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이란 시간을 가까이
무능한 상사 및 직장 정치질에 시달린 끝에
결국 퇴사 결정.
휴식을 취해야만 다음 직장생활이 가능할듯 하여
몇달만 백수 생활을 좀 해보기로 결심함.
그렇게 백수로 살고 있던 도중
배달음식을 하루에 2번 이상 시켜먹는
정신나간 미친 자아를 발견
어떻게 직장 시절보다 돈을 더 많이 씀.
전부 식비로.
이러다가 다음 직장 가기 전에
거지새끼 먼저 되겠다 싶었음.
어차피 나중에 본업으로 돌아갈 생각이라
잠깐만 할 수 있는 일을 구하기로 결정함.
구글링 존나 돌려서
쿠팡 알바 글을 200개 정도 읽어봄.
나랑 딱이다 싶어서 바로 알바몬에 문자를 보냄
갑자기 담당자가 계약직 제의를 함
뭔지도 모르고 하겠다고 함
면접갔더니 기간 채우면 인센티브를 준다고 함
ㅇㅋ굳 하겠다고 함
출근함
아 ㅅ발 너무 힘듬
너무너무 몸이 힘듬
살면서 한번도 안 써본 근육들을 전부 써봄
집에 와서 잠만 잠
입맛 없어서 밥도 안 먹음
배달 안 시킴 잠만 잠
눈뜨면 쿠팡 감
가서 개처럼 일하고
거기서 밥 주면 그거만 먹고 삼
1일 1식
남자 직원들보다 밥 더 먹음
ㄹㅇ 걍 고봉밥임
구라 안치고 밥만 두공기씩 퍼서 먹음
한 입에 최대로 많이 먹으려고
입 와구와구 벌려서 먹음
왜냐면 숟가락 들 힘이 없어서 빨리 먹어야됨.
사실 나이 먹어서 숟가락 들 힘 애초에 없긴함
회사 다닐때 안 먹던 맥심 모카골드도 꼭 챙겨먹음
ㄹㅇ 이거 하나 먹으면 자양강장제가 따로 없음
거짓없이 3주차 지나니까 7kg가 빠졌음
인생 최저 몸무게 됨
고봉밥 먹어대는데 쭉쭉 빠짐
일이 너무 힘들고 이 힘든걸 3일 연속 하고
1일 쉬고 또 3일 하고
내 삶은 노동 잠 노동 잠 노동 잠
살 찔 틈 없음
노동할때 진짜 내가 기계가 된건지
기계가 내가 된건지 미칠 것 같음
첫 출근때 입고 간 회색티, 검정 바지를
3주째 똑같이 입고 있음
기본적인 꾸밈? 그런거 하나도 필요 없음
집오면 자고
눈뜨면 어제 그 옷 주워입고 쿠팡감
먼지가 너무 많아서 머리 안 감아도 떡이 안짐
일은 진짜 바보가 와도 할 수 있는 난이도임
미친 반복 작업과 no휴식임
기계처럼 일하다보니 현타가 와서
그냥 상황을 설정하고
설정에 흠뻑 빠져서 일해보기로 함
즉 알고 보면 이곳은 러시아 노동교화소임
나는 사실 독일 포로수용소에 끌려갔다가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잡혀서 노동교화소에 갇힌 거임
그래서 쿠팡 3개월 형을 받음
그리고 사실 이름은 사브리나임
사브리나는 반복적인 일을 기계처럼 해야함
휴식 없음
느려지면 잔소리 들어옴
가혹한 간수 막심이
사원님! 속도 신경써주십니다! 라고 말함
내가 배정받은 교화소는 무한 이기주의가 가득함
그동안 본 후기에서는
쿠팡가면 서로 서로 관심도 없고
개인플레이 한다고 했는데
이곳은 서로에게 관심이 많아서
맨날 흉보고 험담 쩔고 텃세가 미쳐 돌아감
내가 좀 느려지면
고인물+ 연세있으신 사원님이 엄청 뭐라고 하고
다른 사원들하고 낄낄 거리면서
나랑 눈 마주치면서 대놓고 앞담화를 함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순간.
