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고 기억 안나는 시절
(거의 5살쯤부터 어렴풋이 기억남)
우리집 빚도 없고 20평짜리 주택도 자가로 소유하고
그당시 신차로 소나타3도 있었음.
한창 우리집이 잘 살던 시기라서
남들 먹어보기 힘들다는 피자헛 피자도
그때는 매주 먹었음
(그때 당시엔 피자가 고급음식이였다더라)
여튼 각설하고
나 8살때 아버지 사업이 확 망해버렸음
그 여파로 우리집에 빚만 2억이 넘었고
집에서 있던 물품이나 모아둔 재산이랑
뭐 세무사니 변호사니 다 돈들이고
집팔고 차팔고 다 어떻게 해서
어찌어찌 빚은 갚았으나
아버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셨고
어머니도 참다참다 못해
결국 날 할머니에게 맡기고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그때 당시엔 호적정리도 안되어서
기초수급은 커녕 할머니가
식당가서 일하면서 가져오는 김치랑
캐오는 쑥에 뭐다 해서 밥먹고 자랐다.
그렇게 초등학교 입학했는데
집에 옷이 없으니 세살차이 나는 옆집 누나가 입던 옷
그대로 물려 입고 아는 사람들한테 받아오고
뭐 난 아무거솓 모르고 자랐지.
그리고 양말도 받아왔던 걸로 기억함.
양말을 보통 성인용을 많이 받아왔는데
할머니가 그걸 틑었는지 접었는지
여튼 나한테 맞게 잘라주셨음.
할머니랑 나랑 산 곳이 ‘ㄷ’자로 된 연립주택인데
사는 가구수는 많은데 화장실은 밖에 딱 3개 있었음.
화장실,주방도 따로 없고
그냥 곤로라고 해야하나.
무슨 가스 버너 같은건데 거기다 기름넣고
불붙여서 뜨거운물 뎁혀지면
그냥 거기다가 씻고 거기서 밥해먹고 했음
심지어 쌀담궈 놓던 바가지를
물바가지로 그냥 썼을 정도니까..
좀 머리도 크고 초등학교 6학년 정도 되니까..
알만한건 알게 되더라.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남자애가 더럽고
냄새난다고 소문나 있었고 이름도 있는데
맨날 빵꾸난 양말 신는다 해서 O빵꾸로 불렸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손가락질 받고
그렇다고 기초수급이 되는거냐
ㄴㄴ.. 그것도 아니야..
동사무소 가서 얘기를 해도
호적정리가 안되서 못준다 하고
어떻게 알았는지 무슨 대부업체 같은 깡패 놈들 와서
할머니 앉혀놓고 돈달라고 막 뭐라하고
나보고 일해서 갚으라고 막 뭐라했음.
할머니 한테는 위험하게 안했는데
나한테는 의자 앉지도 못하게 하고
12살 학생한테 엄포 놓으면서
전단지라도 돌리고 청소라도
어디 하러 가라고 막 시켰음.
그럼 나는 겁질려서 나가서 동네 돌면서
놀이터나 동네 뒤에 고가도로 있는데
그 밑에 화단 같은곳?
가면 있던 플라스틱 통에 앉아서 풀만지고 놀았음.
내 초등시절은 그게 다임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에
아빠가 친가중에 유일하게 머리 좋고
대학까지 나왔다고 들어서
나는 그말 믿고 할머니가 식당일 하면서 벌어준 돈
3만원 꼭 쥐고서 동네 청소년독서실 같은데서
주3회 하던 영어수업도 들으러 가고
학교에서 방과후 학습 하는거 지원 받아서 했음.
중학교 올라가서는 한창 롤러스케이트인가 뭔가
그런거 타고 다녔는데
나는 그거 없어 갖고 고물상에서 주워온 자전거 타면서
애들 타고 놀때 옆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놀다가
5시쯤 되면 애들다 학원가니까
그냥 집에와서 있던지 청소년독서실 같은데 가서 책읽고
거기 있는 정보검색 컴퓨터로 인터넷 하고 그랬음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때
남들과 다름없이 나쁜길로 빠짐..
아무 생각도 없이 학교 근처 쌀가게에 있던
씨티 오토바이가 너무 좋아보여서 키를 훔쳤음.
그리고 무서운 마음에 키를 가방에 너놓고
며칠동안 아무 짓도 안했음
그러다가 처음으로 친구한테 키를 건네주고
오토바이를 훔쳐타봤음.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때 당시에는 무서운거 모르고 그냥 탔었음.
그러다가 기름 다 떨어져서
친구랑 기름통 여는 법을 몰라서
그냥 길에다가 오토바이 세워두고 도망감.
그렇게 오토바이 타는 법도 배우고
알바라도 시작할려고 여러군대 돌아다니다가
피자집에 취직하게 됐음.
