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포항은
고향 군산의 앞바다를 반만 닮아 있었다.
조그만 반도의 두 항구도시가
달라 봐야 얼마나 다르겠냐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 속
군산의 분위기는 포항과는 사뭇 달랐다.
유년기를 지낸 군산은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 했고,
반대로 초등학생 때의 포항은 활기로 가득차
뭘 알아차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빠르게 변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시작된 포항의 재개발이
학년이 올라가며 주변 경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것도 한 몫 했다.
입학식 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찍은 사진 속 포항과
졸업식 날 속 친구들과 함께하며 찍은 포항은
같은 도시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격변하던 포항과의 인연은
중학교 이후 부모님을 따라 경남으로 집을 옮기며 끊겼다.
친한 친구들과 언젠가 만나자고 했던 약속은
경남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평생을 지방에서 산 내게 수도권의 화려함과
다채로움은 정신을 쉽게 빼앗기에 충분했으니까.
덕분에 내 어릴 적의 추억 속 포항은
도시의 빛에 바래 그저 그런 촌동네로 기억됐다.
하지만 그렇게 잊어버렸던 기억 속에서도,
섬망처럼 불현듯이 떠올라 나의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떠나버리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부끄러웠던 추억이었고
동창들 사이에서는 사건이 연상되는 일만 일어나면
무조건 이 이야기를 언급하며 폭소할 정도였다.
나는 처음에는 버럭하고 부정하거나
아예 주먹을 치켜드는 시늉까지 하며 이야기를 틀어막았지만,
그럴 수록 그들은 더욱 재밌어하며
그때마다 이야기에 살을 덧붙여가며 나를 골려댔다.
결국 지금에 와선 그저 웃으며 넘기게 되었지만
어렸던 그 때의 마음으론 견디기 힘들 정도로
슬프고 또 부끄러운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위해서 중학교 2학년 시절으로 거슬러 가보면,
한창 때의 중학생이었던 나와 무리들은
끓어오르는 충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온갖 사고를 일으키며
학년이 올라 정신을 차린 선배들을 밀어내고
학교의 떠오르는 골칫거리로 등극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중학생의 가장 참기 힘든 충동은
익히 알듯 성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순수할 수가 없었지만
당시의 우리들은 아주 작은 일에도
마치 대역죄를 저지르는 것 마냥 심적으로 고통받으며
성욕과 이성 사이의 줄다리기를 했더랬다.
마지막에 가서 이기는 것은 항상 성욕이었지만.
헌책방에서 성인 만화를 몰래 읽고,
얼굴이 삭은 녀석을 앞세워 야한 영화를 빌렸던가 하면
잘나가는 이들은 여자친구와 이런저런 일을 하기까지 했다.
어린 치기에 휩싸여, 하교길마다 옆구리에
누군가를 데리고 나가는 선배나 동급생을 보며
나도 저 사람처럼 애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던 날들이었다.
물론 학교의 여학생들과
나쁘지 않은 관계에 있던 적도 있었지만
그 관계는 발전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재밌는 놈이라 붙어있었던 것에 가까워
말하자면 미국의 스탠딩 코미디언과
그 앞의 관객같은 느낌.
깊은 관계는 추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 날의 열정은
함께 할 동반자를 절실히 찾아다니고 있었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았지만
매순간 저 사람과 함께라면 어떨까,
내 말에 웃어주고 재미있어해주는 저 사람은
혹시 내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렇게 여름방학까지 여자 손 한번 못 잡아본 나는
방학이 오자 무리를 지어 변두리에 삼삼오오 모여 놀거나
너무 더운 날이면 집에 틀어박혀
매미 짝짓기하고 싶다는 소리나 감상했다.
내 방의 창은 포항 해안가를 향해 나 있어서
자동차 지나가는 것이나 사람들 지나가는 것을
반나절동안 멍하니 지켜보는 것은
여름방학 동안의 주요한 취미 중 하나였다.
옆집에는 이사가 오는 모양이라
큰 짐을 싣은 트럭 하나가 온종일 앞에 서 있었는데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난 오후 4시 무렵엔
얼추 다 끝난 모양인지 트럭은 사라져 있었으나,
그 집 입구 앞 계단에 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나시 티와 반바지를 입은 그 아이는
긴 머리를 뒤로 묶어 내리고 부채를 흔들고 있었는데,
학교의 여학생들보다도 희고 맑은 얼굴에
홀린 듯 상체를 빼밀고 쳐다본 것이 기억난다.
몇 분이 지난지도 모를 무렵
아이가 나를 향해 갑자기 고개를 홱 쳐들었고,
정신을 차릴 무렵에 나는 이층 창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쿵쾅거리는 가슴만 부여잡고 있었다.