내가 무거운 걸 들어야 하는데
옆에서 손이 나타나더니 쓕 가져가 버리고
또 무거운 걸 끌어야 하는데
옆에서 손이 나타나더니 쓕 밀어주고
허리가 너무 아파서 잠깐 주저앉았더니
내 자리에 대신 와서 노동을 커버해주는
이 교화소에서 있을 수 없는 이타적인 상황이 일어남
그것도 나에게.
심지어 실화임
상상 아님
이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 2시간 4시간 6시간 계속되자
나는 그 손의 주인과 이미 영혼결혼식 해버림
다음날도 계속되는 호의
그리고 그 손의 정체가 내 이름을 물어본 순간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음.
‘아 이게 바로 인터넷 세상에서 보았던
쿠팡에서 알바하다가 노비끼리 눈맞는 기분 그건가?’
라고 생각했지만
개오바하지 말자.
그냥 흔한 친절일뿐.
‘지금 나의 이런 착각은
나는 솔로에서 상추쌈 한번 싸줬다고
미쳐돌아서 혼자 질주하는 영철같은 짓이다’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곱게 접어봄
이때까지 나는 손 주인의 이름도 몰랐음.
며칠 후 나는 일하다가 부상을 당해
혼자 절뚝거리고 있는데
주변 고인물 사원은 동정을 커녕
아프면 집에나 가라고 면전에 대놓고 말해서
인류애를 상실하였으나
내가 다리가 부러질 지언정
조퇴하기엔 일당이 아까워 참고 있었더니
하
절뚝이는 나를 목격하고
그가 대신 관리자에게 제보를 해주고
어디서 부목 비슷한걸 구해와서 응급처치를 해주고
그리고 내 몫의 일까지 대신 해주는 그 순간
나와 그는 장차 1남 1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 것이 예정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인데
이 교화소에서 나가면 반드시
푸른 들판에 아궁이를 놓고 밥을 지어
소박한 결혼식을 하리라 결심함.
이후에도 노동 교화는 똑같이 반복되는데
매일 다친 데는 괜찮냐고 물어보는 세르게이
비록 마스크 아래의 얼굴은 모르지만
이미 폴인럽
이미 쿠팡에서 유모차 장바구니에 추가해둠.
아무튼 그러다 4주차가 됨
잠에서 깨어 대충 씻고 셔틀버스를 타고
세상 모를 꿀잠을 자고 일터로 향하는 4주차
사람은 적응의 동물임
나는 이 유형의 노동에 은근 적응되었음
이젠 더 이상 고봉밥을 먹지 않음
저봉밥으로도 노동 쌉가능함.
밥 받으면 걸신 들린듯 먹지 않고
일단 핸드폰부터 켜는 삶의 여유가 생겼음
쿠팡밥에 대한 만족도는 여전히 높은 편임
나는 이 생활 이후 ‘외식’개념이 없어진 터라
쿠팡밥이 일용할 양식임
지난 직딩 생활동안 젤 아까웠던게
별로 친목쌓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과
딱히 즐겁지도 않은 식사를 하며
끼니당 6천원 7천원 8천원을 지출해왔던
점심밥값인데
그게 사라지니 너무 행복했음.
3주차 때 내 다리에는 멍이 수십개
나중에 인생 망하면
힘든시절 회상할때 보려고 사진도 찍어 챙겨둠.
4주차 여전히 멍은 수십개
하지만 지난주보다 덜 아픔
확실히 덜 피곤하고 덜 힘듬
도대체 이정도 강도의 노동을
어떻게 계속 한다는 거지?
라는 의문은 시간이 해결해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적응 못할 일이 없었음
사실 시간이 다 해결해 준 건 아니고
각종 파스와 맨소래담 로션 타이거밤 한의원 침 등
버텨보겠다고 이것저것 해본게 도움이 됨
돈이 해결해준거임
돈이 최고임
3주차 때 이 노동 유형의
단점 위주로 생각을 많이 해봄.
