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내가 고3 이던 시절,
평소 자주가던 만화방에 대학생 정도 되는 젊은 여자가
꽤 자주 들락거렸었다.
근데 만화를 보러 오는건 아니고
양손 가득 만화책을 들고와서는
만화방 주인 아재한테 전달해주고 돈을 받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주인 아재한테 물어보니
만화방 맞은 편 헌책방 주인으로 있는 여자였는데
헌책방에선 취급하지 않는 만화류를 이 만화방에 팔러 오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날 만화방에서
주인 아저씨하고 짜장면 먹고있다가 타이밍 좋게 그 누나가 들어왔다.
주인 아저씨가 누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밥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고 이리로 오라고하니
싱긋 웃으면서 내 옆에 와 앉더라.
그때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짙지 않은 화장기에 입술이 분홍 빛으로 반짝이고
부산한 머리를 위로 틀어올려 정리한 것이 굉장히 청순한 느낌을 줬다.
드러난 귀 밑으로 조그마한 꽃모양 피어스가 그런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는 듯 했다.
대충 소개를 하자면 나이는 당시 24살.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가 꽤 큰 식당을 운영한다고 했다.
원래 책을 좋아하던 것도 있고
아버지가 떠나시면서 남겨둔 책들을 바탕으로 헌책방을 차렸는데
(아버지가 소설가였다더라)
대학생활 하다가 어릴 때 부터 앓았던 폐렴으로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자퇴하고 혼자 조용히 헌책방 운영하며 산다더라.
그렇게 같이 말 좀 하다가
그 누나가 나한테 책을 한 권 줬는데
그 책이 톰 슐만의 ‘죽은 시인의 사회’였다.
미소 지으며 만화책만 보지말고
자기 헌책방에도 좀 놀러오라고,
좋은 책 많다고 하고는 가버렸다.
만화는 좋아했는데 글자 책은 솔직히 극혐이라 안 읽고
학교 사물함에 짱박아놨다가 어느새 잊어버렸다.
며칠 후에 만화방 갔다가 내려오는길에
맞은편 헌책방에 불이 켜져있는게 보였다.
전에 받았던 책 잘 읽고있다는 말도 할겸 (구라지만)
슬쩍 문을 열고 들어가봤다.
문열고 딱 들어갔는데 기침하는 소리가 심하게 나더라.
입 막고있던 손수건엔 피까지 묻어있었다.
내가 괜찮으냐 물어보니
미안한데 찬장에 약이랑 물 한컵만 떠다달라길래
바로 가져다줬다.
손을 파르르 떨면서 힘겹게 약 삼키는 모습을 보니 좀 걱정이 돼서
대충 ‘아프시면 일찍 들어가 쉬지 왜 늦게까지 있어요’
이런 식으로 말했었다.
대답없이 살짝 미소만 지으며 날 보는데
그 모습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나보고 전에 빌려준 책은 다 읽었냐고 물어봐서
공부하느라 바빠서 못 읽었다고 구라쳤다
“원래 좋은 책은 천천히 감미하며 읽는거야.”
그 말 듣고 꼭 다 읽어야 겠다고 결심하고
다음에 또 올게요 하고 나왔다.
다음날 학교 가자마자 사물함에 넣어놨던 책 찾아서
자습시간에 꾸역꾸역 다 읽었다.
솔직히 재미는 못 느꼈는데
그래도 나중에 내용 물어볼거 같아서 일단 끝까지 다 보긴했음.
그러고 며칠 지나서 습관처럼 만화방 가는데
그 헌책방이 눈에 들어오더라.
집으로 다시 달려가 책 가지고 나와서 헌책방으로 갔다.
책 다 읽었다고, 돌려주러 왔다고 하니까
그냥 선물로 준거니 간직하고 있으라더라.
그러고 자기 지금 책 대금 받으러 만화방 갈건데 같이 가자길래
짐 들어주면서 같이 만화방 들어갔다.
주인 아재가 어쩐일로 둘이 같이 들어오냐?
이거 수상하네? 이러시는데 솔직히 좀 기분좋았다
나중 가서는 누나하고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만화방도 거르고
헌책방가서 좋은 책 있으면 더 추천해달라 말했다.
그런 식으로 추천받아 읽은 책이 수십권은 되는데
처음엔 그냥 누나랑 할 말 만드려고 어거지로 읽다가
점점 빠져들게 되더라.
지금도 일주일에 한 권씩은 꼭 읽는다.
