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2013년.
고등학교에 갓 들어온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존나 먼 문돌이 깡통새끼였다.
그렇다고 존나 잘 놀고 잘 나갓느냐.
하루종일 폰으로 사다리 타고 집에 와선 밥 쳐먹고 게임만 죤나 하던 찐따였음 ㅋㅋ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서울시 마포구에 있던 인문계 고등학교였다.
이 고등학교는 성적순으로 E-D-C-B-A로 분반을 나누는데
A반으로 갈수록 에이스반이었음.
점심식사도 공부 잘하는 분반순으로 먹였는데
11시즘 하여 A반 배식에 들어가고 1시가 넘어서야 E반 개버러지들이 밥을 풀수가 있었다.
근데 아무래도 맨 마지막에 먹게 되는 E반은 주로 오토바이 타고 등교해서 밥먹고 집에 가는 X신들과 각종 쌉꼴통 새끼들
혹은 나같이 존나 멍청했던 찐따들이었는데
A반부터 C반까지 이미 맛있는 에이스 고기반찬 싹 털어가고 나머지 좃밥 분반들은 대부분 김치에 밥만 쳐먹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영양사 아주머니랑 식판 던져가면서 1대1 뜨는 미친 상또라이새끼들도 있었음 미친새끼들 ㅋㅋㅋㅋ
하여간에 나는 1학년때 당연히 존나게 멍청했던 머리로 당연히 수학 E반 영어 B반 (도피유학 다녀와서 영어는 할 줄 알았음) 배정받았는데
문제가 E반에 온 수학교사가 교단에 선지 30년이 훌쩍 넘은 틀딱 선생이리라는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군대에서 장기 노리다가 장병들을 하도 줘패서 조기전역 당하고 수학교사 임용시험 치고 통과해서
갓 들어온 28살 군기를 넘어서서 독기가 바짝 든 백동수 라는 미친놈이었다.
원래 인문계 공립고등학교 교사들이라는 새끼들은 안하려는 새끼 굳이 붙잡고 하라고 앉혀놓지 않는다.
할려는 새끼들 붙잡고 존나 굴려서 SKY 보내는 것도 사실상 될까말까인데
안하려는 좃밥새끼들까지 케어 하는게 사실상 가능하기는 하겠냐.
거기다가 우리때는 막 학생체벌금지 이런거 생겨서 안그래도 짐승새끼들이던 고등학교 금수새끼들에 그나마 걸려있던 목줄도 풀리던 시절이었다.
근데 백동수 이새끼는 달랐다.
다른게 아니라 백동수는 ‘그런거 모르겠고 일단 조지다가 나중에 걸리면 그만 두지 뭐 ㅋㅋ’ 이정도의 생각이었던거 같다.
이새끼가 항상 하는 말이 ‘교사는 공무원이 아니야.
나는 이 직업으로 연금 타먹을 생각이 없다.
니들은 뒤졌어.’ 이거였는데
진짜 말 그대로 무지막지하게 뒷날 생각 안하고 우리들을 미친듯이 조져놨었다.
줄빠따는 기본에 주말 지나고 월요일에 등교하면 숙제를 해와도 긴장하자고 빠따 2대씩 맞고 들어가고
무슨 뭐 한강철교? 원산폭격? ㅅ.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체벌을 종류별로 경험해봤고 다나까체 말투를 처음 써보게 되었다.
당연히 개꼴통 일찐새끼들은 반항 존나 했지.
신고한다고 협박도 했고 고소한다고 소리 지르고 뛰쳐나간 븅신도 있었는데
결국 다 굴복했다.
왜? 이 새끼는 진짜로 교직에서 쫓겨나도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았어.
심지어 어느정도였냐면 담임도 아닌 새끼가 E반 학생들 집에 일일히 다 찾아가서
‘어머님. 제가 우리 OO이를 사람답게 만들어주는데 동의해주십시오.