오토바이는 면허가 없고 어려서 안된다 하고
대신 주방일을 처음 시작함.
처음 한거는 피자에 들어가는 재료들..
양파, 피망, 버섯 이런거
사장이 농수산물 시장에서 사오면
그거 까서 칼로 다 다듬고 채써는 일..
시급 3000원 주는 피자집에서
박스접고 피자토핑하고 치킨 튀기고 청소하고
전단지 뿌리고 하는일을 일주일에 3번 하기로 함.
그렇게 거기서 1년 정도 일했다.
버는 족족 통장에 넣거나 할머니를 드렸음.
어긋나게 써본적은 없었음.
간혹가다가 뭐가 먹고 싶다 해서
과자를 사먹거나 음료를 사먹긴 했는데
일하는 곳에서 그냥 음료수도
페트로 한병 까놓고 먹으라고 하고
사장이 피자 한판 구워주면서
할머니 갖다드려라
치킨한마리 튀겨주면서 저녁으로 먹어라
할때가 제일 신났음.
그냥 먹을거는 솔직히 못먹고 다닐 정도는 아니었고
할머니도 일을 하셨으니 그냥저냥 이었음.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방학이 됐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음.
뇌졸증으로 쓰러 지셨는데
병원 가서 있는돈 다 털어서
할머니 중환자실 입원하고 의사랑
유일한 친척 큰아버지가 얘기했는데
아마 심장정지가 올거라고..
그러면 심폐소생술 안하겠다고 했단다.
그리고 일주일도 안되서 돌아가심.
난 뭣도 모르고 그냥 천애고아가 되버렸음.
다행히 집은 누구에게 안넘기고
큰아버지가 나두셨음.
나 대학생이나 성인되면 알아서 하라는 말 하시고..
그때당시엔 장난식으로 넘겼는데
나중엔 그게 진짜란걸 크고 알았을땐
너무나 어이없었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고등학생이 됨.
중학생때 고등학교 안간다고 했는데
할머니는 고등학교 다녀야 한다고 했지만
1/4 학기별로 내는 등록금이나
교복같은 것도 그렇고 돈문제도 참 어려웠음
다니던 피자집도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해서
시급이 인상되거나 한것도 아니었고
사장도 장사슬슬 접고
다른 동네로 갈 생각도 하고
업종을 바꿀 생각도 하더라.
당시 내가 갈려던 고등학교가 공립고등학교 인데
1/4 학기 등록금? 교육비 같은게 20만원 정도 됐음.
그리고 급식비가 5만원 정도 됐고..
그래서 1/4 학기 다니다가 포기했다.
공부는 그냥 중학교때 기억으로
평균 87점? 이었나. 그렇게 나왔고
고등학교 떄도 딱 처음이자 마지막 중간고사 점수가
85점 이었음. 그때 학교 선생들이
85점 위로 불러다가 너희는
경기도 어디 있는 대학부터 시작해서
니들이 갈수 있는 최고 커트라인이다 라고
막 설명했었는데 기억도 안남.
그리고 바로 생일 4월이 지나고
자퇴한 시점에서 원동기 면허를 땀.
그리고 일하던 피자집을 그만두고
대형 프렌차이즈 D 피자집에 가서 일했음.
시급도 그냥 적절했는데
여기는 배달 건당으로 또 돈을 받았음
내가 미성년자라서
일주일에 일 할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있다고
그 시간 위로는 못써준다 하더라.
그래서 알았다 하고 월화수는 그곳에서 일하고
목금토는 M햄버거 집에서 일하고
일요일은 아침에 집근처 재개발 구역으로
철거하는 집들 돌아다니면서
잡철 , 천장에 있는 구리 등등
모든 닥치는 대로 모았음.
딱 그리고 18살 되니까..
기다렸다는듯이 독촉장이 엄청나게 날아오더라.
추심업체인지 뭐 신용조합에서 날라온거였는데
집에 남아있던 잔금이 굴리고 굴리고 굴려서
2~3천 만원이 되어있었음.
전화도 없고 뭐도 없는데
막 집찾아와서 돈내라고 난리치고..
알지도 못했는데 할머니가 몸이 안 좋아지시고
집계약 보증금이랑 통장 이름 내껄로 다 해놔서
내 이름으로 된 집에서 나는 뭐도 없이 쫒겨났다.
내나이 19살..
그리고 할 수 없이
무보증금 월 17만원짜리 고시텔에 들어갔음.
진짜 아무것도 없는 고시텔 방에
입던 옷 몇가지랑 보따리에 배게 이불 하나 챙기니까
박스 2개랑 보따리 하나 나오더라..
