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했던 막내 여동생이 워마드에서 고소를 먹은 걸 알게 된 오빠

  • Post author:

이 글을 올리기로 결심하기까지 고민을 꽤 많이 했었다.

어딘가 하소연은 하고싶고, 이 황당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는데,

쓸곳이 여기밖에 없다는게 아이러니했다.

내 페북이나 인스타 같은곳엔 썼다가 쓸데없이 주작이라면서 메갈 웜 애들에게 시비걸릴 생각이 들어서 싫었고.

우리 아버지는 지난 7월 30일에 돌아가셨다.

가족들이 집에 아무도 없을때, 혼자 TV보시다가 돌아가셨다.

지금도 어안이 벙벙하고 믿기지가 않는다.

일단 우리집은 3남매다. 내가 장남이고, 밑에 두살 어린 남동생이랑, 나와 나이차가 8살이 나는 여동생이 있다.

사실 나에겐 누나가 있었다. 나랑은 여섯살차이였다.

나이차가 있다보니 정말 나를 많이 챙겨주고 이뻐해줬었고.. 누나한테는 좋았던 기억밖에 없다.

다른 형제들처럼 누나와 싸워보거나 대들어본적도 없다. 누나는 매일 나를 안아주고 뽀뽀해줬고..

아이스크림주고 과자 주고, 시험공부하느라 못놀아줘서 미안하다고 해주던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우리 둘째도 마찬가지다.

더 애기였으니까 누나가 더 이뻐했었다.

그런 우리 누나가 중학교 1학년때, 학원앞 뺑소니 사고로 하늘나라로 갔다.

엄마가 가슴 쥐어 뜯으면서 울던 기억.

우리 아버지 자동차 정비소 반장이셨는데, 갑자기 상태가 위급해져서 일하시다말고 기름때낀 작업복 입으신채로

뛰어 오셔서 누나 임종도 못보시고 주저앉아 우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장례식장에서 엄청 우시면서도 나랑 둘째한테

“누나 하늘나라가서 아프지말라고 인사해줘야지” 하시던 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성실하고 열심히 사셨던 분이었다.

겨울이면 어머니 핀잔에도 호빵을 한가득 사오셔서 누나랑 우리 형제들이랑 같이 나눠먹고..

마당에서 눈사람 만들고 같이 놀아주시던 다정한 아버지였다.

누나 죽기전엔 내가 너무 어려서였기도 하지만

누나가 죽은 뒤로도 우리 형제들에게 큰소리 한번 내신적 없고, 혼내신적 없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차에 치여 누나가 죽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평생 배워오시고 자격증을 가진 자동차 정비업을 더이상 하시지 못하셨다.

차를 미워하셨고, 차타는걸 싫어하셨고…

그래서 직업도 바꾸셨다.

친척 따라다니면서 금팔고 매입하는거 배우시더니,

작은 금은방을 하시게 됐다.

한번은 도둑을 크게 맞아서 큰 손해를 입으신적도 있지만.

큰돈은 못버셨어도 우리 다섯식구 굶은적 없고, 비싼 과외 학원은 못다녔어도 학교다니는데 어려움 없었다.

비싼 옷 비싼 신발은 사기 힘들었지만, 나랑 둘째는 왜 아버지께서 그런 인생을 사시게 됐는지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아버지 원망을 해본적이 없었다.

막내는 누나가 죽고 난 다음에 태어났다.

부모님들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누나가 그리워서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돌릴 딸이 필요해서였을것 같진 않다.

하지만 여동생이 생겨서 우리 형제는 너무 좋았고,

누나 죽은뒤에 항상 우울한 우리 가족에 생기가 돌아서 좋았다.

나는 누나가 나한테 해줬던것처럼 동생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정말 우리 막내 위해서라면 내가 안해본것이 없었다.

나랑 둘째는 중학교 다닐때 같이 알바를 해서 막내 생일에

리복 퓨리를 사준적도 있다.

동생은 좋은 신발 신고 학교 다녔으면 좋겠단 생각이었다.

옷.. 노트북.. 핸드폰.. 때마다 좋은것이라면 다 베풀었다.

한번도 동생 혼낸적도 없고, 동생에게 욕해본적도 없고, 화내본적도 없었다.

둘째도 마찬가지였고,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딱히 버릇없이 구는 행동들이 있다거나하지 않았다.

