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묘하게도 이사를 많이 다녔고
늘 단칸방에서 여동생과 부모님 네가족이 지냈었다.
아침 부모님이 출근할때 한끼.
저녁 부모님이 출근할때 한끼.
그중 한끼는 보통 라면이였다.
피자같은 비싼 음식은.. tv에서나 구경하던 음식이였고,
스무살이 넘어서야 처음 먹어봤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햄버거 피자 치킨을 좋아한다.
난 친엄마가 누군지 모른다.
아버진 갓난 나를 데리고 재혼을 했고
그사이에 여동생이 태어났으며,
난 새엄마와 외가에서 대놓고 차별받으며 지내왔다.
가난한 우리집이 잘사는 외가집엘 가면
늘 시켜주는 양념치킨의 다리는
언제나 동생거였고, 난 먹어본 적이 없다.
내 인생의 첫 외로움 이였다.
철거촌에서 자랐다.
부서진 집들 사이에서 잘도 놀곤 했다.
지독한 가난함을 어려서부터 체감했는데,
철거촌 주변은 죄다 잘사는 아파트였고
그들과 같은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스승의날 싸구려 브로치 선물에
머리를 쥐어박던 선생의 이름은 아직도 기억한다.
고마웠던 선생님들의 이름은 기억 못하면서..
친구가 먹다버린 햄버거를 몰래 주워
부서진 집 구석에서 먹었고,
아파트 주변의 버려진 장난감을 집근처 빈집에 모았다.
어느날 아침 철거된 그 빈집의 잔해에
열심히 모았던 장남감들은 철저하게 짓눌렸고,
내 인생의 첫 상실감 이였다.
아버지는 지나치게 폭력적이였다.
폭력 이상의 폭력.
난 어려서부터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의식을 잃을 때까지 목이 졸린다던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발로 차여
피를 토하며 기어다닌 적도 많았다.
가장 무서웠던건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트리는거였다.
내 손가락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부러져본적 있는 그런 손가락이다.
중학생 때쯤.
내 동생의 어머니와 이혼하고
다시 재혼한 어머니의 도움으로
그나마 목숨을 위협받는 폭력에선 벗어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새어머니..
아니 내 인생의 첫 진짜 어머니였다.
늘 책을 읽고 늘 글을 썼다.
나의 꿈은 글쟁이였고,
고1때 당선된 공모전을 통해
구체적으로 글쟁이의 꿈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글쟁이로 빌어먹을거면
집을 나가살라는 폭력에 못이겨
고1.. 어린나이
아무것도 없이 집을 나오게 됐다.
준비되지 않은 이른 첫 독립.
청소년 보호시설이 전무하다 싶은 그때는
나를 노숙으로 몰았고.
친구집과 공원을 돌아다니며
그래도 학교는 겨우겨우 다니긴 했었다.
추운 겨울엔 벼룩시장같은 무가지를
잔뜩 옆구리에 끼고 공원 화장실에 들어갔고,
변기옆에 쪼그려 잠이 들었고,
추위에 잠에서 깨면
그 신문지를 태워가며 다시 잠들곤 했다.
얼어죽는다..
라는 경험을 지독하게도 했던 학창시절이였다.
손가락이 동상에 걸리고
신문을 태운 그을음에 거멓게 된 나를
선생님이 조퇴시켜
본인의 집에서 재울 때의 그 따뜻함..
아직도 잊을 수 없어
나는 따뜻함을 아직도 사랑한다.
내 인생의 첫 만족감이였다.
근처 그린벨트의 배수구 출구에서
잠을 자는경우도 많았는데,
여름엔 나름 시원했고.
겨울엔 야외보단 따뜻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단 이유가 가장 컸었던거겠지.
커다란 배수구에서 잠이 들다가
폭우라도 쏟아지면,
엄청나게 갑자기 내려오는 물들에 온몸이 흠뻑 젖었다.
젖은 옷과 얼굴로 꼽등이같은 벌레들이 들러붙었고,
그건 영 익숙해지지 않는 공포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천둥소리에 트라우마를 겪는다.
쿠웅..쿠우웅..
배수구 사이로 울리는 천둥소리의 기억은
비가 올 때마다 아직도 날 괴롭히곤 한다.
내가 가진 첫 트라우마였다.
난 웃기게도 짬뽕에 대한 트라우마를
서른이 넘어서 극복했다.
그 노숙하던 고등학교 3년의 시절에
늘 따라다니던 배고픔의 고통은
한여름에 집앞에 놓여있는 짬뽕그릇에
손을 대게 몰아세웠고,
상한냄새를 풍기는 그 국물을
탈이날걸 알면서도 들이키게 만들었었다.
짬뽕이라는 글자에는 아직도 그때의 상한내가 묻어있다.
삼일을 굶어봤었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앉아 지쳐있던 내게
밥을 사주는 고마운 사람이 있었다.
평범한 백반.
지독한 배고픔에도 나는 반공기도 먹질 못했다..
너무 굶은 위장은 들어오는 음식에
포만감보다는 고통을 느꼈고,
나는 그 고통으로 먹지 못하는 음식을 두고
통곡 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인생의 첫번째 서러움이였다.
노숙생활로 젖어있던 고등학교 내내,
그래도 성적은 최상위권이였다.
늘 전교 10등 안쪽.
물수능으로 유명한 때였지만
그래도 수능에서 단 세개만 틀렸고
꽤 좋은 대학에 붙었다.
공모전에 입상한 이력으로
모기업의 도움도 받아 대학교에 입학할 수도 있었고
졸업 후 그 회사에 취업까지도 할 수 있었다.
내 인생의 첫 행운.
하지만 내 인생따위,
이 행운이 마지막이였다는걸.. 이제는 안다.
30대 초반.
결혼하고싶은 여자가 생겼다.
삼년이나 연애하고 결혼준비 하는중에,
가족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마주했고
여전한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결혼할 여자는 아이가 있던걸 숨겼고,
그 사실을 내가 알게되자마자 잠수를 타버렸다.
아마도 어쩌면 유부녀였었을지도.
처음 느껴보는 배신감.
30대 중반.
아버지가 지붕눈을 치우다 떨어져
오랫동안 병원생활을 했다.
모은 돈을 병원비로 빨리기 시작했고,
결국 패혈증으로 돌아가셨다.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30대 후반..
집과 연을 끊고 살았어도
연락도 하며 사이 좋았던 여동생이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아이를 차사고로 잃게 됐고
1년뒤 여동생도 스스로 죽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자궁암에 걸린 어머니의 병원비로
전재산을 탕진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아무 감정이 느껴지질 않는다.
뭔가 지독한..어떤 감정이 있긴 한거 같은데,
뭔가 결여된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난 영양실조다.
임플란트 하려고 죄다 뽑아논 어금니는
어머니의 병원비로 심질 못했다.
우울증에 시달린다.
공황에 시달린다.
뇌종양 치료중에 담담히 웃기는 인생을 써본다.
내 첫 인생 이야기.
내 인생이 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