당시 G마켓 같은 곳에서 대량으로 짝퉁 립톤을 구매하면
대형 깡통 1캔당 2천원.
사카린은 작은 한 봉지당 1천원이었다.
(정확하게 맞는지 모르겠음)
이걸 이용하면 3천원으로
100리터를 뽑아내고도 남는 양을 만들었다.
그냥 복숭아 향이 조금 나는 설탕물이었다.
이로서 매장의 간식이나 음료는 근처 어느 피씨방보다
저렴하게 준비되었다.
그 다음으로 형이 투자한 것은 PC방 알바생이었다.
사실상 알바생이 필요가 없었다.
손님도 없었기에 굳이 알바생을 둘 필요가 없었는데
당시 시급 4천원에서 2배인
시급 8천원으로 알바생을 뽑기 시작했다.
알바 면접은 하루에도 수십명씩 지원이 왔고,
이중에는 단순한 20살짜리 고졸들도 많았지만,
동네에 이쁘다는 여자들.
그 중에서도 노래방에서 일하는 아가씨들도 지원을 많이 했다.
사촌형은 그 중에서도 신중하게 2명의 누나를 뽑았다.
근데 누나들은 출근할 때,
홀복 (노래방에서 일할 때 입는 옷)을 입고 출근했고,
그때부터 중고등학생들 손님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마 옷이 거의 그런 옷만 있었던 것 같다.
편한 옷 입고 출근하는 걸 못봄)
하지만 문제가 여기서 발생하는데,
알바 누나들을 보기 위해 피씨방을 오는
근처의 일진들만 pc방을 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일진들을 무서워하던 평범한 아이들은
이 피시방을 오길 꺼려했고,
사촌형들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무료로 pc방 시간을 주고,
그걸로 모자라서 플래티넘 회원으로 등극해 주었는데,
대신 학교에 갈 때마다 학생들에게
우리 피씨방을 오게 홍보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영업 사원을 뽑은 셈이다.
그 일이 있고부터
우리 피씨방은 손님이 넘치게 되었지만
사촌형의 욕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피씨방이 아무리 넓어도 수용할 수 있는 손님의 수는 정해져있고,
결국은 학생 손님들이 대부분이니,
손님이 오는 시간대가 너무 집중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촌형은 해당 시간에만 출근하여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붙어서 앉고 싶은 친구들이 왔을 때,
다 따로 앉아야되는 상황이면
이미 앉아있는 학생들 자리를 옮기게 하고,
대신 자릴 옮긴 학생에겐
원하는 과자를 무제한으로 먹게 해주었다.
때문에 과자 사먹을 돈이 애매하던 학생들은
형이 자리를 만들려고 일어나는 순간
서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얘기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자리가 모자라서 대기해야되는 상황을 대비해서,
피씨방 입구엔 망한 만화책방에서 사들인 만화책으로
공짜 만화방을 만들어 주었으며, 옆에는 당구대도 준비했다.
대기를 하던, 안 하던
그 공간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밤 늦게까지 게임을 하는 애들은
거기서 대기를 하기도 하고,
그냥 거기서 놀다가 가는 애들도 생겼다.
당시 나는 사촌형의 오른팔 같은 존재로,
여러가지 임무를 수행했는데,
피씨방 안에서는 라면 끓이기
(미모의 알바생들은 미모를 뽐내는게 일이었다),
다른 피씨방 손님 수 확인하기 등을 했는데
실제로 사촌형이 운영한지 넉달만에
다른 피씨방들은 사실상 손님 수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주변 피씨방들이 아예 망해버려 문을 닫는 일이 생기는데..
사촌형은 당시 학교도 째고
게임을 하러 오는 애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고딩들이
마우스 거치대, crt모니터를 요구했던 걸로 기억하며
추가로 어떤 ㅁ친 학생이
서든어택 5인 전용룸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도 했다.
하지만 똑같이 ㅁ친 우리 사촌형은
실제로 서든어택 전용석에 crt모니터를 쫙 깔아주었으며
모든 좌석에 마우스 거치대를 설치했으며,
매장 한 구석을 아예 밀어버리고
방음이 되는 서든어택 전용 룸을 2개를 만들었다.
이 때 피씨방의 인기는 거의 절정에 달했다.
밤 낮 없이 손님은 항상 만석이었으며,
그때부터 나는 집에도 못가고 사촌형과 생활하면서
피씨방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나에게도 피씨방에서 어느 정도 권력이 있어서인지,
일진녀, 20살이 된 일진녀들이
나한테 먼저 대쉬를 하는 상황까지 생기게 됐다.
근데 모쏠아다인 필자는 아무고토 없었다.
어느 날, 사촌형이
나에게 학생들 서든어택 대회를 한번 열어보는게 어떻겠냐고 얘길했고
나는 그 의견에 백번 동의를 했다.
그리고 상금을 정하는데,
1등 상금을 20만원으로 같이 책정했었다.
그리고 대회 포스터가 나온 당일.
나는 거품을 물고 기절할 뻔 했다.
1등 상금이 총 100만원 (1인당 20만원)으로 박혀있는 것이었다.
해당 포스터는 해운대 전역에 깔렸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을 탔는데,
이 소문이 어디까지 탔는지
심지어 대구에서 대회 참가를 희망하는 고등학생 팀도 있었다.
16강으로 시작한 대회는
각자 공간에서 시작해서 준결승부터는 pc방에서 진행하는 걸로 했는데,
이 때 모인 사람의 수는 현존하는 어느 클럽의 인원보다 많았다고 장담한다.
준결승 대회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이 때, 참가한 학생들이 아마 일진들이었나 싶다.
대회 끝물에 불만이 있었던 팀이 일어나서
상대팀에게 몸싸움을 걸었다.
이에 화가 난 형은 싸우는 학생들을 손에 쥐고 계단 밑으로 집어던져버리는데,
이를 거의 백명이 넘는 학생들이 보고 있었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놀랬던 건,
사촌형이 두 손으로 총 4명을 끌고가서 던졌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동네의 모든 학교에 소문이 퍼졌다.
학생들 사이에선 이 사건이 나름의 정의구현 사건으로 통했는지
그 때부터 충성 고객이 엄청나게 생기기 시작했다.
사촌형네 엄마,
그러니까 우리 이모에게 학생들은 모두 어머니라고 불렀으며,
가끔 알바가 없어서 이모가 일을 할 때는,
계산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학생들이 직접 했으며,
심지어는 게임이 끝나고 바닥청소를 하고 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에게도 작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학생들이
동네를 지나가는 나를 보면 쫓아와서 인사를 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일어난지 1년 뒤.
사촌형이 피씨방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이유는 형이 인터넷 방송에 흥미를 느끼면서인데,
그때부터 피씨방 운영은
전적으로 이모가 도맡아 하게 되었고,
나와 사촌형은 그 길로 인터넷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
‘경상도일번’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던 사촌형은
아프리카TV 랭킹 1위를 찍으면서 전설에 남는 BJ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