얼굴과 손바닥엔 땀이 방울져 흘러내려 셔츠를 적셨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창 밖을 빼꼼 쳐다봤지만
아이는 어디로 간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아랫층에서 어머니가 간식을 먹으라고 부르셨고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천천히 내려갔다.
밤에 잠이 들기 전까지 가슴은
오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멈추지 않고
요란히 두근거렸다.
그 아이를 다시 보게 될 때까진 오래걸리지 않았다.
새벽에 겨우 잠자리에 든 나는
오후에나 겨우 일어나 점심밥이 고파 아랫층으로 내려왔다.
비몽사몽한 탓에 어제 일은 까먹은 채였지만
그 일을 기억해내는데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없었다.
아랫층에서는 어머님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나는 어제의 그 이사온 내외가 방문했겠거니 하며
늦잠을 잔 날 위해 어머니가 으레 간단히 먹을 만한
주먹밥 같은 것들을 냉장고에 넣어두셨겠거니
하며 주방으로 향했는데,
그 옆의 화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어제의 그 아이가 나타났다.
정말로 놀라면 비명을 지르기보다
뻣뻣하게 얼어붙는다는 말이 사실인 것을 그 때 알았다.
내가 몇 초쯤 그러고 있자
그 아이는 대뜸 웃기다는 표정으로
“반갑다?”며 내 발끝을 툭 쳤다.
그러자 겨우 긴장이 풀려
간신히 누구냐고 물어볼 수 있었다.
아이는 자기소개 대신 “어제 왜 쳐다봤는데?”라며 묻기에
나는 당황하여 말을 얼버무렸다.
실랑이가 시작되려 할 무렵
옆집 내외가 거실에서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나오셨기에
다행히 말다툼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남편 쪽은 전형적인 안경잡이 샌님이었다.
다만 깔끔한 용모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상당한 호감상이었고
그가 나갈 때 강하게 내려쬐는 햇볕에 눈이 그늘져
눈가가 잘 보이지 않았던 것도 기억한다.
부인은 키가 남편과 비슷한 장신의 미인이었다.
남자는 내게 대뜸 악수를 제의했는데
워낙 경황이없어 대충 대답하며
끝맺음으로 잘 부탁한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와의 첫만남에서 들은 유일한 정보는
그 아이가 나와 같은 나이이며
방학이 끝나면 나와 같은 학교에서 지내게 될 테니
잘 부탁한다는 말 뿐이었다.
그러고 또 며칠이 지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방학이 끝날 무렵까지 서울에 가게 되셨고,
비가 며칠째 쏟아지며 내리는 터라
꼼짝없이 집에 틀어박혀있었는데
벨이 갑자기 울렸다.
누군가 하는 내 의문은 곧바로 해결됐다.
그 아이가 우산을 쓰고 대문 앞에 서 있었으니까.
나는 창을 열고 그 아이에게 “왜 왔는데?”라고 물었다.
그 아이는 대답 대신 묵직한 비닐봉투를 들어보였다.
“부모님이 전해달래. 열어라.” 며
나를 하대하는 듯한 어투에 상당히 기분이 나빴지만
그럼에도 그 아이의 미성 덕에
어쩐지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물건만 받고 내쫒을 생각이었지만 문을 열어주자
아이는 허락도 없이 집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종종걸음으로 거실 문을 슬며시 연 아이는
슬쩍 훑어보고 “니네 어머님은?”이라며
부모님을 찾는 듯 말하길래
일이 있어 서울로 잠깐 가셨다고 말해주었다.
“나도 그런데.”하며 아이가 봉투를 열자,
근처 떡집에서 만들어진듯한
큼지막한 시루떡이 들어 있었다.
“잘 먹을게.”하고 봉투를 받아들었는데,
나는 그 아이가 그러고 곧장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물건을 받아든 걸 확인하자마자
거실으로 들어가더니 “TV 좀 봐도 되나?”라면서
자기집처럼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우리 집엔 티비 아직 안 나온다’라며
떡값 받은 셈 치자는 것이었다.
나도 며칠간 혼자 있었던게 심심했던 터라
안될 것 없다며 허락했고,
우리 둘은 이따금씩 서로에 관해 몇마디씩 주고 받으며
늦은 저녁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광고가 나오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그 아이는
“니 밥할 줄 아나”면서,
할 줄 모르면 자기가 할 테니 밥좀 먹자며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한 김치볶음밥은 그냥저냥한 수준이었기에
밥을 먹는 시간보다 식탁에 앉아 떠드는 시간이 더 길었다.
