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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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뭔가에 부딪혔다. 아니 내가 뭔가를 들이받았다.

운전대에 얼굴을 묻은 자세를 유지한 채 나는 길게 몇 번의 심호흡을 했다.

내 술냄새를 내가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과음을 했다.

“아….X발…”

이마에 따끈따끈한 액체가 흘러내린다.

아마도 머리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에어백이 터졌음에도 밸트를 매지 않아 창에 머리를 받은 모양이었다.

조수석을 돌아보니 오늘 나이트클럽에서 꼬셨던 여자애가 없었다.

“X발년….날 두고 도망쳐?”

나는 천천히 차문을 열고 나왔다.

주변에 안개가 엷게 끼어있음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차의 보닛(bonnet)부분에서 불이 난 것처럼 증기가 올라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가로등을 끼고 있는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것이다.

어른거리는 와중에서 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 있을 힘도 없었다.

나는 가드레일을 등지고 자리에 앉아 몸을 쉬었다.

음주로 경찰에 걸리고 안 걸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지금은 쉬고 싶었다.

사고 후 3분도 안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거슴츠레 뜬 눈으로 그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였다.

멀리서 경광등을 반짝이며 달려오는 차량이 보였다.

“짭새 새끼들…졸라 빨리오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들이 나를 데려가기만을 바랬다.

내 옆에 차량이 멈춰서고, 차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괜찮아요?”

“…..”

나의 불규칙한 숨소리와 냄새를 느꼈는지 그는 말을 이었다.

“아저씨 술마셨구만?”

나의 대답이 없자 그는 나의 어깨를 툭툭치며, 뭔가를 내 밀었다.

“아저씨 내 명함이니까, 아침에 차 찾아가쇼…”

“뭐여?”

나는 그의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경광등을 밝힌 그 정체는 견인차였다. 경찰이 아니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쪼그려 앉아 나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이마 찢어졌네…병원에 빨리 가보슈. 그리고 곧 경찰 올텐데 빨리 이 명함 챙기쇼….”

그는 내 오른쪽 상의 호주머니에 명함을 끼워넣더니 내 차량을 견인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 견인되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견인차가 멀어지는 소리로서 그가 이곳을 떠났음을 알 수 있었다.

“푸우….X발놈들..돈이 되면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거군.”

나는 몸이 휘청거리는 상태에서도 정신은 제대로 박혀있었는지 그 남자의 무성의함에 넋두리을 했다.

늦은 가을이라 그런지 반코트를 입고 있음에도 무지 쌀쌀했다.

나는 반코트를 꽉 움켜쥐고 품 속으로 더 밀어넣으며, 체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낯선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아저씨….추워요….”

“나도 추워….”

나는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

“아저씨….추워요….”

나는 갑자기 확 짜증이 밀려왔다.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그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

“아 ㅆ발!! 나도 춥다니까!!”

엷은 안개속에서 가드레일을 따라 10여미터 앞에 웬 낯선 여자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 여자의 모습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올 수록 그 모습은 나를 더욱 스름끼치는 전율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원피스를 입은 온 몸이 물에 젖어있고 청백색의 피부에 소름끼칠 정도로 검은 눈과 긴 생머리…. 짙는 눈썹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그 여자가 나를 향해 두 발을 질질 끌듯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저씨….추워요….”

“헉!!!!! X발 당신 뭐야?”

나는 갑자기 순식간에 체내의 알코올 모두 분해된 것처럼 정신이 확 깼다.

“아저씨….여기…너무…추워요….”

점점 더 다가올 때마다 선명해지는 그녀의 모습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피부가 심하게 뜯겨있었고, 피부밖으로 노출된 뼈가 여기저기 보였다.

특히 왼쪽 뺨은 피부가 거의 다 벗겨져, 속의 어금니까지 보였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고, 등골이 송두리 채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나는 등 뒤의 가드레일을 지지대로 삼아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뭐야..X발!!! 가..가까이 오지마….”

나의 요구에도 그녀는 두발을 질질 끌며 천천히 내 앞 2미터까지 다가왔다.

“따다닥…따다닥…따다닥”

오한을 느까는지 그녀의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터진 왼쪽 뺨 사이로 새어 나왔다.

“아~악!!!!!! 이…X발 오지마!”

나는 내 몸을 제대로 주체할 수 없는 와중에서도 춤을 추 듯 그녀를 향해 발길질을 하였다.

