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노량진 고시원에서 남기는 “5수 실패 후기”

  • Post author:

미리 말하지만 이 글은 성공 수기 같은게 아니야. 

이거라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억지로 뭔가 붙들고 남겨두는 글이다. 

이런 글이나마 붙잡고 뭐라도 남기지 못하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쓴다.

오수가 끝난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네. 

지금 나는 노량진의 좁은 고시원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하루 한 끼나 겨우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 억지로 잡고 버티듯이 살고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아무것도. 

이런 글이라도 써서 누군가가 괜찮다고 그래도 실패한 삶은 아니라고 댓글이라도 달아준다면 좋겠다. 

난 모든걸 다 잃었거든.

나는 경상남도 통영에서 살았다. 집 앞에서 조금만 걸으면 한려해상 국립공원이 있고, 

칠이 벗겨진 1층짜리 건물들 사이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솟아있는 작은 동네에 우리 집이 있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우리 남매가 먹을 아침을 간단히 준비해놓으시곤 중앙시장에 나가셨다.

늦은 밤 앉은뱅이 책상에서 진전없는 공부와 씨름하고 있을때쯤이면 

어머니가 돌아와 다리와 허리에 파스를 붙이고 앓으며 주무시곤 하셨다.

그래서인지 국어 기출에 나오는 ‘진주 장터 생어물전’을 소재로 한 그 시를 볼 때마다 나는 우리 집이 떠올랐다.

고3때까지, 내 나름대로 열의를 다해 공부했다고 생각했다.

 그럭저럭 전교에서 10~20등정도를 유지해가면서, 시골에서 나름 공부 잘하는놈 소리를 들어가며 살았고, 

작은 동네에서 소박한 사람들에게 소소하게 인정받고 사는 그런 삶이 뭐 그리 싫지도 않았다.

나는 중학교는 창원에서 나온 터라, 농어촌 특별전형 대상자가 아니었고, 

입시가 끝난 후 경상대학교에 진학했다.

그게 끝이었다. 나는 더 큰 세상에 대한 아무런 자각도 없었고 

그저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내 노력한 댓가만큼의 학교로 향했다.

학교 생활은 순조로웠다. 중고등학교 내내 급우들과 단 한번의 트러블조차 없이 무난하게 졸업한 성격이라 과에서도, 

동아리에서도 나는 환영받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스무살의 3월 한달을 아름답게 피웠다.

동아리에, 의예과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서울 태생이었고, 자사고를 나왔다.

살아온 환경은 다르지만 마음이 맞는데가 있어 금방 친해졌고, 

4월 초에 며칠간 같이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눠봤다.

서울에서 열아홉살까지 보낸 그 친구의 말에는 정말 당시의 어린 내가 느끼기로

‘도시의 활력’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아직도 뭐라 표현하기가 버거운 그 느낌은 꼭 첫 여자를 품었을 때 느끼는 그 신비감에 비할만큼 이상야릇했다

밤 열한 시쯤 시작한 대화가 동틀 무렵에나 끝났는데,

해 뜨기 전 파란색으로 물든 새벽 특유의 감성이 더해지면서 나는 살면서 거의 최초로 이상한 무력감을 느꼈고, 

지금까지 내가 전부라고 믿고 살아온 내 생활, 

내게 만족과 평온을 주던 내 생활의 소소한 요소들이 그저 닭장안에 갇힌 닭이 느끼는 만족감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회의감이 꽤 심하게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내가 그런 판단을(아니 사실 판단이 아니다.. 그냥 직감에 따라 움직인거지) 

내렸는지 왜 갑자기 삶의 방향을 틀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때의 내 선택은 그냥 이렇게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스무살을 거쳐서 이제 나이가 꽤 있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도 있을 거다. 

그쯤 느끼는 이상한 자신감과, 생활에 대한 뭔지 모를 답답함, 

막 뿜어나오는 체력에서 비롯된 열정이 만드는 이상한 환상.

누구나 다 한번쯤은 겪어보지 않았을까…싶다. 그 환상을 어떤 지도라고 하자.

그 지도의 내용이란게 대개는 상당히 모호해서 

우리는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불나방처럼 어디에든 그렇게 맹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술이든, 여자에든, 학업에든, 음악에든. 

그 무렵에 느끼는 환상은 분명 우리를 그렇게 무엇 한가지에 몰두하여

미친듯이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 있다.

적어도 스무살때는 나 뿐 아니라 모두들 한 번쯤은 그 이상한 환상과 열정을 겪어봤을거다.

하지만 또 그땐 모른다, 

순간에 확신에 이끌린 감정적인 선택이 한 사람의 삶을 어느 지경에까지 파탄으로 몰아갈 수 있는지를.

