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필인 줄 알았던 아버지가 군대 썰을 처음으로 말해주셨는데

우리 아버지는 연세가 굉장히 많으심.

35에 나를 낳으셨는데 (첫째)

호적에 늦게 올리셔서 본래는 38이심..

어린 시절 나와 3살 아래 남동생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굉장히 무서워했음.

아버지의 상체는 칼에 난자 당하신 듯 찢긴 상처가

흉부,복부,등 팔 곳곳에 있었고

과묵하셨기 때문.

하지만 어릴 때 뭐나 제대로 알겠음?

그 흉터보다 두려웠던건

가끔씩 아버지가 악몽을 꾸시는지

‘나도 같이 가야하는데..’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우시면서

심하게 잠꼬대를 하시다

벌떡 벌떡 일어나시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

하지만 아버지가 마냥 무섭고 두려운 존재만은 아니었음.

한 번씩 집에서 약주 한 잔 하시면

수야~ 막둥아~ 아부지가 재미난 거 함 뵈주까~?

보고싶나? 하시면서 젓가락을 사정없이 방문에 던지시면

신기하게 펍!펍! 하면서 박혀들어감.

또 겨울에 강이 얼면

뭔가 가방에 바리바리 챙기셔서 강으로 가서

얼음이 두껍게 얼지 않은 바위 틈새에 꽃고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얼마안가 뻐벙! 하면서 얼음이

조각날 만큼 작은 폭발이 있었음.

조금 소리가 큰 폭죽?

어린 나이엔 그정도로 기억하고 있음.

그럼 바위 아래있는 물고기들이 배 까뒤집고

둥둥 떠오르면 그걸 건져가서 먹곤 했었음.

필자 집이 경기도 연천이라

군필자들이라면 알 만큼 알 것이라 생각함.

서론이 길었는데,

아버지가 군대라는 걸 나에게 처음 말해주실때가 고1때였음.

그때도 단순히 일빵빵 알보병 전역자신 줄 알고 있었음.

원체 자세히 이야기해주시지 않기도 했고.

내가 직업군인을 꿈꾸고 있을 시기여서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시고 아버지랑 대화가 원활 해진 계기라고봄.

(해병부후 321기 출신,동생 udt58-2 출신)

아버지는 내가 입대하던 순간에도

부사관교육대 면회 때도 감정이 없으신 듯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셨음.

임관을 하고 임관휴가 4박5일을 받고

가까이 사는 막내고모

(포천, 연천이랑 차로 30분거리 정도)께 인사를 드리러 가서

같이 저녁을 먹는데 군대 이야기가 나오게 됐음.

고모 왈

‘니 아빠도 군에가서 이북갔다가 죽었는 줄 알았는데 으째

니도 그래 힘든데로 골라갔노’ 하시는데

순간 아버지가 ‘뭐라노!’

하고 약간 노하신 톤으로 소리를 높이심.

고모는 ‘아이고 오빠. 미안타 미안타’ 하시며

사과하시고 약간 어색한 저녁식사를 끝냄.

집에 돌아오면서 고모가 하신 말씀이 당연히 신경쓰여 물어봄.

‘아버지 군 생활 하시면서 북한 가셨어요? 죽었는 줄 알았다는게 무슨 말이에요?’

해도 침묵만 있으셨음.

그렇게 집에 다다른 때쯤

‘친구들 안보나? 내랑 소주 한 잔 할래?’ 하심.

첫 휴가기도 했고

15주만에 집에 오기도 했고

친구들도 전부 입대했던터라

동생이랑 셋이 집에서 곱창이랑 술 한잔을 함.

두어병쯤 마셨을 땐가

아버지가 말씀해주심.

‘아버지는 병역이 미필로 되어있어’ 라고.

순간 벙찜.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는게

‘육,해,공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곳에서 군생활을 했지.

지금에서야 정보사라던지 공작원이라던지

그런 말들을 하더라고..

위장명으로 회사 이름이나 직책같은 것들도 쓴다고 하더라’ 라고..

아버지는 운동선수셨음.

경상북도 대표로 나가실만큼 운동도 잘하셨고

특출 나셨었음.

아버지 나이 17세.(호적에 늦게 올라가셔서 사실상 20세) 때 육군을 지원했다 하심.