바로 그 때

“이봐요, 아저씨!!!!!!!”

낯선 남자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획 돌렸다.

택시였다. 택시기사가 창을 열고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대답도 없이 미친듯이 택시의 뒷자석에 올라탔다.

나는 타자마자 얼굴을 두 손으로 감사고 그에게 부탁했다.

“아저씨!! 아무 병원이나 가요. 빨리요!!”

“알았소이다.”

택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터기를 누르고 잽싸게 출발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뒷창을 통해 그녀를 확인했다.

멀어지는 시야속에서 우두커니 나를 지켜보는 그녀가 보였다.

“헉…X발!!”

나는 재빨리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뭘 그렇게 놀라슈?”

50대로 보이는 택시기사는 나의 안절부절하는 행동이 기이한 듯 물었다.

“아저씨, 그 여자 봤어요? 무섭게 생긴 여자..”

“무슨 여자요?”

“방금 전 내 앞에 있던 여자 말예요!!”

“아이고…냄새야….오늘 과음하셨구나. 이마도 다치시고…”

기사는 내 말에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룸미러를 통해 내 상태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저씨!!!!!!! 그 여자 봤냐구요?”

“못 봤는데요.”

택시기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의 유난스런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앞 좌석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다시 소리쳤다.

“바로 내 앞에 있었는데 왜 못봐요!!!!”

“아이고 깜짝이야!!! 못 봤다니까요…이 양반 많이 취하셨네…시트에 피묻히지 말고 앉아 있어요!!

거 참 젊은 양반이 이 새벽에 뭔 짓이래?”

택시기사의 꾸지람에 나는 앞 좌석 사이에 들이 밀었던 머리를 뒷좌석에 던지듯이 눕혔다.

나는 길게 몇 번의 심호흡을 한 후 조금 전의 기억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봐!! 젊은 양반!! 일어나!!”

얼마되지 않은 사이에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기사의 부름에 나는 천근만근같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거슴츠레 뜬 두 눈에 응급실과 병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병원은 사고지점에서 한 참 떨어진 곳이었다.

“뭐야? 누가 여기까지 데려 오래?”

순간 미터기에 찍힌 27,000이란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X발…사기꾼같으니라고…”

나는 얼른 택시 밖으로 기어나왔다.

따뜻한 곳에 있었기 때문인지 다시 견딜 수 없는 취기가 몰려왔다.

나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운전석에서 내린 택시기사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아무 병원이나 가자며?”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나는 비틀거리며 그의 멱살을 잡기 위해 달려 들었다.

“이..씨X….누굴 등처먹으려고..”

기사는 내 두 손을 움켜쥔 채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야 임마!! 내 택시안에 니 피 묻힌 값은 내놓아야지…”

“이…X발놈…”

그 순간 택시기사는 들것을 밀고 병원 직원이 나오는 것을 보자 나를 밀치고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야 임마!! 이따가 정신차리면 돈 받으러 올테니까 치료나 잘 받고 있어.”

열린 창문 틈으로 이렇게 한 마디 내뱉더니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차를 몰고 달아났다.

내게 다가 온 직원이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물었다.

“싸워서 다친겁니까?”

직원의 친절한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말은 여전히 거칠었다.

“몰라..X발 새끼들아!!!”

이 말을 들은 직원들은 나를 제압하고 들것 위에 눕혔다.

나는 누워서 실려가는 와중에도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그 기사 X발놈…죽여버리겠어….개새끼….”

응급실 내로 들어서자 그제서야 나는 내 두 손과 두 발이 골절환자의 부목처럼 들것에 묶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야…X발 니들 뭐하는거야?”

직원들은 나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없이 수술실로 나를 이동시켰다.

“야… X발놈들아!! 나를 왜 묶어? 내가 정신병자야?”

나의 괴성에 그제서야 들것을 밀던 직원 한 명이 내려다보며 답을 했다.

“이봐요, 수술하다가 움직이면 당신 얼굴 찢어지는 수가 있어.”

수술실로 들어서자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났다.

담당 의사에게 나를 맡긴건지 그들은 모두 수술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야!! 이것 좀 풀어줘!!!”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바동거렸지만 도저히 내 힘으로는 벨트의 장력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야!! 이 X발 놈들아!!”

나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안개가 낀 것처럼 세상이 뿌옇게 변했다.

‘안개…뭐야? 병원에 웬 안개?’

