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인천에서도 가장 후지다는 동인천 출신이다.
서로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성당에서였다.
나는 친구따라 맛있는 걸 먹으러 성당에 다녔었고,
그 아이는 온 가족이 다같이 성당을 다니던 케이스였다.
나는 보잘 것 없었던 평범한 아이였고
그 아이는 성당에서도 예쁘다고 소문난
하얗고 아름다운 아이였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아이는 원래 강원도 출신인데
아버지가 자동차 관련 일을 하셔서
인천에 이사왔다고 듣게 되었다.
당시 강원도 출신은 뭔가 까무잡잡하고
시골스러운 이미지였는데,
그 아이는 내가 본 어떤 서울 사람들 보다도
희고 나긋나긋한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예쁘고 조신한 그 아이와는 달리 나는
키만 컸지 까까머리에 여드름도 나고
숫기가 없어 틱틱댈 줄이나 아는 놈이었다.
난 항상 그 아이를 계속 눈여겨 보게 되었지만,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라 생각하여
그 아이 근처 10m 안에도 접근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는 찾아오는 법이라고
성당에서 청소년부 겨울 수련회를 하게 되었다.
나와 그 아이는 같은 조였다.
덕분에 처음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뭐 여느 성당이나 교회 수련회가 그렇듯
같이 놀고 먹고 예배하다보니
가까워 지는 것은 생각보다 한순간이었다.
처음에는 그 아이와 떨어지려고 노력했지만,
그 아이가 워낙 붙임성도 좋고 착하다보니
내 마음의 벽도 허무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둘이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없었고
수련회 마지막날 밤
괜히 설레는 마음에 혼자 뒷동산에 올라가
괜히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눌러보려고
마인드컨트롤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연이라는 것은 언제나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 아이가 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날 따라 뒷동산에 올라온 것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 아이는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야 나 너랑 동갑인거 알아?”
“어.”
“나랑 친구하기 싫어?”
“별로”
“뭐야 나 여기에 친구 없는데 너라도 친구해주지”
“뭐가 친구가 없냐 여자애들 있잖아.”
“걔네는 나랑 잘 안놀아. 이사온지는 몇 년 됐는데,
내가 미사만 드리고 집에가는 편이라.”
“나도 미사만 드려서 친구 없다.”
뭐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 들이었는데
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억날 정도로 심장 떨리는 대화였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듣게 된 말이었다.
“나 어차피 내년에 다시 강원도로 이사가는데
그 때까지만 친구하자.”
무표정으로 일관했지만
뭔가 마음 한 구석이 무너질 거 같은 이야기였다.
다시 강원도로 이사간다니
이제야 말을 튼다고 생각했는데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 날을 계기로 우리는 번호도 교환하고
같이 등교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동인천에는 제물포고와 인일여고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는데
나는 제고에 다녔고 그 아이는 인일여고에 다녔다.
둘 다 화도진이라는 곳에 살았기에
아침에 만나서 학교까지 걷곤 했다.
그 해 겨울은 무척 추웠다는데
나는 지금도 그 해 겨울이 추웠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교는 같이 못했지만 등교라도 같이 하던
어느 날 그 아이가 말했다.
“내 생일에 뭐해줄거야?”
“생일?”
“12월 28일이 내 생일이잖아. 설마 몰랐어?”
알리가 없었다.
나는 청소년 미사 때마다 잠만자는 아이였기에
광고시간에 뭘 들은 기억이 없었다.
“케이크 사줄게.”
“진짜? 약속한거다. 와 나 케이크 받아보는 거 처음이야.”
“무슨 생일에 케이크도 못받아보냐. 얼마나 한다고.”
“야 케이크 비싸 나 초코케잌 사줘.
먹어보고 싶어. 아니다 생크림 사줘.
아 둘 다 먹고 싶은데.”
“다음에는 생크림 사줄게.”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마 서로 내년부터는 못볼 거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한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말했다.
“다음에 생크림 케잌 사주기로 한거다? 약속이야.”
그렇게 그 해 생일은 내가 초코케잌을 사주며
성당 친구들과 그 아이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는 것으로 지나갔다.
서로 마음속에 있는 말이었겠지만
다음엔 생크림 케잌을 사주기로 한 약속에 대한 말은
이사가는 순간까지 꺼내지 않았다.
그 다음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서로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 아이는 떠났고
나는 서울에 대학을 진학하게 되었다.
