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집에서 아침 먹고 담배 피러 나가는데,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서서 문이 열리는 순간,
문 바로 앞에 웬 꼬마 냥이 한 마리가 뙇 하고 앉아 있는 겁니다.
대체 아파트 현관문은 어떻게 통과한 건지…
아무튼 그래서 슬쩍 피해서 나가려는데,
이 자식이 냥냥 거리면서 쫓아오더군요;;;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내려다보니까
녀석도 잠시 빤히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떨구더니 추워서 오들오들 떠네요.
차마 못 본척하고 갈 수가 없어서
도로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서 마눌님 모시고 다시 내려왔습니다.
마눌님과 함께 녀석 상태를 좀 살피다가,
얘 많이 배고파 보이니 사료 좀 챙겨 오라는 마눌님의 명을 받들어 다시 올라갔습니다.
저희는 고양이를 안 키우지만, 동생이 한 마리 키우는데,
동생이 가끔 여행이나 해외 출장으로 이틀 이상 집을 비울 때 저희 집에 데려와서 돌봐주곤 합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도 사료랑 모래, 심지어 화장실도 하나 있죠.
아무튼 그래서 사료랑 물 좀 챙겨서 다시 내려왔습니다.
녀석은 마눌님 앞에서 한껏 재롱을 뽐내고 있더군요.
무지막지하게 더러운 걸 보니까 길냥이가 맞는 것 같은데,
마치 집에서 키우던 애처럼 사람을 잘 따릅니다.
녀석은 가져온 사료를 게눈 감추듯이 해치우고,
저와 마눌님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얘를 어떻게 해야 하나…
이윽고 저는 ‘아 골치 아프다’는 말을 남기고 담배 피우러 나갔죠.
담배 피우고 다시 들어와보니
마침 아래층 영감님께서 출타하시던 중이었는지,
제 마눌님 옆에 합류해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영감님 말씀으로는 녀석이 전날 밤부터 거기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영감님 댁은 개를 한 마리 키워서 냥이를 데려가기 힘든 형편이지만,
녀석이 하도 딱해 보여서
어젯밤에 데리고 가려다가 녀석이 갑자기 도망치길래
에라 모르겠다 하고서는 그냥 가셨다고 합니다.
전날 밤부터 거기 있었다는 영감님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저와 마눌님은 아무래도 어미가 죽거나 잃어버린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그럼 얘 우리가 데려가야 하는 건가?”고 혼잣말처럼 물으니,
마눌님은 저만 좋으면 괜찮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고양이를 이뻐하긴 하지만,
키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동생네 냥이를 봐줄 때마다 늘 느꼈던 점이죠.
귀엽지만 키울 순 없다. 성가시다.
그래서 저는 또 ‘아 진짜 골치 아프네’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담배 피우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진짜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이걸 어떡하나.
다시 들어와봤더니 영감님은 가시고 웬 아주머니가 된장국에 밥 말아서 들고 내려오십니다.
우리보다 조금 먼저 녀석을 봤는데, 안돼 보여서 밥이라도 주려고 하셨다고…
그러더니 자기가 데려가고 싶지만 집에 초등학교 다니는 애가 비염이 심해서 힘들다는 변명과 함께
우리 부부더러 ‘키워라~ 키워라~’를 시전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또 ‘아이고 골치야’라는 말과 함께
도로 나가서 또 담배를 피웠습니다.
문제는 날이 춥고, 녀석 상태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정도로 안 좋아 보였다는 것입니다.
감기에 걸렸는지 재채기도 하더라구요;;; 며칠 굶었는지 삐썩 곯아 있고요.
이윽고 그냥 내버려두면 며칠 내로 죽을 것 같은데,
그러면 두고두고 생각나서 제 머리를 아프게 할 것 같으니,
일단 데려가서 살려주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차에 태워 집 근처 동물병원에 데려갔습니다.
갔더니,
원장님이 애 상태 보시고는,
일단 감기에 걸린 게 맞고, 영양실조 기가 조금 있으며, 코 밑에는 곰팡이까지 약간 생겼다고 하시네요.