같이 밥도먹고 산책하고 영화도 보고
진짜 내 생에 얼마 없는 행복한 기억들이
대부분 이때 만들어진 거같다.
같이 있을때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각혈하고 이런 경우가 꽤 자주 있었는데
눈물까지 찔금 흘리며 괴로워 하는 모습 보니까
진짜 너무 안쓰럽더라.
내가 걱정하면 항상 괜찮다고,
약 잘 먹으면 금방 나을거라고만 해서
그땐 정말로 그런줄만 알았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 2학기가 됐는데
내가 여름방학 때부터 현장실습을 나갔었다.
취업하고 처음 받은 월급으로 누나 줄 선물로 가습기를 하나 샀다.
헌책방에 종이가 많아서 그런지
공기가 심하게 건조하더라.
안그래도 기침 자주하는데..
원래는 공기청정기 살려고 했는데
너무 비싸 부모님 선물 살 돈이 모자라서 그냥 가습기로 만족했다.
그래도 선물이라고 들고가 전해주니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더라
자기도 선물 하나 주고싶다고 생일 언제냐길래
12월 달이라고 말해주니
‘한참 멀었네, 기억해 둘게’ 이러고 말았다.
그 일 이후 일이 바쁘고 피곤해서
주말에 퍼질러 자느라 한 달 가까이 헌책방에 들리지를 못했었다.
간만에 주말이라 헌책방에 가봤는데
안에 아무도 없고 문도 잠겨있었다.
평소에 그냥 헌책방 가면 언제나 만날 수 있었으니까
딱히 연락처 같은 것도 물어본적이 없었다.
만화방 아재도 안보인지 2주정도 됐다며
자기도 책방 번호만 알지 개인 연락처는 모른다더라.
넘 걱정되서 그 뒤로 매일매일 책방 앞에 가서 누나 있나 확인해보고
문잠긴거 알고는 시무룩해져서 집에 돌아오기 일수였다.
그렇게 몇 주를 계속 습관처럼 찾아간지 얼마나 됐을까
여느때처럼 책방 앞에서 서성거리는데
어떤 아줌마가 오더니 “누구세요?”라고 묻는데
이 헌책방 단골 손님이라고 둘러댔더니
자기가 이 책방 주인 엄마 되는 사람이라 하시더라.
왜 갑자기 문 닫으셨냐, 무슨일 있냐고 물어보니
앓던 병이 악화되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였다.
투병 생활을 꽤 오래해야 할 것 같아서
책방 접고 자리 내놓으려고 한다길래
병문안 가고싶다고 하니 1인 특실이라 보호자 확인이 있어야 된다나 뭐라나
그래서 잠깐 정리 좀 하고 자기랑 같이 가자길래 오케이 했다.
그렇게 누나의 어머니 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뜬금 없지만 차가 되게 좋은 차였다.
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외제차였음
식당 크게 한다더니 수입이 꽤 되는가보더라.
여튼 병실 어딘지 알려주고 자기는 잠깐 일 좀 보고 올테니
먼저 가서 이야기 나누고 있으라고 하시길래
알았다하고 병실로 들어갔다.
1인 병실 이었는데 내가 들어가서 나랑 눈 마주치니까
굉장히 놀란 눈치로 어떻게 알고 왔냐고 그러더라
그래서 매일 책방앞에 가서 기다린거며
오늘 우연히 누나네 어머니 만나서 같이왔다고 얘기하는데
갑자기 그동안 쌓였던 걱정과 답답함이 확 몰려와서
나도 모르게 누나한테 왜 말도 안해줬냐며 짜증을 내버렸다.
누나가 우물우물 하다가 ‘미안해…’하는데
침대 옆에 내가 선물해 줬던 가습기가 딱 눈에 들어오더라.
진짜 말로 표현못할 묘한 기분이 들면서
창피한줄도 모르고 너무 걱정했다고 질질 짜버렸음
자기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내 머리 쓰다듬어 주는데
강한척 하는게 오히려 더 안쓰러워서 거진 5분 넘게 계속 울기만 했었다.
내가 좀 진정되고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또 올게요 하고는 집에 돌아왔다.
그 뒤로 2~3일에 한 번씩은 꼭 병문안을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집에 돌아가곤 했다.
다소 실없는 이야기들 뿐이었지만
병원 벤치에 함께 앉아 붉게 만발한 단풍을 보거나
책을 읽고있는 누나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었다.