잠시 후, 내가 잠시 잠잠해지자 한 사람이 조용히 들어와 내 옆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 사람 배경에 비치는 조명등 때문에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실루엣으로 보아 여자 간호사임이 분명했다.

“뭘 쳐다봐?”

나는 아직도 분노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나구?”

내 말에 그 검은 실루엣은 아무 말없이 주사기에 약을 채워 바늘을 통해 공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헤이….이 봐…지금 뭐하는거야?”

그녀는 아무런 응답도 없이 주사기 안의 공기를 다 밀어내었는지 조용히 머리를 숙여 나에게 다가왔다.

그 검은 실루엣의 얼굴이 나에게 충분히 가까워지자 나는 비로소 그 실루엣 속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만일 놀라서 죽는다면 이렇게 죽을 것이다.

그녀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시뻘건 피가 새하얀 얼굴에 수많은 세로선을 긋고 있었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속으로 하얀 치아가 드러나 보였고, 그 하얀 치아 틈 사이로 흘러내린 핏물이 채워지고 있었다.

“후..X발…”

숨소리같은 나의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내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근육세포들이 멈춰버렸다.

그리고 난 의식을 잃었다.

“이 놈아..정신 차렸냐?”

흐려진 초점이 윤곽을 잡아가자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아버지임을 알아보았다.

“개놈의 자식..나이 처먹고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네.”

아버지의 푸념에는 이제 이골이 났다.

“변변한 직업도 없는 놈이 술처먹고 쌈질이나 하고 다니니.. 이거 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오른쪽 이마가 욱신거려 손을 가져다 대었다.

두툼한 반창고가 만져지는 것으로 보아, 어제 다쳐서 꿰맨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싸움 한거 아니거든요..”

“이런 미친 놈. 그럼 어디 전봇대라도 들이받았냐?”

“에이..좀 그만하세요.”

그 때 침대 커튼을 열어 젖히고 누군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간호사였다.

“으헉!!!”

나의 비명소리에 간호사가 물었다.

“괜찮으세요?”

나는 잠시 긴 한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자분 나가실 때 싸인하시고, 원무과에 치료비 납부하시면 됩니다.”

간호사는 사무적인 말투로 아버지에게 말을 건넨 후 뒤돌아 걸었다.

“아버지…나가기 전에 여기에 만날 사람이 있어요.”

“뭐? 누구?”

“간호사요. 꼭 봐야 될 간호사가 있어요.”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버지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내가 어느 정도 예측한 대답을 날리셨다.

“이런 미친 놈. 너같은 양아치 새끼가 간호사를 어떻게 알어? 어디 또 하나 후려서 어떻게 해보려고?”

“아버지 그게 아니고..”

“그만 닥치고 나갈 준비나 해.”

난 아버지에게 저항할 수가 없다.

잘 생긴 외모와 부잣집 아들이라는 이유로 나에겐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

많이 따른만큼 내 생활은 난잡해져 갔다.

여자를 건드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고, 임신 중절만도 몇 번은 되는 것 같았다.

상습 음주운전으로 몇 개월 실형을 살아본 적도 있고, 조폭 여자를 건드려 살해 위협을 받아본 적도 있다.

아직까지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버지가 엄청난 돈을 썼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금액만도 1억 5천이 넘었다.

그런 엄청난 빽이 되어 준 아버지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 철창 속 어두운 골방에 처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외투를 걸치고 아버지를 뒤따라 나섰다.

그런데 그 때 우리 앞에 경찰 복장을 한 두 사람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성태씨?”

“네?”

경찰의 물음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역시나 옆에 있던 아버지의 호통이 시작되었다.

“이런 미친 놈..너 또 사고쳤냐?”

나이가 있어 보이는 한 명이 나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ㅇㅇ경찰서 교통계 최정수 경장입니다. 어제 새벽 ㅇㅇ동, ㅇㅇ대로에서 차로 가로등을 들이받고 도주를 하셨더군요.”

“뭐요? 제가요? 전 차를 몰지 않았는데요”

이럴 수가….분명히 견인차가 내 차를 끌고 갔는데….이런 혹시 그 견인차 운전자가 불어버린 건가?

아니면 어제 나이트에서 꼬셨던 그 년이 불어버린 것인가?

“그럼 이마에 난 그 상처는 뭡니까?”