잘자라주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말썽피우는 일 없이 무난한 학생으로 잘다녀주고 있었다.

그러던 막내가 대학엘 가게 됐다.

이제와서 밝히자면, 나는 형제가 많은 우리집에서 모든 형제가 다 대학을 갈 수 있단 생각이 들지 않아서,

대학입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작은 인테리어 업체에 들어가 이런저런 막노동들 다 경험해보면서 밑바닥부터 일을 배우면서,

사무실에서 캐드랑 라이노, 스케치업 같은 프로그램들도 배우면서,

국비로 실내디자인 직무교육 받으면서 실내건축기사 자격증을 땄다.

독학사를 하면서 학위를 땄고, 지금은 조금 더 큰 인테리어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는 장남인 내가 학업을 포기한다니 가슴아파하셨지만,

나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꼭 공부 다 할테니 걱정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수능은 봤었고, 대학교 합격증도 받았었다.

인하대와 충북대학교에 붙었었다.

둘째에게는 형이 열심히 일해서 도와줄테니 공부 열심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둘째는 진짜 멋진 녀석이다.

정말 열심히 공부해주었고, 고등학교때 성적이 가파르게 상승해서 성적도 아주 높았다.

공군사관학교에 붙었고, 졸업해서 무사히 임관했다.

임관식때 우리 다섯식구 정말 행복했었다.

어머니 아버지 건강하셨고, 나도 직장에서 자리잡아 꾸준히 돈 잘벌고 있었고..

동생은 군인이 되었고, 여동생도 무난했으니까.

어쨌든 여동생이 대학에 진학해서 성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집에서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집에 고소장이 날아왔는데, 막내에 대한 일이니 급히 집으로 오라고.

동생의 학교는 서울이었는데, 우리 집은 청주였고, 동생 집주소는 옮기지 않아서 집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사유가 모욕죄였다. 그게 작년 가을의 일이다.

당연히 뭔가 착오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동생에게 물으니, 별거아닌 사소한 일로 비판적인 댓글을 썼는데, 그걸 누군가가 고소했다는거였다.

걱정이 되어 담당경찰과 통화를 했지만, 별거 아닌일이라해서 마음을 놓았다.

경찰이 아마 무죄 뜰거 같다고 말했는데, 진짜 그렇게 되었다.

그저 어쩌다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이라 생각했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더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번 더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똑같은 패턴으로 어머니께 전화, 그래서 난 또 막내에게 전화..

“너 굿이라도 해야겠다. 왜이렇게 자꾸 이런일이 일어나니 ㅋㅋ”

하면서 웃으며 전화했던 기억이 난다.

막내도 웃었었다.

하지만 이번엔 처음과 같지 않았다.

벌금형을 받게 되었고, 나는 대체 무슨 글을 쓴것이냐고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동생이 나에게 대든 건.

아버지 역시 너무 걱정이 되셨는지 동생에게 해당 글을 보여줄것을 요구하셨고,

여동생은 정말 완강하게 저항했다.

얼마나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지, 내가 알던 여동생이 맞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형제가 화를 내거나, 부모님이 화내시고 윽박지른일은 없다.

약간 언성이 올라갔을지언정, 그건 답답한 마음에 그랬을뿐,

‘아니 내용 좀 보자는 거잖아.’ 정도의 내용들이었다.

나는 동생이 대체 어떤 글들을 쓰고 다니는지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동생의 아이디와 비번은 쉽게 알아냈고, 네이버, 다음, 페이스북, 인스타…

전부 접속해 검색하고 작성글들을 찾아봤다.

특이할것도 없다.

여성시대, 하고 있었고.. 메갈리아 회원이었다.

당연히, 한남충, 애비충.. 유병단수.. 이런 메갈리아 용어들 다 쓰고 있었다.

아버지, 나, 둘째.. 이렇게 가정내에 ‘한남충’이 셋이나 있어, 자신도 모르게 코르셋을 입고 살았으며,

드디어 코르셋을 벗게되어 살것같다는 글을 봤다.

경제적 능력이 재기해서 무능한 씹치 애비충 때문에 힘들었다.

심지어 둘째 오빠가 군무새라 봊나 짜증난다. 집에 올때마다 군인냄새 때문에 숨이 막힐것 같다.