나는 재수를 원했고, 당연히 부모님은 결사반대 하셨다.

그렇게 몇 주간의 전쟁이 지속된 끝에 나는 결국 학교를 더 안나가고,

마침 부모님께서 자취방을 내 명의로 계약해 두신게 생각나서 

집주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취방 보증금을 빼서 그냥 아무 대책없이 서울로 왔다.

수능 기출에 보면 이런 지문이 나오지.. ‘결과적 운’

똑같이 성공하겠다는 욕심으로 가족을 내팽개치고 떠난 두 명 중 한 명은 

결국 성공하고 한 명은 실패했을 때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후자를 더 비난하지만 

그건 옳은게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똑같이 비난받아야 한다고.

그런데 실제로도 진짜 가끔 성공한 연예인들이나 재벌들이 인터뷰에서 말하잖아? 

부모님 몰래 상경해서 이뤘다고. 부모님 몰래 부모님 재산을 들고 서울로 상경해서 

결국 그 좁은 서울바닥에서 온갖 고생 다해가면서 이뤄냈다고. 

그러면 누구나 대단하다고, 성공할만 했다고 치켜세워주잖아? 

근데 똑같이 부모 몰래 상경해서 실패한 사람은? ‘천하의 호로새끼’ 외의 취급을 기대하기 힘들다.

사실 어른들은 과정이 중요하다고 많이들 속이는데 

물론 과정도 중요는 하지만 진짜로 더 중요한건 결과다.

결과가 쓰레기 같아도 과정이 아름다우면 그걸로 됐다고 자기위로 하는 사람들은 

사실 ‘진짜 처절한 결과’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거나,

본인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스스로마저 완벽히 속일 수 있는 사람일 뿐이다.

아무튼 그 보증금으로 노량진 외곽에서 월 32만원짜리 고시원을 잡고, 

주말에는 이투스타워 1층 미니스톱에서 알바를 하면서 재수를 시작했다.

앞서도 썼듯이 나는 통영에 작은 고등학교라는 우물 안에서는 

그래도 공부를 꽤 잘하는 축이었고, 어느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정말 무난무난한 인생을 살아왔었고

이 출가가 내가 벌인 거의 최초의 큰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하루하루 숨죽여가며 공부만 했었다.

한 6월쯤 되니까 집에서 먼저 연락이 와서, 통영에 하루 내려가서 

가족들과 부둥켜안고 울고 불고 어머니는 “미안하다.” “니 마음 몰라줘서 내가 무심해서 미안하다.”

그리고 못난 아들 재수 뒷바라지를 해주기로 하셨고 매달 생활비를 부쳐주기로 하셨다.

매일 고시원ㅡ 자습실만 오가는 생활에서 나는 새로운 인연은 하나도 만들지 못했고

그나마 서울에 상경해서 동국대 다니던 친구가 하나 있어서 

한달에 한두번 남짓 그 친구 만나서 이얘기 저얘기 털어놓는게 내 재수생활의 유일한 낙이었다.

정말이지 외로움에 죽을 수도 있겠다고 느낀 나날들이었다.

길게 끌어서 얘기할것도 없다. 결국 재수는 실패했고 삼수를 하게된다.

삼수를 하면서까지 집에다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새벽같이 중앙시장에 나가 밤 늦게까지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께 더이상 짐이 되기는 싫었다.

또 그것만큼이나 어머니가 아들놈 걱정하면서 가슴앓이 하는 것도 싫어서

그냥 어머니께는 노량진에서 학원 보조로 일한다고 둘러대고

재수 수능이 끝난 그날부터 다음 해 4월까지 안산쪽 공장에 들어가 천만원정도를 모았다. 

공장 생활은 솔직히 끔찍했다.

관리자 급들은 입에 개x끼 씹x끼를 달고살았고, 짬좀 차면 장부같은걸로 툭툭 치는것도 다반사였다.

그래도 난 한마디도 뻥긋 않고 참아냈다. 당장 어떻게든 돈을 모아야 하니까. 

여기서 싸우고 나가서 며칠을 놀면서 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고, 

거기서 다시 목표액을 채우는데까지 걸리는 딜레이가 두려워 스스로의 존엄마저 포기할만큼 내 꿈은 절실했다.

같은 기숙사 형들은 죄다 머릿속에 유흥과 토토밖에 없는 사람들이었고 내가 그런거 물들기 싫어서 적당히 거리두려하니까 어느새 말도 안걸고 정치질하면서 은따 시키더라. 

그렇게 4월까지 꿈 하나만 생각하며 지겹도록 공장일 버텨서 모은 천 백 얼마.