“이..이거요? 술 먹다가 옆 테이블 애들하고 싸움이 붙어서…”

“조사하면 나올테니까 일단 서로 같이 갑시다.”

“아니..내가 운전을 안 했다는데 무슨 증거로 가자는 겁니까?”

내 말에 그 경장은 허탈한 웃음을 한 번 짓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 장난하는거요? 당신 차의 앞유리하고 에어백에 난 핏자국 당신 거 아니면 뭐요? 국과수에 넘겨 볼까요?”

“에이…X발..”

나는 머리를 털 듯이 긁적이며 욕설을 내뱉았다.

옆에 서 있던 아버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한 마디를 내뱉고 병실을 나섰다.

“난 싸인하고 간다.”

경찰차에 실려서 경찰서로 향하는 동안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유지한 채 아무 말없이 앉아 있었다.

“서른도 안된 젊은 양반이 경력이 화려하대.”

뒷자석의 금속봉에 채워진 수갑이 어제 나를 묶었던 들것의 밸트보다 더 단단히 나를 잡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때 나는 궁금한 게 하나 떠올랐다.

“아저씨..뭐 하나 물어봅시다.”

“뭐요?”

“내가 사고난 것 누가 불었소?”

“누가 불다니?”

“아니… 견인된 차 어디서 찾았냐구요?”

“뭔 소리야? 당신 차.. 사고 현장에 그대로 있었구만.”

“뭐요?”

나는 순간 머릿속이 잘 정리되지가 않았다.

“아이…X발…뭐가 어떻게 된거야?”

그 때 문득 나는 머리 깊은 곳에 묻혀져 있는 작은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명함!!”

견인차 운전사가 주고 간 명함…..

나는 이곳 저곳 내 호주머니를 뒤졌다.

이윽고 오른쪽 상의 주머니에서 명함 대신 작은 쪽지가 손에 걸렸다.

-사일런트 엔젤 010-9453-xxxx –

“뭐야 이거….”

쪽지에 적힌 엉뚱한 메세지는 그 내용만으로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적힌 글씨체는 내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쳐들고 푸념섞인 말을 내뱉았다.

“헐..X발…미치겠네.”

이 말에 앞 좌석의 두 경찰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이봐 친구, 왜 그래?”

교통계 조사를 받는 내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경찰들이 내 말을 믿어줄 것인가만 생각했다.

“야…그러니까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레커차가 니 차를 끌고 간 다음 너는 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갔고, 그리고 치료받고 아침에 일어났단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서 왜 차 두고 도망쳤냐고 하더라 이거야?”

“아이씨..진짜 미치겠네…”

“너, 술 어지간히도 취했나 보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는 가중처벌을 받을 게 뻔했다.

상습 운전으로 실형을 살았는데 이번엔 좀 세게 맞을 수도 있다.

“야 임마…대한민국에서 가장 효과만빵의 정상참작이 뭔지 알아?”

“….”

“초범이라는거야. 대한민국 그 어느 판사도 초범에 대해서는 관대해.

그런데 너 같은 놈은 일말의 정상참작의 여지도 없어.”

나는 교통계 경찰을 응시한 채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나는 그의 불친절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잠시 후 나는 억지로 평안한 표정을 지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저씨…한 번만 봐 줘요..제가 누굴 친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운전을 했다는 증거도 없잖아요.

피 묻은 것도 다른 사람이 운전해서 다친 거라고 하면 되잖아요. 저 이번에 들어가면 인생 종칠지도 몰라요.”

그러자 경찰은 몸을 뒤로 눕혀 의자에 기댄 채 팔짱을 끼며 답을 했다.

“거참…..내가 할 말이 없다.”

눈을 뜨고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 나는 순간 그와 겹쳐서 뒷배경에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저씨….”

“뭐?”

“아저씨…머리 좀 치워봐요..”

“뭐 새꺄?”

“빨리 머리 좀 치워봐요!!!”

내 눈동자의 초점이 자신의 등 뒤로 향해 있음을 안 그는 몸을 돌려 나와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얼굴만 확대되어 덩그렇게 붙어있는 벽보.

-사람을 찾습니다-

이름 : xxx

나이 :….

벽보 속의 여자.

어디선가 본 낯익은 얼굴…긴 생머리…짙은 눈썹…

“으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작은 철제 의자와 함께 튕기 듯 뒤로 나동그라졌다.

“야 임먀!! 왜 그래?”