워낙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이라

입 하나 덜어보자 싶어 입대를 하셨는데

어느 날 훈련소에서 운동 특기자들을 뽑아놓고

(대략 20명정도, 정확히는 기억 못하시는 듯)

밤에 연병장 한 가운데서

복부에 사정없이 발길질을 했다함.

그대로 고꾸라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대로 벌떡 일어나서 덤비는 사람도 있고.

맞는채로 버티는 사람도 있었다 했는데

아버지가 맨후자셨음.

그렇게 몇 명을 간추려서 눈을 가리고

두돈반도 아닌 사제트럭에 탑승해 사흘 정도를 이동 한 후에야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도착했다함.

그 후 부터 모진 구타와 훈련들이 시작됐다함.

이름과 교번조차도 없고.

‘야, 새끼돼지’ 이게 당시

공작원 훈련생도들을 부르는 명칭이었다함.

시간이,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도 잊어버리게 되고

그 곳에서 폭파, 독도법, 무성무기, 생환,

수영, 잠수 등 여러가지 훈련을 받았다 하심.

이미 그 때 아버지 집에는

훈련 중 사망으로 사망통지서가 갔고,

부대에서 사망사유를 확인 한다는 핑계로

시신양도도 거절했다함.

(사망통지서 이야기는 고모한테 다시 한 번 확실히 들음.)

지금 공작원들은 모르겠지만

그 때 당시는 주둔지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함.

비트파서 누우면 그곳이 곧 주둔지가 되었고.

북파부대가 한 곳에만 있는게 아니라

산악지대를 완전무장으로 구보와 행군을 통해

다른 병사(막사)로 이동 후

부대 정비와 약간의 휴식.

다시 이동.

이런식의 훈련이었다 하심.

고된 훈련 중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건

한 동기분이 ‘xx야. 나 먼저 집에 갈게..’ 하시더니

그대로 낭떠러지로 뛰어내리셨다는 것.

당연히 즉사하셨는데

충격적인건 그 와중에도 교관들과 아버지는

사지가 찢어진 시신을 각자 나누어 군장에 우겨넣고

말라 비틀어진 소면을 소금과 계곡물을 섞어 드셨다는 것임.

인간성이 사라지고

오로지 본능과 훈련으로 다져진 몸만 남게 되셨다 함.

몸에 새겨진 상처들도

대검격투나 아주 낮은 울타리 같은 것을 포복으로 지나가는데

날카로운 철조망을 빨리 통과하지 못하면

교관들이 사정없이 짓밟는다함.

살점이 찢어지고 너덜거려도

통과해야만 하셨다하심.

나는 또 처음 안 게

염소고기도 닭고기도 거의 대부분 모든 고기는 회로 먹을 수 있다하심.

위생상 당연히 안 좋겠지만

가장 많이 민가에서 몰래 잡아먹던 게 염소라고 하심.

염소는 위장이 아주 커서

고기는 기껏해야 7근, 많아야 10근이라고 하시는데

고기가 적어 해체하기도 편하고

그 큰 위장은 먹기도 하지만

고기를 담는 포대용도로 사용 하셨다함.

(물론 1회성)

난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저 감탄이었음..

세월이 흐르고서 작전을 나가시게 됐는데,

이건 솔직히 쓰기겁남. 길어서. 쓰기도 힘듬.

두 번의 작전 후 아버지는 뜬금없이

‘집으로 돌아가라’ 라는 말과 함께 차비 몇 푼에

전역신고 조차없이 처음 입대했을 때 처럼 눈을 가리신 후

한적한 한 길에 내려서 어이없이 고향땅을 찾아가셨다함.

시간과 날짜의 개념이 없다보니 나와보고서야 알았는데

약 5년을 군에 계셨다함.

사회적응도 굉장히 힘드셨고

나라가 나를 이꼴로 만들었다는 원망에

애꿎은 파출소나 동사무소 같은곳만 몇 번씩 박살이났다함.

낼 모레 30되는 내 친구들도

아버지 포스 땜에 집에 잘 못놀러옴ㅋㅋ

어떻게 마무리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들은 썰은 많은데 폰으로다가 쓰려니 너무지침.