그걸로 단과 하나를 신청하고 나머지는 고시원비랑 생활비로. 밥은 고시뷔페에서 20개씩 식권 끊어서 맨날 그것만 먹고

고시원도 완전 외곽에 있는 28만원짜리로 옮겼다. 화장실 샤워실 공용인 열악한 곳으로.

거기서 다시 삼수를 시작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이렇게 간단한 두 문장으로밖에 요약이 안된다.

서울에 있는 유일한 친구마저 군대에 가버렸다. 

나는 매일 밤마다 좁은 고시원방에서 나를 조여오는 외로움에 제대로 숨쉬기조차 힘들었고

그 외로움은 무기력증 등등 각종 정신 증세로 이어졌다.

고시원 방에 가만히 누워 끼니도 거른 채 며칠을 천장만 보고 멍하니 누워있기도 했고 

밤마다 찾아오는 외로움이 싫어 무작정 나가 사육신공원을 배회하다 돌아오고, 

그런 와중에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눈물도 안나올 지경으로 외롭고 무기력해져서 통영으로 돌아갈까 다 접고 돌아갈까 수십번을 고민하면서도

어떻게 어떻게 이악물고 스스로와 싸워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공부를 시작한 그게 9월.

결과를 유의미하게 바꿔놓기엔 너무 늦어버린 시기였다.

그래도 공부를 하고있는 동안만큼은 그 미칠 것 같은 외로움이 덜해지더라. 

그래서 나는 오히려 살기위해서, 

그 우울함과 무기력함에 빠져 죽지 않기위해서 이미 실패할게 뻔히 예정된 공부를 그토록 처절하게 붙잡았던것 같다

그렇게 힘겹던 삼수도 끝났고, 나는 다시 안산의 공장으로 돌아갔다.

성적은 재수때보다도 더 처참했다. 

나는 통영에 한번 내려오라는 어머니의 권유도 뿌리치고 그렇게 공장으로 갔다.

여동생은 울면서 이제 그만하라고 제발 그만하라고 나를 말렸다.

나는 뿌리쳤다. 통영에 가지 않았다.

통영에 한번 내려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것 같았다

내가 꾸던 꿈은 다 끝날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시골에서 대학 졸업하고 시골에서 별볼일 없는 직장을 구해서 별볼일없는 삶을 살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은 그 시골에서의 소박한 삶이 결코 별볼일없는 삶이 아님을, 

내 실현가능성 없는 욕심이야말로 진정 별볼일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2년이란 시간이 더 걸렸다.

내 욕심하나가 다 망쳤다.

능력밖의 욕심의 댓가로 내 가족이 떠안은 정신적, 물질적 짐의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았다는걸, 

결코 가볍지 않다는걸 이제서야 느낀다.

그렇지만 항상 무언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나면,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있더라.

공장에서 다시 노량진으로 돌아온건 4월이었다. 외로움에 지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스터디도 구하고, 

단과 사람들이랑도 먹을거 건네주면서 몇명이랑 말을 트고 지냈다. 

중후반 쯤에 퍼지는게 싫어서, 헬스장 다닐 여유는 없어도

매일 아침마다 사육신공원에서 운동도 했다.

사수는 어느정도 순조로웠다. 어느정도 해온게 있어서 그런가 모의고사도 잘 나오고,

서울에서의 새로운 인간관계에도 차차 적응해 나가면서 생활부터 안정화시키고 수험생활을 했다.

그렇게 이번엔 다를거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시험장에 갔다.

국어는 평소에도 제일 자신있던 과목이었고, 

재수때부터 딱 한번(삼수 수능)을 제외하고 항상 백분위 96~100이 나오던 과목이라 

별로 걸리적거림없이 풀었다. 부호화 문제 하나에서 잠깐 멈칫했던거 말고는 잘 풀었고, 

시험이 끝나고 100점을 확신했다.

수학은 21 27 패스하고 29번까지 풀고 나서 시계 보니까 

11시 30분. 그리고 20분동안 21번 풀고, 27번 붙잡다가 끝났다. 27번은 끝까지 못풀었다.

점심시간에 싸온 편의점 샌드위치 두개 먹고, 담배 한대 피는데 올해는 정말 다를거같다는 느낌이 왔다. 

결국 수학 두 문제나 못풀었지만 시험장 체감난이도가 있어서 그런가 난 그 시험 1컷 88로 예상했거든.

영어는 상대평가 시절 짬도 있고, 무난하게 풀었다. 다 풀고 10분정도 남았다.