바닥에 주저앉은 자세로 나는 손가락으로 벽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저..여자 어제..봐..봤어요!!!”

“뭐?”

내 말 한마디에 나는 교통계에서 형사계로 넘어갔다.

형사계로 넘어가자 조금 전의 교통계 조사가 얼마나 친절한 대우였는지를 바로 알게 되었다.

강력계 형사들은 눈빛부터가 달랐다.

“너, 이 여자 본 곳 어디야?”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한 형사가 벽보에 붙어있던 같은 전단지를 내 앞에 밀어 보이며 물었다.

무섭게 치켜 뜬 눈과 까칠하게 돋아난 수염이 그를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다.

“어제….제가 사고 난데서요…”

내 목소리는 이미 주눅이 들어 있었다.

“지금 거기로 안내해.”

말 한마디에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 듯 싶었다.

20여명의 의경들과 강력계 형사팀이 사고현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형사들과 같이 차를 탄 나는 몸둘 바를 몰랐다.

“너, 그 여자 어떻게 봤어?”

앞좌석에 탄 중저음의 그 형사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나에게 물었다.

“그게..저….”

“확실히 그 여자 맞지?”

“예. 맞아요.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어요.”

“뭐가?”

“물에 빠져 한 참 뒤에 발견된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에 여기저기 살이 뜯겨 있구요…”

설명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그 여자가 머리에 떠오르자 소름이 밀려왔다.

나의 머뭇거림에 형사가 말을 재촉했다.

“계속 말해봐.”

“물에 젖은 원피스 차림으로 저한테 춥다면서 발을 질질 끌며 다가오는거예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전 너무 무서워서 택시타고 도망쳤죠.”

내 말이 끝나자 그 형사는 한 숨을 길게 내쉬더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때 운전을 하고 있던 다른 형사가 그에게 물었다.

“마두, 그 자식이 한 말과 똑같네요.”

‘마두?’

생소한 이름에 나는 귀가 쫑긋해졌다.

“너 귀신 볼 줄 알아?”

중저음의 그 형사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내게 던졌다.

“예?”

“사람같지가 않았다면서?”

“그렇긴 한데…”

그러고 보니 어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내 부족한 아이큐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물에 불은 시체같은 여자. 병원에서 봤던 등골이 얼어붙는 듯한 끔찍한 형상의 그 간호사.

생각만 해도 온 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그리고 내 차가 왜 거기 그대로 있는거지?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그냥 가위에 눌린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되나?

그런데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고, 현실적이었다.

그들이 다 죽은 여자라면……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그리고 앞 좌석에 앉아 있는 형사들은 뭔 가?

나의 허무맹랑한 꿈같은 얘기에 뭔 개소리냐며 호통 한 번 치지 않는가?

그리고 귀신 볼 줄 아냐는 질문은 또 뭔가?

거대한 음모가 서려있는 무서운 사건에 떠밀려지는 듯한 이 기분은 또 뭔가?

당분간 술을 끊어야겠다.

사고현장에 도착한 형사들과 의경들은 주변을 이 잡듯이 뒤졌다.

특히 도로와 인접한 개천의 풀숲은 경찰들의 주 수색 대상이었다.

10여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깁니다!!!!!”

한 의경의 외침에 모두들 먹이를 발견한 승냥이 떼처럼 풀숲 사이에 긴 선을 그으며 한 곳으로 몰려들었다.

가드레일에서 지켜보던 나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하천 정화조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발견한 의경이 시뻘겋게 녹슨 정화조의 뚜껑을 열어놓은 채 코를 움켜쥐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거기에 있는 모든 이가 본 것은 부패되어 썩어가는 한 여자의 시체였다.

더욱 나를 경악케 만든 것은 지금 내 눈앞의 썩어가는 이 시체가 어제 나에게 살아서 걸어왔던 그 여자라는 것이다.

갑자기 입에서 토사물이 쏟아졌다.

시각적인 자극은 견딜 수 있었지만, 후각적인 자극이 내 위장을 파도치게 만들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있는 의경 다섯 명 정도가 고개를 돌리고 연신 구역질을 해댔다.

경찰서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넋나간 사람처럼 눈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건현장에서 쏟아낸 토사물 때문인지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가 아직 코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너 음주운전한 거 없던 걸로 할테니까, 집에 돌아가면 항상 핸드폰 켜 놓고 기다리고 있어.”

