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나는 27살 고등학교 선생님이다.
오른쪽 눈은 실명상태다.
1996년에 태어났다.
근데 태어난 곳이 화장실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계속 지잡 병원에 있다가 유치원에 입학했다.
이때까지는 모두가 행복했다.
그때 당시 돈을 공무원보다 5배는 잘벌고
인정받던 직업, 노가다를 하던 우리 아버지와
교회를 믿지만 가족을 사랑하던 어머니,
차도 그당시 엑셀 이라는 차도 있었고,
집도 마당있는 넓은 집이였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날, 일이 터졌다.
입학하기 전,
우리는 초등학교 입학을 축하한다며
고깃집에 갔고, 고기를 먹으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대화를 하던 도중,
내가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그래서 날보니 오른쪽 눈에 젓가락이 꽂힌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날 알아보니, 내가 젓가락 가지고 놀다가
발이 미끄러져서 넘어졌는데,
그때 손에 잡은 젓가락으로 눈을 찔렀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고깃집에서
사람들과 함께 119에 실려갔다.
그렇게 나는 입학 전날에 오른쪽 눈을 잃었다.
3년동안 병원에서 살았다.
난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그 당시, 마취가 조금 풀렸는 듯
저려오는 오른쪽 눈을 살짝 만지며
왼쪽 눈을 서서히 떴는데,
희미하게 보이는 시선으로 부모님과
의사, 간호사가 모여있었고,
희미하게 들렸지만 분명히
오른쪽 눈을 꿰맨 채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엿들었다.
그렇게 난 오른쪽 눈에 천을 감싼 채
병원에서 지냈고,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나를 꼭 한번씩은 쳐다봤다.
시선에 민감해진 게 이때부터인 거 같다.
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다.
매일매일 찾아와서 위로하고,
내 링거주사에 그림을 그려주시는 간호사분들과,
내가 입학하려 했던 학교에서
한달마다 오는 친구들의 편지들을 읽으며 지냈고,
한번은 수녀님이 찾아와서,
나에게 게임기를 선물해 주셨다.
그때마다 난 너무 감사해서
가끔씩 눈물을 흘렸지만,
눈물이 흐르는 건 왼쪽눈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피부이식을 받은채
퇴원을 했고, 집에 돌아왔다.
그날밤 어머니는 내 눈에 찬 가리개를
천천히 벗기셨고, 정확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건 그냥 작은 상처야.
너는 이 상처를 뛰어넘고,
앞으로는 상처하나 없이 행복하게 살 사람이야.”
라며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셨고,
그날 밤은 서로 눈물로 채워가는 밤이 됐다.
다음날 어머니와 시장에 가서
가방, 연필, 필통 이것저것을 사자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사고싶은건
뭐든지 사게 해주셨지만,
나는 어머니의 낡은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봤고,
그날 산건 볼펜 하나, 지우개 하나,
싸구려 가방하나 뿐이였다.
그날 밤 아버지는 내 몸만한 로봇을 사오셨지만,
난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표정을 봤고,
나는 기쁜척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입학했다.
학교에 오는 길,
나는 눈에 커다란 보호대를 차고 있었고,
사람들은 전부 나를 쳐다봤다.
학교에 들어갔고,
간단한 설문을 마친 뒤 반에 들어갔다.
그때의 난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을 들었고 공부했다.
왜냐하면 병원에서 이상한 책들,
약품책, 만화책만 보다가,
수학, 과학실험, 국어, 영어,
이런게 너무나도 재밌었고,
친구들도 사귀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그 행복한 일이 평생 지속될 줄 알았지만,
내 눈을 향한 애들의 시선,
은근히 따돌리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날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셨고,
학교에선 나를 위로하고
챙겨주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렇게 어중간한 생활을 하다가
중학교에 들어갔다.
전과 같은 생활일 줄 알았으나,
순수했던 애들도 머리가 커져서 그런지
눈을 보며 놀리는 애들,
욕하는 애들,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맞고,
욕먹고만 있지는 않고 나도 싸웠다.
어느날은 의자를 들고
그애의 몸을 내려치고 올라탄 뒤
얼굴을 쉴새없이 때렸다.
하지만 이건 학교 쌤들에게
안 좋은 이미지로 강하게 남았다.
당시 일진 애들은 잘 사는 집안이었고
나는 부족하진 않았지만 못 살았다.
그런 것도 있지만 내 눈 때문이라며
선생님들은 날 안 좋게 보았고,
어느 쌤은 나보고 앞으로 자기 수업 시간에는
복도에 나가있으라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난 굴복하지 않았다.
굴복하면 지는거라고 생각하며
더더욱 공부하고, 노력했다.
병원에서 지낼 때
옆자리에 조직폭력배 형이 있어 친하게 지냈는데
그 형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하다보니 괴롭힘은 줄었다.