문제는 과탐.. 2페이지부터 턱턱 막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첫 시간 종료 5분 전인데 4문제나 남아있었고, 전부 찍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멘탈관리라도 잘했으면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난 그러지 못했고 결국 두번째 과목마저 머리가 하얘져서 푸는둥 마는둥 끝나버렸다

시험장 나와서, 열시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침대에 엎드려서 흐느끼다가 

몸이 너무 피곤했는지 잠이 들었다. 근데 채점도 안한 상황에서 잠이 제대로 올 리가 있나… 

두시간 자다 깨고 또 한시간 자다 깨고 반복하다가 결국 채점 시작.

국어는 어이없게 문학에서 하나 나가고 98점

수학은 예상대로 27번 30번 빼고 다 맞아서 92점

영어는 100

한국사 44

물리1…..35

지구과학2… 41

통영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안산 공장에 다시 가지도 못하고,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멍하니 누워서 보냈다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기혐오가 뻗쳐오르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전부 부정 당하는 무력감에 밖에 나가기조차 힘들었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누구의 연락조차 받지 않았다

그냥 고시원 좁은 방안에만 누워있었다

그냥 고시원 방 안에만..

결국 어머니가 올라오셨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올라오셨다

거의 반 죽음상태인 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통영에 돌아와서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만날 수가 없었다

중고등학교 친구들, 경상대 동기, 선배들, 동아리 사람들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방 안에 시체처럼 누워 희망없는 하루하루를 좀먹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의 모 대학에 원서를 썼고, 합격했다.

별로 생각조차 해본적 없는 학교였다.

오티도 가지 않았고, 새터도 가지 않았다

내 사수라는 노력이 고작 그런 결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리석게도

정말 어리석게도 나는 그렇게 과에서 고립을 자처했고, 최소 학점 외에는 모두 드랍하고 다시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6평이 어려웠다. 나름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수학이 2등급이 나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다시한번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했다. 

2학기 등록금으로, 등록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노량진의 고시원 방으로 돌아갔다.

다시 거기서 매일 밤을 울고, 

낮이면 지친 몸을 이끌고 어떻게든 공부를 하는 지옥같은 생활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넣었다

그리고 수능을, 완전히 망쳤다

삼수때의 성적보다도 더 철저히 망쳤다.

아무런 이유조차 없이 그렇게 망쳤다.

이제는 왜? 라는 물음조차 떠올리지 않는다

왜? 여기에 이유는 없다

능력 밖의 꿈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던 댓가로 나는 청춘을 제거당했다

정말 분한건, 이렇게 괴로우면서도 난 누구 하나 탓할 수조차 없다는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으로 망가뜨려버린 인생이니까.

별 거 아니라고? 다 극복할 수 있다고? 정말 누군가 함부로 그렇게 말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내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잠깐 감정에 취해서 내뱉는 술자리의 한탄같은것으로

치부하며 내뱉은 위로는 차라리 모욕보다도 견디기 힘들다.

봐라, 이따위 새끼도 이렇게 연명한다.

나는 꿈을 내세워가며 부모의 생선비린내어린 돈을 훔쳐 상경을 했고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들을 신기루만 쫓다 날려버렸고

가족과 내 스스로에게 도저히 치유될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몇 번을 그랬음에도 난

보잘것 없는 능력이란 진실을 마주할 용기도 없어서 계속 ‘한 번 더’ ‘한 번 더’하면서 수능으로 도망만 치고 살았다

이렇게 비겁한 놈도 이렇게 연명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 글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하찮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누군가는, 아니 사실상 절대 다수는 결국 패배하도록 설계된 이 시험에서,

절박한 노력이 좌절당한 당신들 개개인의 고통과 상심이 얼마나 클지는 

내가 감히 상상하고 다가가 위로할 수조차 없을 정도라는거 잘 안다.

그럼에도 매년, 새로운 수험이 시작될 때면 여러분들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여러분은 결국 노력한 만큼의 결실을 거둘 것이라고

혹은, 사실 여러분의 능력은 여러분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날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교육을 팔아 연명하는 강사에게서든, 혹은 자기 자신에게서든 

그런 거짓말을 원동력삼아 하루하루의 힘겨운 수험생활을 버텨갈 수밖에 없음을

그런 믿음마저 없으면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게 이 수험판임을 나는 안다.

지금 어떤 결심을 했든, 잘 헤쳐나가길 바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완전히 비어버려서, 수능은 커녕 하루하루의 삶을 지탱해 나갈 기본적인 동력조차 없다.

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뜨기조차 힘이든다. 

이렇게 힘든 와중에도 하나 확고하게 결정내린 것은

더이상 이 정신나간 짓거리를 반복하지는 않겠다는거.

내가 계속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럴 수 있을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더이상은

이제는

정말로

환상에서 깨어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