일단 너무 힘드니까
과연 내가 이걸 계속 할 수 있을까 싶었음
그렇다면 단점만 있는데 이 일을 하는 것이냐
그건 아니고 확실한 장점이 있음
나는 이 일을 하면서 하루에 1번도 웃지 않아도 됨
매우 장점 몹시 장점임
지난 세월동안 나는 덧없는 웃음을 매일 지어왔음
감사하지 않은데 감사하고
죄송하지 않은데 죄송하고
밝은 인상과 솔 톤의 목소리로 밥벌이를 해왔음
쿠팡일은 8시간동안
죄송타임 감사 타임이 없음
그동안 강요 당해왔던 가짜 자아가
휴식을 할 틈이 생김
하루 종일 무표정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축복임
쿠팡 일이 큰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님
하지만 일을 마치고 집에 갈 때
내 머릿속 ‘업무’ 폴더가 깨끗하게 비워져있어서 좋음
오늘 있었던 짜증나는 상황, 내일 해야할 업무
다음주의 회의, 보고서?
이런 생각 안해도 됨
쿠팡에 오기 전
재주넘는 곰과 돈 챙기는 왕서방이 있었음
이 관계에서 나는 ‘곰’을 담당함.
나쁘지 않았음
왕서방은 곰에게 먹이를 줬음
나는 더 기이한 재주를 부리려고 노력도 했었음
내가 재주를 잘 부려도
왕서방이 그만큼 먹이를 늘려주지 않는건 알았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재주를 부리면서
안정적으로 살아보려고 했음
문제는 내가 앞구르기를 하다 하다 너무 힘들면
왕서방은 옆돌기를 하라 시키고
내가 상모 돌리기를 하다 지쳐 쓰러지면
왕서방은 “힘들지? 쉬엄쉬엄 개다리춤을 추렴”
이런 식으로 날 열받게 했는데
뭐 이런 열받음도
다 월급에 포함된 거다 생각하고 참음
근데 그 서커스단은 왕서방, 왕서방 누나, 왕서방 동생
너무 챙길 왕씨들이 많았음
내가 곰이면 곰이지 뇌가 없는 곰도 아니고
다른 왕서방 찾아 가겠다고 하니
그때서야 먹이를 더 주겠다 함.
근데 그 먹이 먹으면 체할 것 같아서
뭐 그래서 쿠팡 타임을 갖게 된건데
사실 이곳에서 무한 장작 나르기를 하면서
혹시 내가 재주 넘는 방법을 까먹지는 않을까
다음 왕서방 앞에서 트리플 악셀을 잘 해야 할텐데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함
여기까지 읽을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진 자들은
그래서 도대체 세르게이는 언제 얘기할건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음
지금 할거임
세르게이와 나는 휴무일이 계속 엇갈렸음
내가 쉬면 그가 일하고
그가 쉬면 내가 일했음
이게 반복이 되니 2일씩 3일씩 보는 날이 많아짐
이게 다 쿠팡 조짜는 새끼들 때문인데
출근할 때 아 오늘은 세르게이가 있는 날이지
라고 인지하고 있는 내가 싫기도 했음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의미부여 하지 말자고
일부러 인사도 잘 안하고
좀 딴데 가서 처박혀서 외면하고 그래도 봤음
그런데도 세르게이는 꼭 먼저 인사도 해주고
다친 데는 괜찮은지 항상 물어봐줬음
하지만 나는 그건
세르게이가 누구에게나 인사도 잘하고
모든 동포의 발목 건강을 챙기고자 하는
그런 사람인 거니까
더이상 셀프 상추쌈을 싸지 말자
이렇게 냉정하게 내 감정을 통제했음
내가 속한 작업장 사람들은
사실 착한 사람들은 맞는데
워낙 고여있어서 그런건지
누구 1명만 없으면 뒷담화를 함
나는 그게 너무 싫음
예전 직장 곰돌이끼리
서로 시기 질투하는 것도 싫었는데
이건 뭐 실적 경쟁 이런것도 아니고 시기할 것도 없는데
단순 뒷담화를 함 걍 습관 같음
그런데 밥 시간에 사람들이
내 짝사랑 세르게이 뒷담화를 시작했음
갑자기 짜증이 존나 났음
근데 뒷담화 내용이 좀 웃겼음
세르게이 그 시키는 싸가지가 없어
주변 사람을 돕지 않아
세르게이는 뺀질거려
세르게이 걔는 일 시켰더니
쫌 해보고 못한다고 튀더라니까?