한 가지 기억나는게 누나가 있던 병실에 조그만 오디오가 하나 있었는데
내가 병문안을 가는 저녁 7시 쯤이면
누나는 항상 같은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 노래가 journey의 faithfully
누나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었다.
모든게 좋아보였다.
누나는 점점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고
금새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같이 영화도 보고
카페가서 책 이야기도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월급날이라 누나가 좋아하는 과일 통조림을 잔뜩 사들고
병문안을 갔다.
날 반갑게 맞아주긴 했지만
이상하게 그날따라 누나가 유난히도 말이 없었다.
몸이 좀 많이 안 좋은가 보다 싶어서
나도 딱히 말을 걸지않고
오디오에서 흐르는 이름모를 올드락을 들으며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간호사가 곧 면회 마감시간이라며 알려주고 나가길래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누나가 잠깐 와서 옆에 앉아보라며 손짓했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옆에가서 슬쩍 앉아 “왜요?”라고 하니까
우물쭈물 하더니
갑자기 내 볼에 입을 맞춰주더라..
순간 너무 당황해서 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쳐다보니까
누나도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숙이고 ‘생일 선물 미리 주는거야’라더라.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꼭 안아줬는데
그게 아마 내가 처음으로 시도했던 스킨십인 거같다.
누나가 거부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그냥 가만히 있어주더라.
그렇게 안고 있다가 간호사가 갑자기 들어와서 허둥지둥 인사하고 바로 나왔다.
그날 집가면서 미친놈처럼 춤추면서 갔다.
지금 글 쓰는 중에도 그 때 생각나서 실실 쪼개면서 쓰는 중이다
며칠지나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누나 어머님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나보고 오늘 혹시 병원 갈거냐고 묻길래
안간지 꽤 됐으니 갈거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자기가 태워줄테니 같이가자 하시길래
일 끝나고 바로 만나러갔다.
그런데 어머님이 안색도 안좋고
뭔가 되게 떨리는 말투로 나더러
병원 가서 ㅇㅇ이 보고 너무 당황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내가 무슨 일이냐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을 안해주시더라.
그 때 회사에서 병원까지 가는 20분이 진짜 지옥같았다.
병원에 도착해보니
누나는 코와 입에 길다란 호스가 연결 된채
중환자실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었다.
누나가 가늘게 숨을 내쉴때마다 기분나쁜 삑 삑 소리가 울렸댔다.
누나의 어머니가 내게
‘의사 선생님이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같다고 하시더라’ 라고 말해주시는데
그 때 감정은 내가 아는 어떤 단어를 써도 표현할 수가 없다.
정말로..
내 심정을 눈치 채셨는지
어머님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시고는
누나와 나만 남겨둔채 밖으로 나가셨다.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힘겨워 하는 누나를 눈앞에 두고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옆에 앉아 손을 잡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께 기도라는 것을 해보았다.
몇시간이고 누나가 다시 눈을 뜨기만을 바라면서..
그 해 12월은 여지껏 겪었던 다른 모든 겨울들 보다 유난히 춥고 바람이 시렸었다.
오래된 추억이지만 지금도 혼자 조용히 눈을 감고 회상해보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다.
그녀의 목소리, 미소, 흐드러진 머리칼 까지도 모든 것이 기억난다.
나중에 장례식장에서 누나의 어머니를 통해 알게된 사실인데
누나가 병을 방치했었던 것은 치료비가 없어서도 아니었고
(집은 잘살았었다) 치료가 불가능 했었던 것도 아니었다.
누나 스스로가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그냥 살다가 자연스럽게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를 만났고 그때 다시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어머니 말로는 왜 다시 치료를 받으려하냐고 물어보니
‘그냥’ 이라고 했다더라.
하지만 재치료를 결정했을 때는 폐암이 이미 너무 악화된 상태였고
헌책방을 접고 병원에 입원한 시점에서
이미 누나는 3개월을 넘기지 못할 시한부 인생이었던 거였다.
나에겐 너무나도 아름답고 행복한, 또 그렇기에 슬프고 가슴아린 옛추억이다.
마지막으로, 인증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이게 누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줬던 그 책이다..
처음 받았을 땐 깨끗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색이 바래버렸다.
전에 어떤 만화를 봤었다.
오랜 짝사랑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 만화의 마지막에 있던 글귀가 굉장히 기억에 남는다.
‘추억은 현재를 살아가는 양분이 된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