가방끈도 짧고 논리적이지도 못하고 다 써놓고 내가봐도 글 진짜 못 쓴듯..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거고 믿는 사람들도 있겠지.

난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내 동생새끼도 이 때 감명을 깊게 받아서

해군특전 지원해서 병장만기 전역함.

그냥 잠도 안 오는 밤에

타지살이하는 내가 아버지 생각에 좀 끄적여봄.

어떻게 끝내지…

9럼 20000

2탄 작전 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셔서 작전 썰도 풀어보겠음..

현재는 공작원 병력통제나 운용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모르겠음.

아버지 군 생활 당시에는 짝수의 작전인원 투입은 절대 불가능이라함.

짝수라는 인원은 변심,도주 등

팀의 단결력이나 사기저하에 부정적 요인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임.

교관들 조차도 생도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동일한 교육을 함께 진행함.

왜냐면 교육을 받는 새끼돼지들을 가르치는 게 선임 돼지들이었으니까.

작전명은 들어 알고있지만 따로 기재하지는 않겠음.

1년을 동일한 교육에 대해 반복숙달을 수백회 하고

사회와의 철저한 단절을 행하며

정신교육, 세뇌를 끊임없이 함.

2년차 새끼돼지들은 휴전선 인근으로

침투루트 선임돼지들이 북파하고 퇴출하는 모든 경로들을 암기한다고 함.

좌표를 외우고 주변 지형,지물들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2년차까지 교육을 완료함.

물론 새로운 침투경로를 개척한다던지

위험요소가 있다고 판단되는 곳은

발파 후 매몰이나 인근부대의 경계초소를 증가 시키는 등

(북파가 가능한 루트는 남파도 가능하다 판단하기 때문이라 하심..)

흔적을 없애는 훈련이 2년차 까지라고함.

여기서 의구심이 드는 것은

모든 경로는 남파공작원들도 동일하게 알거나 예상하지 않겠느냐는 것인데

물론 모든 경로를 차단 할 수 없음.

실제로 두 번 나가신 작전 가운데

1건이 그들과의 조우로 실패한 작전임.

(기재를 안했는데 2년차부터는 ‘돼지’라고 부르며

선임돼지들을 보조, 새끼돼지들을 교육시키며

동일한 훈련내용들을 반복숙달함

시간개념이 없기 때문에 대략 이쯤에 이랬던 것 같다’ 라고 하심.)

앞에서 썰 풀었을 때 주둔지의 개념이 거의 없다고 한 것 기억들 함?

언젠가 경기 연천 전곡리

(필자 고향, 현재도 거주중)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양x리 가는길.

한탄강 다리 하나 건너면 지금도 흔적은 조금남아있는 돼지부대가 있었음.

기동을 거의 하지 않고

이곳을 거점으로 끊임없이 수색을 나가시고

복귀하는 때가 있었다함.

직감적으로 느끼신게 ‘침투다’ 라고 하심.

내무반이라고 부르기에도 초라한 곳에 모여있는데

이쯤되면 구타도 있어야하고

야간훈련을 나갈 시간인데 왜 조용한지 불안하시던 때

선임돼지가 수육과 주전자 몇 개를 들고와서

던져주시고는 배불리먹고 푹 자두라고 하셨다함.

날이 밝아도 집합도 없이 내무반에 들어와 수시로 인원확인만 하고 나가고

그렇게 땅거미가 내려 앉을즘 비상소집을 했다함.

인원들 중 돼지 몇 마리를 선발 하셨는데

그들 가운데 아버지가 계셨음.

최소한의 인원을 선출하고

남은 돼지들을 남겨둬야 하는 건

새끼돼지들을 교육, 통제 할 인원이 있어야만 했기때문.

선발 된 돼지들에게는 팀에 소총 한 정.

그리고

각 인원 권총 한 정. 실탄 지급을 함.

당시 아버지께서는 권총 한 정, 다이너마이트를 받으셨다함.

아버지는 폭파를 주특기로 받으셨고

소초나 아군의 퇴로확보 후

적군의 퇴로진입이나 퇴로차단을 임무로 받으심.

(소총이 한정 뿐인 이유는 비무장지대로의 이동이 불가피하고

이곳에서 무장은 국군의 도발 등으로 북괴군에게는 명분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

권총도 별반 다를 것 없지만

단순 크기차이로 인해 걸릴 위험 부담이 적고

은닉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들음.