그렇게 첫사랑은 지나갔다.
그 사이 대학에서 여자친구도 만들어봤고 헤어져도 봤다.
매년 12월 28일에 괜히 전화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의대를 졸업했기에 6년이란 시간과 레지던트까지
총 10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아이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갔다.
난 산부인과를 전공했기에
군의관 대신 공보의를 지냈다.
그리고 속초로 가게 되었다.
문득 속초라는 지명을 듣자
그 아이가 양양출신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한 번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이 나니
그 생각이 멈추지를 않았다.
그러나 그 아이가 사는 곳, 전화번호 하나 알 수 없었고
그 아이에 대한 단서는 오직 그 아이 집안이
모두 천주교라는 사실 하나였다.
그런데 그 사실 하나가 생각보다 좋은 증거였다.
성당은 교회처럼 난립한 형태가 아니라
지역별로 교구를 정해서 설치하기 때문에
매 주 양양지역 성당을 돌기 시작했다.
만날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도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어디론가 가버린걸까
결국 양양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양양지역에서 찾지 못하고 포기하려던 찰나
마지막으로 들린 속초의 한 성당을 갔을 때
그 아이의 아버지를 어렴풋이 보게 되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를 보자마자
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 했다.
‘그 아이는 지금 이 성당에 다닌다.’ 확신이 들었다.
무조건 여기에 있는게 확실했다.
그러나 10년만에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 아이가 남자친구가 있진 않을까
어떻게 변했을까
날 반기지 않지는 않을까
날 기억하지 못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10년만에 다시 타오르는 마음을 끌 만큼은 아니었고
내 나름의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2012년 12월 28일
나는 생크림 케잌을 사들고 금요일 미사에 찾아갔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항상 금요일마다 미사를 드리는 걸 기억하고 있었기에
무작정 케잌을 들고 찾아갔다.
다행히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있었지만
불행히 그 아이는 없었다.
10년만에 만난 염치불구하고 무작정 물었다.
“ㅇㅇ이는 어디에 있나요?”
“너 혹시 ㅁㅁ이 아니냐? 너가 여기는 왜있냐?”
“오랜만입니다. 지금 ㅇㅇ이 어딨나요?
약속이 있어서 그런데..”
내가 급한 말투로 묻자
미사가 끝나자마자
아버님이 앞서 그 아이의 집에 가게 되었다.
하필 눈이 지독하게 내려서
그 짧은 거리가 1시간도 더 걸렸다.
아이는 집에 없었고 나는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저녁 먹을 시간에도 오지 않았고
8시 9시 10시.. 오지 않았다.
서서히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고
점점 두려워졌다.
혹시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 것일까
내가 집에 있는 것이 부담되진 않을까
그냥 돌아갈까 10번도 넘게 생각이 들었지만
이왕 남자가 칼을 뽑은 것 무라도 썰자는 기분으로 기다렸다.
그리고 여기까지와서 돌아가면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11시 30분, 그 아이가 나타났다.
눈 때문에 늦은 모양이었다.
대문앞에 서서 서있으니
그 아이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이 보였다.
그 아이가 먼저 말을 꺼내려 할 때
10년만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엔 생크림 케잌인데, 같이 먹자”
그렇게 10년만에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아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뭐 그 이후 얘기는 별거 없었다.
다시 만난 그 날 부터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했고
서로 몇번 자주 만나 밥도 먹었다.
어느날 술 마시며 내가 먼저 말했다.
옛날에 너를 많이 좋아했고 못 잊어서 찾아온거라고.
근데 그 아이도 나를 좋아했다고 했고
10년동안 가끔 계속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렇게 얼마 후 내가 먼저 고백을 하였고
교제하면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다.
내 아내는 그렇게 어렵게 내 곁에 와주었다.
아내는 현재 인천에서 빵집을 하고 있다.
다시 만났을 땐,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늦게나마 제빵기능사를 따고 있었던 중이었고
날 만난 이후에도 모은 돈으로 조그마한 빵집을 내더니
지금은 열심히 빵 만드는 빵집 사장님이시다.
수익은 별로.. 뭐 내가 열심히 벌자는 생각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영화같은 만남이었다고
어딜가든 자랑하고 다니고 있다.
비록 관객도 극장도 없는 그런 영화겠지만,
난 평생 소장하고 다닐 영화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