쎈척하는 말투 극혐이다..

이런 내용들.

나에 대해서는, 그냥 무능한 노가다충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손발이 벌벌 떨리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

그런데 웃긴건, 나는 그 순간에도 내가 대체 이 아이한테 뭘 잘못한건지 생각을 했다는거다.

무엇보다 아버지한테 애비충이라니. 이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생을 밖으로 불러내어 이야길 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글을 뒤져본 일, 허락없이 접속한 일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화를 냈다.

그에 대해서는 사과하겠다. 하지만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않느냐.

유병단수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화를 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미러링이라고, 그저 따라하기일 뿐이니 심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설명만 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고소장들이 날아오는 상황에서,

어떻게 오빠가 동생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둘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결국 둘째는 끝내 격분하고 화를내고, 동생을 심하게 질책했다.

당장 아버지께 사과드리고 사죄하라는 식으로 갔다.

군인이어서 그런지 더욱 참기 힘들어했던것 같다.

설날, 가족들이 다 모인곳에서 둘째는 그런 글들의 존재를 아버지 어머니께 알려드리고,

동생에게 부모님께 공개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결국 또 막내는 대들었다.

그 이후 메갈리아, 넷 페미니즘 같은 것들을 찾아보고 유심히 보게 되었다.

나는 오히려 동생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서, 비판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냥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나중엔 막내가 그러더라.

이쁘고 착하고 무난한 여동생이길 바라는 마음. 그게 바로 자기를 옥죄는거라고.

그래서 자기는 숨이 막힌다고 하더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형제들을 위해서 학업을 포기했다. 좋은 명문대학은 아니더라도 진학해서 캠퍼스 낭만을 즐겨볼 수도 있었다.

둘째는 막내가 사립이든 국립이든 선택의 자유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관학교에 갔다.

군인 되고싶었던 아이 아니었다. 공군사관학교 간것도, 집이랑 가깝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동생은 원래 광고홍보학 같은걸 공부하고 싶어했지만, 취업현실과 이런 학과들은 사립대들에만 있다는 이유로 포기했었다.

동생에게 좋은 대학을 가라고 강요하거나 부담준 사람들은 없었다.

막내는 학원도, 과외도 해봤다.

과외는 내가 붙여줬다.

대학 선택할때도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말한적 한번도 없었다.

너 하고싶은 학과, 너 하고싶은 공부하라고 말했던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나… 참담한 심정이었다.

둘째는 부대로 복귀했고, 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나는 이때 둘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게 안타까우셨는지 막내와 대화를 자꾸 시도하셨던것 같다.

아버지는 과거 사람이었다.

아버지 시대때는 ‘당연했던 것’들이, 막내 눈에 그렇게 안보인다고 해서,

아버지가 막내나 사회나 어머니한테 사죄해야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막내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을 가져야한다고 말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자기 인생이 없이 살아왔고, 아버지의 무능력 때문에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는 비판과 함께.

그때는 나도 너무 화가 났다.

동생에게 전화해서 이런저런 말싸움을 격하게 했던것 같다.

그래, 그럼 오빠가 죽어줘야하느냐. 아버지가 죽어야겠느냐. 둘째오빠가 군인을 그만둬야 하는거냐.

네 인생과 너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 세 남자가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줘야 되는거냐고 소리질렀다.

아버지는 결국 우울증이 오셨다.

여동생은 그날 이후로 주말이 되어도 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어머니와는 종종 전화통화를 했지만, 나와 둘째하고는 아예 전화나 카톡을 하지 않았다.

카톡은 차단을 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아버지의 우울증은 심해지셨다.

그러다가 7월 30일.

주말이 되어 나와 둘째는 모두 본가에 내려왔고..

집에서 TV를 보고계시는 아버지께서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셨지만, 나는 예삿일로 생각했다.

둘째가 축구화를 사야한다기에, 잠깐 동생과 나갔다오겠다하고 집근처 나이키 샵에 다녀온 길..

아버지께서 주무시고 계시는줄 알았다.

하지만 표정이 이상했고, 역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우리 두 형제는 소리를 질러대며 아버지를 흔들었고,

119를 부르고.. 둘째는 아버지 가슴에 올라타서 오열하면서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나중에 둘째가 그런 말을 했다.