때문에 공작원에게 강조되는 것은

은밀,은닉,신속 이라함.

교전 발생 시 화력의 열세로 전멸 당한다고 함.)

작은 소금 주머니와 육포도 지급 받으셨는데

아무리 아껴 먹어도 사흘을 못 버틸 양을 주는데

작전이 길어질수록 식량은 자체 해결임.

하지만 소금은 넉넉히 받은게 산골짜기서 소금 한 줌 쥐고

물을 들이켜면 그런대로 허기를 면할 수 있기때문이라함.

항상 수통에 물은 가득해야만 한다함.

생환 훈련의 기본 중 기본이 식수확보라 하심.

저녁에 출발해 무박2일로 능선을 몇 개를 넘어 얼마나 지났는 지도 모르겠다함.

아버지께서 선임돼지와 하달받은 임무는

월북하는 아군

(기사나 기록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월북해서 투항하는

군인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마어마하게 많았다함)과

조우하는 곳에서 아군의생포(불가시 즉각처분)라 함.

투항하는 군인은 대부분이 지금의 영관급 장교들이었다함.

북괴들에게는 아군의 고위기밀문서를 취급하는 항장이니 얼마나 고마와라 했겠음?

대우도 꽤나 받았을거임.

공작원들 임무가 영화나 대중들이 아는 것 처럼

‘김일X 모가지 따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임.

다들 북파공작원이라하면 딱 그것만

떠올리는데는 영화나 정보의 부족 때문이라 생각함.

물론 그것이 당시 가장 큰 주된 임무라고는 함.

투항군인으로 의심가는 인물이 있다라는 정보를 캐낸 것이

그 당시 국정원 혹은 기무사 같은 기관이었겠지.

임무를 받고 예상되는 투항날짜 보다 앞서 도착한 뒤

꼬박 닷새를 기다리셨는데

때마침 겨울이고 동면하는 개구리들이 심심찮게

발견되 든든하진 못해도 허기를 조금 달래실 수 있었다함.

굉장히 익숙한 지역이라고 생각하시던 찰나

투항군인을 발견하셨는데

선임돼지 포함한 5명이 학익진처럼 포위망을 구축 후 따라 붙어

생포하는데 결국 성공했다함.

그 다지 쓸 만한 내용이 없는 게

발견 후 간단한 신호 후에

가파른 지대를 전력질주하셔서 대검을 투척하신 후 생포 하셨다함.

아슬아슬 했던 것은 조금만 더 시간이 지체됐으면

그 투항군인이 내통하던 북괴군들과 교전이 벌어졌을 거란 것.

소총 사용은 소음이 심하고

야간시에는 적들이 더 잘 듣기때문에

대검을 허벅지에 먼저 투척 후 소총으로 위협.

사살은 당시 선임돼지의 결정에 의해 생포를 했다함.

작전은 성공했고

복귀 후 밝게 웃는 선임돼지를 본 게 처음이었다하심.

(투항군은 인근부대로 인계된 뒤 압송된 것으로만 알고계심.)

교관이었지만 그 역시도 집에가지 못 한 돼지들 중 한 마리였을 뿐이었고

그렇게 작전 성공 후 아버지와 막역한

선,후배 돼지가 됐다 했지만…

아쉽게도

두 번째 작전 나가시고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리워하던 고향땅과 어머니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셨음.

두 번째 작전 썰은

실제로 군사경계선을 넘어 북한에서 교전 탈출한 썰인데

길기도 길고 지금은 도저히 더 못 쓰겠으므로 다음에 씀..

딱히 잘 쓴 것 같지는 않은데 북파부대에 대한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거나 관심있으신 분들께는

필자가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라도 말해주고 싶었음.

앞 전에 쓴 썰처럼 누군가는 믿어줄거고 누군가는

주작으로 볼 수도 있는 썰임.

증거대봐라 하면 저는 할 말이 없음…

칠순이 낼 모레인 아버지와 대면시켜드리는 것 말고는ㅋㅋ..

긴 글 읽어줘서 고맙고 연휴에도 나라지켜주는

우리 국군들 진심으로 감사함. 9럼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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