하지만 따돌림은 여전했고,
나는 외롭게 중학교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2 어느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원인은 일하시다가
현장지붕에서 떨어진 철근에 몸이 찍혔고,
그렇게 떨어지셨는데
머리를 부딪히셨고,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셨다.
그날 어머니와 나는 며칠 내내 울었다.
하지만 울기만 하면 뭐가 달라질까 싶어,
울음을 참으며 공부하고 노력했다.
어떻게든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매일 2~3시간을 잤고,
밥, 똥, 등교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공부였다.
그렇게 살다보니
내 성적은 매번 100점, 올백이였고,
전교 1등에 표창장도 몇개 받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선택할 때,
다른 애들은 갈 곳 없어 헤매었지만
나는 날 괴롭히던 애들에게
보란 듯이 명문 인문계에 들어갔다.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유는
인정받는 직업을 갖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괴롭힘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늘면 늘었지 줄어들진 않았더라
그냥 공부하는 양아치들이었다.
애들은 내 눈을 보며 장애인 새끼라고 했고,
날 때리고, 뒤에서 교과서를 던지고,
어느날은 가방과 의자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기 까지했다.
하지만 참았다.
견뎌냈다.
의자가 없으면 서서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이 앉으라고 하면
내 의자를 저놈들이 던졌다 라고 했고,
그때마다 애들이 날 끌고 가 때렸지만
오히려 나는 애들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청소솔로 때려보기도 했고, 욕도 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법,
그럴 때마다 더 늘어나는 폭력에
점점 무너져갔다.
그래도 나는 공부를 이어갔고,
전보다 노력하고,
어느날은 2일 동안 잠을 안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도 전교1~2등을 넘나들었고,
성적은 항상 95점 미만으로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근데 이렇게 살던도중, 이사를 갔다.
이사간 곳은 낡은 원룸이었고,
바퀴벌레는 1일에 2번은 보이는 꼴에다가
화장실은 바닥이 부서져서
시멘트가 그대로 보이던 곳이였다,
알아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하루에 쓰리잡을 뛰며 일하셨지만,
그래도 나를 키우기엔 돈이 부족했고
우리 아버지가 모아두신 돈도 거의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그 이후로 알바를 했다.
나이를 속이고 노가다를 한적도 있으며,
우유배달, 전단지, 광고, 고깃집, 서빙,
상하차 돈이 되는거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일을 해도 공부는 쉬지 않았다.
일 쉬는 시간엔 단어를 한개 외웠고,
일이 끝나면 집에 가며
휴대폰으로 인강을 보았다.
그렇게 나는 1년동안 모으고
모은 1300만원을 어머니께 돈을 드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 뺨을 때리셨다.
왜 그렇게 사냐고 못해준거 있냐면서
공부를 더하라 거리셨다.
그날 나는 일을 다 취소하고
집에 들어가던 도중
집앞에서 내가 준 천만원을 들고
흐느끼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렇게 살다가
내가 고2 중반쯤 됐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과로사로 돌아가셨다.
나는 그렇게 고아가 되버렸지만,
버텼다.
바퀴벌레가 내 얼굴 위를 지나간적도 있지만
무시하며 책을 읽었고,
새벽에는 우유배달과, 청소알바를 했고,
끝난 후엔 배달을 하던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서 아침에 자습하고, 수업듣고,
하교 한뒤엔 노가다를 했다.
노가다가 끝나면 고깃집에가서 서빙을 했고,
서빙이 끝나면 청소알바나,
자재정리 알바를 했다.
없으면 아는 사람을 통해 야간 노가다도 했다.
그렇게 그렇게 견뎌가며 살았고,
난 대학교에 입학했다.
솔직히 대학생활은 별 볼일이 없었다.
남들처럼 알바하고, 공부하고,
시험치는게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남들이 알바를 한개하면
난 3개를 했고,
공부를 1시간 한다면 난 4시간을 했다.
남들은 학식 먹을 때
나는 800원짜리 라면으로 때웠다.
그렇게 나는 이수를 받고,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교사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명문은 아니지만
상위권에 들어가는 고등학교에 들어가
교사가 되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했고,
내 눈을 농담거리로 삼아
애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했으며,
내 눈을 농담거리로 삼아
위로를 해주기도 하였다.
나는 교사가 된지 얼마 안 돼
평생 하고 다니던 눈가리개를 벗었다.
남들이 쳐다보는 일은 일상이 되었지만,
나는 누구도 두렵지 않게 살고 있고,
남들 시선 따윈 개나 줘버려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1분 1초를 헛되게 살고 있지 않다.
나보다 힘들게 살아온 사람 있으면
존경하고 싶고, 이기고 싶다.
그리고 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고 싶고
돈이 많다거나
가진 것이 많진 않지만
남들은 보지 못하는 좁은 시야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찾아내서
도움을 주고 살고 싶다.
그게 우리 부모님도 원하는 내 삶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