이야기가 오고 가는 동안 잘 말하다가도
그 아이가 웃는 표정이라도 얼굴에 띄우려 할 때면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내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것인지
대화는 한 시간이나 이어졌고,
그동안 딱딱히 굳은 김치볶음밥은
결국 그 아이가 떠나고 나서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버릴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오시지 않는 날동안
나와 그 아이의 관계는 그런 식이었다.
늦은 오후에 벨이 울린다는 건
그 아이가 대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이고,
한 시간에 달하는 식탁 위 대화가 끝날 무렵은
내가 또 음식물 쓰레기를 비워야 할 때란 것을 의미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늘 오던 시간의 한 시간전부터
그 아이와 무슨 이야기를 할 지,
또 무슨 형편없는 음식을 먹게 될지 생각이 앞섰다.
그런 생각들보다도 더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그 아이에 대한 생각 그 자체였다.
눈을 감을 때도 보일 정도였으니까.
나는 점점 대담해졌다.
티비를 볼 때 옆에 앉은 그 아이의 손에 깍지를 껴 보면,
그 아이는 가볍게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탁 풀어버리는 장난을 즐겨 하곤 했다.
케이블 방송이 질릴 무렵이면
나는 영화 dvd를 대여해왔는데,
그 내용은 주로 공포영화였다.
그 아이가 몸을 밀착하면 할 수록,
영화의 공포 수위도 따라 올라갔다.
그렇지만 첫사랑 이야기가 으레 파국을 맞듯이,
내가 겪은 이야기도 결국엔 파국을 맞았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이 겪은 방식대로가 아닌,
내 경우는 많이 달랐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매일 하던 저녁식사 도중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이 말을 하려 했던 건 그 아이가 일주일 내내
우리 집에 왔던 그날 저녁이었지만,
말을 하게 된 것은 방학의 마지막 일주일 중 첫날이었다.
그런 말을 하게 된 근거도 있었다.
매일같이 집에 들락거린 데다가,
몸을 만지면 그것에 호응해줬다.
하루종일 이야기를 해도 모자랐고,
내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전에 집에 찾아온 그 부부 내외의 남편보단 못하지만
여학생들에게 호평을 받은 얼굴이기도 했고,
키도 또래 중에는 가장 컸으니까.
그 아이가 내 말에 항상 웃어주던 것도 한 몫 했다.
나는 그야말로 확신했다.
그 아이가 쑥쓰러운 듯 하면서도
결국엔 받아주리라 생각했지만,
돌아온 반응은 다른 것이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얼굴이 점점 꿈틀거리더니,
몇 분동안 쉴 새없이 웃었다.
한참을 그러고 나자,
그 아이는 웃음기가 채 안가신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아니, 진심이가?”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우리 사이에 그럴 때도 안 되었느냐고.
“아니, 니 괜찮겠나? 장난치나?”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장난이 아니라고 했다.
내 진지한 얼굴을 본 그 아이는 또 웃음을 참지 못하더니
이번에는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고 한참을 끅끅댔다.
나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아이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야 상관없긴 한데..
니 나 남자인거 알고 하는 소리가?”
이후로는 이미 말한 이야기다.
개학한 뒤로 나는 한동안 친구들에게
호모 사랑꾼이니 하는 온갖 별명이 붙으며
놀림의 대상이 됐고,
지금도 동창들은
나를 만나면 그런 식으로 농을 던지곤 한다.
이제는 웃어넘기는 추억이었지만,
그렇게 될 수 있기까지의
몇 달간은 심적으로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는 내 고백 이후로도 계속 집에 찾아왔다.
중학교 3학년, 내가 경기도로 올라가기 전까지.
그는 매일같이 나를 그때 일로 놀려댔고,
떠나는 날까지 내가 지금도 좋느냐며 나를 골려댔다.
고등학생이 된 그 이후로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동안 그를 만난 적은 없었다.
성인이 되고 우리가 만난 것은
우연스럽게도 다시 포항이었다.
해병대 제1사단. 그는 거기에 있었다.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긴 머리칼과 새하얀 피부.
그러나 사회에서의 유약한 모습은 버린 그는,
나의 선임이자 남성의 여섯 보 길이 만큼의
포신을 가지신 해병님으로 다시 태어나셨다.
해병님께선 그의 우람한 포신을 꺼내
나에게 재회기념 전우애를 제안하셨다.
나는 그때까지 사회의 티를 벗지 못해 오해를 하며
그분의 제안을 거부하는 찐빠를 냈지만,
해병님께서는 그런 모습도 사랑스럽다고
포용해주시던 것이 아닌가.
비록 다소간의 강제가 동원되었어도
그것은 흘러빠진 사회 티를 벗게 해주기 위한 것.
해병님과의 전우애는 그날 늦은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마치 우리의 여름방학 때의 나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