라는 식의 내가 전혀 목격한 바 없는
주변 사람을 돕지 않고
일을 열심히 안하며 뺀질거리는 세르게이
하 너무 좋음
이 세상 모두를 돕는 세르게이가 아니고
나한테만 친절한 세르게이임
그 뒷담화 계속 듣다가는
또 폴인럽 할것 같아 자리를 떴음
구석에 짱박혀 있는데 세르게이가 오더니
왜 밥을 먹다가 마느냐
왜 사람들이랑 쉬지 혼자 있느냐
이러는데 웃음이 실실 나왔음
“사람들이 너 존나 싸가지 없다는 말
듣기싫어서 나온건데?”
라고 할 수 없어서 걍 아픈척했음
다음날은 내가 휴무라서 세르게이를 못봤음
내가 영철 꼴 나지 않게 하기 위한 쿠팡의 빅픽쳐임
자주 못보게 계략을 짠 것 같았음
다음날 일하러 갔는데
세르게이가 상태가 안 좋아보였음
얼굴도 왠지 하얗게 질려있고
당장 무릎에 올려두고 밥을 떠먹이고 싶은 몰골이었음
그런데 전지전능한 쿠팡 관리자가
세르게이가 장작 차에 올릴때
나보고 같이 좀 도와주라고
오늘 사람 부족해서
세르게이 혼자 장작 날라야 된다고 해서
너무 짜증나서 신나게 달려간 뒤 계속 장작을 올려줬음
그때마다 세르게이가
지가 혼자 할 수 있다고 나보고 쉬라고 했음
심지어 장작 올리는 타이밍에 나를 안부르고
본인 혼자 몰래 가서 올리다가 나한테 계속 걸렸음
내가 왜 혼자서 드느냐
저 전지전능한 쿠팡 고급 조끼 입은 사람이
나한테 너 도우라고 했는데 라고 하니
세르게이는
사브리나씨가 다른 일 하다가
이거 하러 오는게 더 힘들 것 같아서
라고 말을 흐리는데
그 말을 하는 세르게이의 사슴같은 짝눈은
그저 가냘픔의 미학 그자체
그리고 나는 세르게이가 출근하는 날은 꼭 머리를 감고
무려 정수리 냄새 제거까지 다 하기 때문에
가까이에 서서 머리를 숙이고
장작을 들어올리는 동작에 자신이 있음
나는 그날 내 등허리를 장작에다가 바쳤음
그날 이후로 작업장에서
내가 장작 나르는걸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는데
아무 장작이나 좋아하는건 아님
세르게이와 같이 나르는 장작을 좋아하는거임
그날의 퇴근길
작업장에서 나와서 걸어가는데
왠지 세르게이와 마주치고 싶었음
돌아보지 않았어도
뒤에 있는거였으면 좋겠다 생각도 했음
내가 많이 마음이 헛헛한가보다 자괴감
다음날은 역시나 쿠팡 세계관에서
나와 세르게이 갈라놓는 날
그리고 그 다음날이 24일
나는 25일 출근
세상에 대해 한껏 비뚤어져있던 나는
분노 에너지를 모아 장작을 쌓았고
장작 쌓고
장작 나르고
장작 치우고
아 여러분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 퇴근 안녕히가세요
이게 만약 드라마 내용이였다면
아마 나는 티비 꺼버렸을거임
세르게이랑 아직 이뤄진 사랑이 아니라서
결말 딱히 없음
내일 또 노동할려면 일찍 자야해서 여기까지 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