아버지 몸이 부서질까봐 이걸 계속해도 되는건지 모르겠어서 자꾸 팔에서 힘이 빠지려 하더라고..

집밖에 나갔다온 시간은 채 두시간도 지나지 않았었다.

나와 둘째는 아직도 그때의 외출이 너무나 후회된다.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장례식장으로 아버지를 모신뒤,

막내가 장례식장에 왔다.

둘째는 격분해서 화를 내려는걸, 내가 말렸다.

덕분에 장례식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우리 3남매는 거의 대화없이 장례식을 치뤘다.

발인하고 난 마지막 날,

결국 둘째는 터져버렸다.

그래, 유병단수해서 니 말대로 애비충 뒤져서 좋냐 이 개같은 년아. 하면서 욕하더라.

니가 아버지 볼 낯짝이나 되냐.

평생 큰누나 그리워 하시며 사시고 큰누나 일로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셨는데,

고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안해본 년이 어디서 이상한거나 배워와가지고 저렇게 마음에 상처입고 돌아가시게 하느냐고.

넌 이제 내 동생도 아니라고..

막내도 후회는 되는지, 아무 말대꾸 않고 욕들으며 울기는 울더라.

오빠들이 저한테 쌍욕하는게 처음인데 당연히 힘들었겠지.

게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발인한 날부터 그런 소릴 들으니.

나중에 들으니, 아버지께서 죽은 큰누나의 모습을 저한테 투영하려 한거 다 안다고 하면서

아버지한테 엄청 쏘아붙이기도 했다고 들었다.

대체.. 뭘 어떻게 배우고 잘못 물들면 이렇게 되는건지 정말 이해가 안된다.

우리 가족,

큰누나 잃는 큰일을 겪으면서도 잘 극복하고 행복한 미래를 향해서 잘 살고 있었다.

막내가 그렇게 마지막에 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지지만 않았더라도,

아버지가 갑자기 이렇게 가셨어도 이런 관계는 되지 않았을거였는데…..

나도 이제는 막내를 편히 보기가 어렵고, 용서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둘째는 이미 절연을 선언했고,

어머니는 매일 전화해서 말리고 계시지만, 유독 아버지를 따르고 존경했던 둘째인데다..

군인이 되면서 더 단호해지고 예의와 도리에 대해 더 엄격해진 녀석이라..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좀,

여성운동도 좋지만..

혜택받고 살며,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희생해가면서까지 위해주는 환경에서 살아온 여자들은,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닌 경우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만..

내 동생인 경우에는 그들을 지지할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을 가지면 안되는거 아니었나 생각한다.

내 여동생이 피해자라면, 대체 누가 가해자가 되어야하는건가.

한평생 성실히 살다가 가신 우리 아버지?

동생들을 위해 희생했던 나, 둘째?

그저 전업주부로만 살아오신 어머니?

긴글, 끝까지 읽어주는 애들이 있다면 고맙고,

인증이 없다고 주작이라해도 할말은 없다.

그렇다고 장례식 사진을 올리는 것도 우스워서 그렇게는 하지 않으려고한다.

그저 뭍힐 글이라도 하소연한 것에 만족하면서 글을 접는다.

2

여동생 절연글 썼던 글쓴이다.

왠지 글을 써야할것 같아서 왔다.

글 올린뒤에 너무 많은 친구들이 다양한 의견들도 올려줬었고..

나를 성토하고 욕하는 글들도 많이 봤다.

솔직히 나는 내가 답정너라고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욕을 듣다보니 내가 잘못판단하는 것도 있는건가..라는 생각도 해보게 됐다.

댓글이나 글들 중에, 우리 막내 심리를 이해할것 같다면서

이런저런 글들 올려준 친구들도 고마웠다.

하지만 정말 정말, 우리집에서는 막내에게 큰누나를 투영한적도 없었고,

행여라도 막내가 그렇게 느낄까봐 되려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분위기였었다.

돈 얘기는 그때 자세히 내 생각을 쓰진 않았었지만..

솔직히 이런 마음도 있었다.

내가 지원금을 끊어도, 당장 고생은 되겠지만 결국은 극복해 낼게 분명하다고.

왜냐하면 나도, 혼자 독학사 공부하며 일하며 정말 힘들었지만 결국 해냈었으니까.