제가 기필코 제 목숨을 걸고 우리 OO이를 어느 집 아들 부럽지 않은 훌륭한 학생, 훌륭한 인간으로 만들어놓겠습니다. 부디 이 동의서에 사인을 해주십시오.’
이랬는데 그게 학생 체벌 동의서였다.
그때 느낀 배신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부모님이랑 한달 넘게 말 한마디도 안했었다…
책을 안 가져오면 일단 반 죽여놓고
옆자리 애랑 같이 책을 보게 했고
필기구가 없다하면 지 돈으로 연필을 한다스를 사와서 나눠주면서 잃어버리면 죽여버리겠다고 하고
숙제를 안해서 집에 놓고 왔다고 구라치면 지 돈으로 버스비 주면서 오늘 수업 끝나기 전에 숙제 못가져오면 그냥 그길로 집 가서 푹 쉬고 내일 향냄새 맡을 준비 하고 오라면서 으름장을 놓았음.
이렇게 E반의 모든 일찐부터 찐따까지 모두를 개패듯이 조져놓으니까 ㅆ발 일찐과 찐따 사이에서 정말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던 전우애가 생기게 됐다..
필기구를 깜빡하고 안가지고 오면 일찐이 찐따한테 몰래 모나미 볼펜을 하나 빌려줬으며
일찐이 코노 갔다가 숙제를 안해오면 찐따의 도움으로 숙제 베끼기를 하게 됐다.
별 ㅆ발 상상도 못할 조합이 E반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백동수 이 무시무시하던 새끼는 안 따라가려고 발버둥 치는 놈이 있으면 죽여패버려서 진을 빼놓고 끌고갔고
못 따라오는 X신이 있으면 머리채를 쥐어잡고 몇번씩이나 질리지도 않으면서 원리를 설명하고 졸면 빠따치면서 강제로 끌고 가는 그런 선생이었다.
그렇게 처음 맞는 중간고사.
우리 학교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의 성적을 반영해서 한 학기마다 분반의 등급이 달라진다.
당시 E반 처음 들어올때 우리 X신들의 평균 수학 점수는 무려 17점이었다.
9등급권이었던 것이다.
백동수는 중간고사가 다가오자 신발을 구두가 아니고 군화를 신고 오기 시작했다.
중간고사 조지면 우리를 찢어죽이겠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양아치가 담배를 끼우던 손가락 사이에는 모나미 볼펜이 끼워져 있었고.
내 손엔 사다리 타면서 돈십만원씩 꼴고 게임만 하던 스마트폰 대신에 수학교재가 들려있었다.
정말 진짜 뒤지기 싫어서 공부한다는게 뭔지 아냐? 나는 안다.
그렇게 중간고사 수학시험 결과가 나왔고
고등학교 처음 들어와서 쳤던 측정시험에서 수학점수 26점이 나왔던 나는 생전 처음으로 수학 50점대를 맞아보았다.
수학시험 반타작은 나에게 있어 정말 큰 의미였다.
내가 살아생전에 도달해볼 수 있을까 하던 경지였던 것이다.
우리 부모님도 정말 기뻐해주셨고 졸지에 내 카톡에는 잘생기고 잘나가던 일찐들이 친구로 추가되어있기까지 했다.
그렇게 기말고사까지 여전히 뒤지게 맞고 구르면서 점수는 조금씩 올라갔고 2학기가 시작되었을때 나는 수학 C반까지 올라갔다.
그때 나의 가장 기뻤던 점은 내가 C반으로 승반을 했다는게 아니고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백동수의 손아귀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한켠으로는 나를 이렇게까지 성장시켜준 백동수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면서
끝이라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E반 37명중 36명을 윗반으로 승반시킨 백동수는 그 실력을 인정받아 내가 올라온 C반으로 같이 쳐올라왔다.
C반과 B,A반의 갭이 가장 컸기 때문이었다.
이런 개 씨팔 진짜
한순간이나마 들었던 고마운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졌고
1학년 2학기 처음 듣는 수학시간때 나의 눈은 점점 죽은 생선눈깔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