그게 내 19살 인생 최대의 이사이자
19년 인생동안 사들인 세간이랑 옷 그리고 전부였음.
고시텔 살기 전에는 옆집에서 반찬 나눠주고
동사무소랑 무슨 동네 어머니회에서 와서
쌀이랑 반찬 갖다주고 갔는데
그것도 없어져서 걱정했었다.
근데 어디서 들은건 있어서
모든 고시텔엔 밥이랑 김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음.
밥은 무제한 제공인데 김치는 없더라.
거의 처음엔 밥있으면
가져온 냄비에 있던 간장 참기름 비벼서
밥 두공기 먹고 치우거나
동네에 몇몇 있는 친구들한테
김치라도 좀 집에서 달라해서 근근히 버텼음.
뭐 할머니 돌아가신 이후로
큰아버지랑은 자연스럽게 연락 끊겼고
뭐 연락처를 알수도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았음
그러다 알바 계속 하면서 돈 좀 더 모아서
라면하고 중국산 김치 사먹기 시작했음.
라면은 홈플러스 320원짜리 라면 30봉지 사서
하루 한끼 고시텔 해결,
햄버거 집 가는 날은 가서 치즈버거 한끼 해결,
피자집 가는 날은 가서 받는 3000원 식대로
삼각김밥에 라면 사고
남은돈 1200원은 꼬박꼬빡 저축했음.
그냥 무조건 모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음
주말에는 그냥 라면 한끼 아점으로 먹고
나머지는 먹지도 않음.
간혹가다가 고시텔에서 떡같은 거나
만두같은거 인당 몇개 이렇게 놔두는데
중국산에 질도 안좋은거
남들 먹지도 않으니까
그냥 내가 거의 독점하듯이 먹었음.
그리고 고시텔 냉장고 보면서
그러면 안되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남들꺼 몰래 조금씩 빼먹고 그랬음.
그렇게 19살때까지 그러다가 검정고시를 봤음.
주소 자체가 고시텔로 되있으니
주민세도 날라오고 뭐 종이랑 이런거 날라왔는데
그때 기초수급자 조건 된다고
매달 20만원 안되는 돈 받을 수 있었는데
그거 받으려고 동사무소 가서 신청했더니
거기서 내가 일하던 피자, 햄버거 집에서
일용직 근로 신고서 인가 제출해서
내가 소득이 일정수준으로 발생해서 안된다고 함.
내 안타까운 상황보던 사회복지사분이
도와줄건 더 없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따라해서
3개월동안 야간학당 인가 거기서 공부해서
검정고시 패스함.
패스 축하한다고 그때 선생님이
삼겹살이랑 부대찌개 사주셨는데
살면서 부대찌개 처음 먹어봤음.
물론 소주 한두잔도..
그렇게 지내다가 고시텔 사장님이
총무 같은거 해볼생각 없냐해서 알았다 하고
19살에 총무 일을 했음.
한 6개월 했나.
알바도 어느정도 했고 돈 모아놓은 것도 있어서
고시텔 사장한테 월 5만원씩 줄테니
갖고 있던 짐만 좀 맡아 달라고
군대 가야되는데 맡길 곳이 없다고 했음.
근데 그냥 맡아줄테니
집처럼 생각하고 다녀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짐은 지하 보일러실 같은 창고에
맡겨두고 군대 들어갔다.
웃긴게 엄마는 호적에서 나갔고
아빠는 호적은 살아있는데
행방불명 처리라서 군대 면제 일줄 알았는데
일가친척이 있고 아빠가 호적에서 살아있어서
부양가족 어쩌구 저쩌구 처리해도
현역 뜬다 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아니었음.. ㅂㄷㅂㄷ
그렇게 군대 들어갔는데 너무 행복했음.
처음에 행보관님이 너 여기서 공부하고 도와준다 했는데
솔직히 군대 일하면서 그거 불가능했고
군대가 오히려 집 같았음.
갖혀있는거 뭐 그러려니 했지만 가족같은 선후임에
하라는 일만하면 다 잘해주는 사람들이랑.
월급도 나오니까 과자도 한번씩 사먹고
아마 군대에서 가장 돈 많이 쓴듯..
그렇게 군대 갔다 나왔음.
군대 갔다오니 뭐 할만한 직업도 없고
내가 알바를 그렇게 찾아서 해본것도 아니고
아는거라곤 피자 만드는거랑
햄버거 배달하는 거 뿐인데..
뭘할까나..
그냥 그거나 하자하고 그거 구하기 전까지
군대에서 들은 얘기 기억하고 노가다 뛰러감.
전역날이랑 전역 다음날 쉬고 전투화신고
옷입고 막노동 뛰러 갔다가
그날 안전화 다 떨어진거 받고
아침에 사무소 나가서
소장이 일주는 곳 가서 일하고 그랬음.