젊어서 그정도 고생은 결국 해낼 수 있을게 분명하거든.

나는 오히려, 지원금 끊고 고생은 하겠지만 결국 극복해낸 뒤에,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없이, 또 가족에 대한 고마움이나 나에 대한 고마운 마음 없이,

‘그래 나 봐. 가족이 날 끊어냈지만 보란듯이 해냈어.’ 이런식으로 생각하게 될까봐.

나는 그게 더 싫었다.

그래서 돈은 해결책이 아닌것 같았다고 더 느꼈었던것 같다.

문제의 돈 얘기인데.

결국은 지원을 끊게 되었다.

나는 내 글이 이렇게 유명해지게될 줄 몰랐어.

결국 내 동생도 글을 읽었고, 이 일로 통화도 한번 했고, 나랑 따로 만나기도 했다.

화내더라. 중고등학교때 친구들은 그게 막내 자기 얘기인거 다 알게 됐다며

이런 상황을 왜 만들었냐고 하더라.

그리고 아버지께서 우울증을 앓게 되신 것과,

갑작스레 돌아가신 일은 자식으로서 안타깝긴 하지만

글을 그렇게 써서 마치 자기 때문인양 읽히게 하였다면서 화를 내더라.

그래, 나도 그렇게 읽힐 수 있었던 것 인정했다. 댓글들에서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 많은거 봤고..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자식들이라면 다 같이 느껴야하고

우울증에 대한건 특히 막내 네가 느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의 우울증은 복합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서 자기 때문이라고 하지 말아달라고 하더라.

본인은 그런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으며, 자길 그 이유로 가정에서 배격하는 일은 치졸하다고까지 하대.

그리고 내가 언젠가 썼던 추가글의 내용처럼 지원금을 줄이니 마니 하면서

본인에게 돈을 가지고 컨트롤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실망했다고 그러더라.

내가 벙쪄서..

그런 걸 가지고 실망했니 어쩌니 치졸하니 어쩌니 하기전에

오빠들에게 고맙다고 느낀적은 없냐고 물었더니..

하……

누가 그렇게 해달래? 오빠 선택이었잖아? 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내가 부모 생각한다고 일해서 동생들 학비 지원할테니

쉬시라고 했던게 내 선택이라더라.

그게 아니었다면 자기도 부모 영향아래서 자식으로서 합당한 지원 받으며 학교 다녔을거고

“불필요”하게 오빠에게 부채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고마워할 필요가 없대.

오히려 자기가 부모에게 받을 지원의 기회를 내가 앗아간거라더라.

그럼 지원을 끊어? 라고 하니,

비웃으면서 ‘끊어! 누가 그런거 무섭대?’ 라고 했고.

나는 둘째랑 달리 너랑 언젠가는 결국 화해해야한다고 생각해서 이러고 있는건데. 라고 했더니

자기랑 오빠간의 사이가 끊어진건 끊어진거고,

엄마랑 자기는 끊어진적 없었으니 둘 사이까지 연을 끊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더라.

돈으로, 지위로 자기를 억압하지 말래. 그게 가부장적인거래.

내가 무슨 지위가 있냐 했더니

오빠라는 지위가 있대.

오빠가 무슨 지위씩이나 되냐 했더니

한국사회에서 남자, 오빠는 모두 자기가 부정하더라도 다 지위가 있는거라더라.

그러면서 어머니한테 오빠들하고 연 끊고

서울올라와서 저랑 살자고 지속적으로 말씀드렸던것도 알게 됐다.

자기가 그렇게 얘기 하더라.

그러면서 어머니랑 자기 관계 이제 방해하지 말라고.

앞으로는 집에도 엄마보러 주기적으로 내려갈거고

둘째가 저를 쫒아냈는데 왜 집에 나타났냐 어쨌냐 하면

가만 안있고 싸울거라고 하더라.

난 얘가 이성을 잃은건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이미 내가 대화를 나누고 돌보았었던 내 동생이 아니었더라.

그래서 진짜로… 지원을 끊게 됐다.

화도 안났다.

이젠 내가 잘못한건지, 막내가 뒤틀린건지도 모르겠더라.

내가 정말 꼰대인거냐?

아무튼…

여기에 글썼던것도 후회했다.

이렇게 유명해져서 동생이 글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런 대화까지 하게 된건가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