그리고 이대로는 2~3일 내로 죽을 수도 있었다고 하십니다.
2개월 좀 안된 암컷이라고 하구요.
그리고 몹시 더러운 상태에 비해 다행히 진드기 같은 건 없다고 합니다.
아무튼 어어어어 하다가 녀석을 키우게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원장님이 이름은 뭐라고 지을 거냐고 물으시더라구요.
저도 모르게 ‘골치요’라고 답했습니다.
원장님이 잠시 그윽한 눈길로 저를 보시더니
장난치지 말고 다시 생각해서 이쁜 이름 지어주라고 꾸짖으시네요;;;
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는가,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마음속에 한을 품은 채 동물병원을 빠져나와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저희 집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동생네 냥이가 마침 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저께 또 데려왔거든요;;;
녀석은 이제 두 살 정도 된 굉장히 덩치 큰 수컷입니다.
근데 녀석이 새로 온 동생을 보고 엄청 경계하더라구요.
으르렁거리고 하악질 하고 난리도 아닙니다.
마눌님은 과거에 고양이를 여럿 키워본 경험이 있어서,
원래 저러는 거고 친해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일단 큰 바구니에 새로 온 골치를 넣어두고,
동생네 냥이가 천천히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더군요.
심한 경우는 며칠씩 걸리기도 한다네요;;;
그래도 동생네 냥이가 워낙 성품이 좋은 녀석이라,
다행히 때리고 할퀴고 하지는 않았고,
반나절 정도 지나니까 아주 가까이 오지만 않으면(약 50cm),
심하게 경계 하지는 않더라구요.
다만, 새로 온 녀석은 눈치가 없는지,
그리고 처음 보는 동생네 냥이가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만 동생네 냥이한테 다가갑니다.
동생네 냥이가 하악질 하면 멈추고,
또 조금 있다가 다가가고,
또 하악 하면 멈추고,
이거 무한 반복입니다…
아무튼 동생네 냥이도 하악질만 하고 공격을 하지는 않아서 다행입니다.
뭐 새로 온 녀석이 워낙 작아서 자기 덩치의 1/4 정도밖에 안 되어서
자기한테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녀석이 새로 온 골치한테 다가가지는 않지만,
큰 탈 없이 점잖게 있어줘서(무시하는 듯합니다),
그래도 밤에는 평화롭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정말 긴 하루였네요.
아, 생각지도 못하게 본격적으로 냥이를 키우게 될 줄이야…
그넘의 담배를 진즉에 끊었어야 했는데… ㅠ
두번째 글
아픈 꼬마 냥이 한 마리 줍했다고 글 올렸었는데요.
전혀 마음의 준비 없이 입양하게 되서 멘탈이 반 너머 나가 있던 제게 많은 분들이 격려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냥이 상태 궁금해하시는 댓글들 달아주셨는데요.
짤막한 경과 보고 드립니다.
오늘 아침에 억지로 시간 내서 다시 동물병원 데리고 가봤습니다.
많이 건강해졌다고 하네요.
몸무게도 1.38kg에서 불과 사흘만에 1.68로 늘었습니다.
뭐, 그럴 줄 알았습니다. 엄청 잘 먹고, 잘 싸고, 잘 놀았거든요;;;
감기도 거의 나았고, 눈이랑 코밑에 약간 염증이 있어서 항생제 주사 맞췄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름은 원래 제 골치를 아프게 한 탓에 ‘골치’로 지으려 했으나,
동물병원 원장님의 준엄한 꾸짖음 탓에 마음을 고쳐먹고,
‘쥬비’라고 지어줬습니다. (줍 -> 주비 -> 쥬비)
원장님이 이 이름을 엄청 좋아하시더군요.
혼잣말로 계속 ‘쥬비? 너무 이쁜데… 쥬비..? 너무 괜찮은데?” 하시더라구요. ㅋㅋㅋ
아무튼 녀석은 잘 지냅니다. 어젯밤엔 목욕도 시켜줬어요.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잘 따릅니다. 난처할 정도로요;;;
사실 마음 한 구석에 아직 탐탁치 않음이 남아 있는 제 정을 억지로 삥뜯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