공장도 가서 인형눈깔 조립하는것도 하고
공사현장가서 막노동 하고 통신현장 가서
지하철 보다 더 밑으로 들어가는 곳에 가서
케이블 선 엄청 많은데
그거 일일이 닦고
정리하고 케이블 옮기고 잡일하고..
뭐 그러다가 알바도 잘 안구해 지더라.
학기중이 아니라 방학중이라서 자리가 없다고..
그래서 다시 고시텔 들어와서
할만한거 뭐 있을까 하다가
문득 울산공장이나 구미 창원 김해 같은
경상도 지방에 공장 취업하면
하루10만원 이상 땡길 수 있다길래
무작정 버스 타고갔음.
가서 새벽에 인력소 찾으러 돌아다녔는데
오히려 노무자 임금이 나 살던 도시보다 싸더라..
왜냐고 물으니 지방은 원래 비싸고
공장같은거 들어갈려면 무슨 검사를 해야한다해서
그날 검사받고 보름정도
거기서 노무자로 일하면서 돈벌었음.
그리고 족장아르바이트, 현대차 조립부품 야간조,
조선소 용접보조
(여기서 용접자격증 있어야 하는데
그냥 조선소 노무자 보조로 들어갔다가
용접보조 처럼 그냥 쓰였음) 등등 별걸 다함.
그렇게 두달정도 지나니까
통장에 보니 딱 돈 500만원 모여있더라.
근데 더이상 이일은 못하겠는게
다치기도 엄청 다치고
손도 파이고 꿰메기도 하고 위험천만하고
잘 못먹고 잘 못자는 나는
진짜 죽을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듬
그 돈을 처음 들고 다시 어딜 갈 생각도 안 들었고
울산은 물가가 엄청 비싸서
여기선 더이상 못살겠다 생각했음.
그길로 부산에 감.
부산 못사는 언덕배기 동네에
보증금 300에 월 10만원짜리 단칸방 하나 잡아서
세간살이 없이 그냥 버너에 라면 끓여먹으면서 살았음.
한달 전기값이 아까워서 불도 안키고 살았더니
전기가 너무 안쓴다고 끊는다고
고지서까지 날라오더라.. 와 무서운 세상;;
그렇게 23살 청년은 부산에서 생활을 시작했음.
처음엔 인력소 나가서 노가다 뛰고 그랬는데
이쪽 동네 반대편이 재개발 붐이 불어서
아파트가 막 올라가더라..
그래서 원룸,아파트 공사현장 엄청 다님.
이동네 아파트 사는 놈들 있으면
거기 벽돌한장이랑 판넬 한장
다 내가 붙이고 옮기고 한거다. ㅇㅇ
노가다 하다보니 손가락도 굽어있고
허리도 많이 아파서 병원 갔음.
큰돈내고 CT찍었는데 디스크가 헐었다고 하더라;
손가락은 굽어서 뭐 별수 없고
그냥 그래서 노가다 관두고 배달일 시작했다.
그러다가 운전면허 따고
자그마한 식품회사에서 거래처 돌면서
물건 갖다주고 물건 팔고 하는 일 하고 있다.
월 250넘는 돈 내 식대 20만원 제외하고
30만원은 여유자금.
혹시 모르니까..
150만원은 저축 나머지 50만원은 방값이랑
일부 전기세 핸드폰 값 내고 산다.
남들이 보면 아직도 흙수저라 하겠지..
오히려 가난했던 초등학교 시절보다
못먹는 홀아비 같은 존재가 되버렸으니까.
근데 진짜 할려고 하고 살다보면 뭐든 길이 보였음.
나도 지금 남부럽지 않게 돈 4천만원 정도 모았고
이제는 이동네를 벗어나서
옆동네 원룸에 싼집에 들어가 볼까 생각중이다.
돈을 좀 더 모은다면..
내집을 마련하거나 중고차를 구매해서
한번 예전 살던 동네를 다녀와 보는 휴가도 가보고 싶음.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 인거 같고..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기억이겠지만.
진짜 나에게는 죽고싶다는 생각보다는
남들 놀리는건지도 모르고 자라서
그냥 당연한듯이 커서 뭐 기억 할만하거나
부끄럽거나 지우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사실 바쁘게 살아서 뭐했는지도 모르는 하루가 더 많음.
그리고 부모 원망 진짜 많이 했는데
요즘따라 생각이 많이 난다.
살아있으면서 아들 뭐하고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을까 싶기도 하고
나한테 해준 것도 없는 사람들인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음.
암튼 이렇게 글쓰는걸 제외하고
다른 날도 그냥 평범한 나의 똑같은 일상이겠지
그냥 하소연 한번 하고 싶어서 글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