그 중저음의 형사가 나에게 제안을 했다.

“저 보내주시는 건가요?”

“그래. 그런데 필요하면 다시 부를거야.”

그제서야 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안도감이 밀려오면서 동시에 몇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그런데 아저씨. 그 시체 뭐예요? 살해당한 거예요?”

“아직 몰라. 김나연이라는 여자인데 실종 신고 후 3개월 만에 찾은거야.”

“딱 봐도 이건 살인사건이잖아요.”

“국과수 조사가 끝나봐야 돼.”

갑자기 소름끼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아저씨… 그럼 제가 귀신을 본 거예요?”

“……….”

“아저씨 말 좀 해봐요.”

“귀신이든 아니든 이번 사건 해결에 니가 도움이 된 건 사실이야. 그건 고맙게 생각한다.”

형사의 대답에서 그가 뭔가를 감추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졌지만 나는 더 이상 알고 싶지가 않았고,

물어본다 하여도 그가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다시 한동안 나는 침묵 속에 빠져 들었다.

한 동안 이어지던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나의 궁금증이었다.

“아저씨 그런 시체 많이 봐요?”

뒷좌석에 앉아있는 나의 질문에 형사가 고개를 잠시 돌려 피식 웃음을 보였다.

“그런 걸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요. 아까같은 시체보면 꿈에 안 나타나요?”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지. 그런데 그건 그나마 양호한거야.”

형사는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려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목 매달아서 목이 1.5배나 늘어난 상태로 혓바닥을 턱 까지 길게 내밀고 나를 쳐다보는 시체 한 번 봐봐.

그건 진짜 꿈에 나타난다.”

“에이…겨우 그 정도예요?”

나의 비아냥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말을 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순경 시절에 집에 누가 침입했다는 여자의 신고전화를 받고 출동한 적이 있었지.

조그만 벽돌식 단독주택이었는데….현장에 갔더니 불은 꺼져 있고, 문이 잠겨 있는거야.

원래 수색영장없이 함부로 들어가면 안되는데 그 날은 느낌이 안 좋더라구.

나는 방범창을 부수고 조심스럽게 창문을 통해 들어가려고 시도했어.

그런데 큰 장롱 하나가 창문을 반 쯤 막고 있는거야.

난 그것을 간신히 밀어내고 창문 안으로 발을 간신히 내딛었는데, 순간 윤활유같은 무언가에 미끄러져 방안으로 굴러떨어지듯 넘어졌지.

나동그라져서 뒤로 누운 상태가 된 나는 옆에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난 그 때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처참하게 살해되어 누워있는 피범벅이 된 여자 시체와 눈이 마주친거야.”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마치 그 때 그 형사가 된 기분처럼 소름이 끼쳤다.

“눈을 동그랗게 부릅뜨고 죽었는데, 마지막 숨이 새어나오는건지 입에서 피거품이 부글거리는 소리가 나더라구.”

형사는 잠시 입을 굳게 닫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1년 가까이 꿈 속에 그 여자가 그 얼굴, 그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괴롭혔지.”

나는 으스스한 기운에 입을 열지 못했다.

“너 좀비 영화 봤냐?”

“네…”

“고통이 극도로 심해지거나 죽음에 임박하게 되면 엄청난 양의 엔돌핀이 뇌에서 분비되지.

엔돌핀 때문에 고통을 못느끼는거야.

전쟁 영화보면 폭탄 맞아서 자기 팔이 떨어져 나간 줄도 모르고 남은 한 손으로 총 들고 진격하고 있잖아.

교통사고도 마찬가지야.

트럭에 치어서 하반신이 짓이겨져서 떨어져 나갔는데도, 그것도 모른 채 숨이 멎을 때까지 도로 위를 두 팔로 기어다니는 사람도 있어.

좀비처럼 말야.”

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워, 워, 워…형사도 할 짓 못 되네요.”

나의 장난끼 어린 말투가 내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알아챘음에도, 그는 더 잔인하게 나를 압박했다.

“그나마 형사는 좀 낫지. 현장 정리가 어느 정도 된 다음에 출동하니까.

신고 받고 처음으로 출동하는 순경들은 뭘 보겠냐?

투신해서 머리가 으깨진 시체,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피부가 벗겨져 나가 속살을 드러낸 시체….

나도 그런 끔찍한 광경은 대부분 순경 시절에 본거지.”

몇 마디의 대화가 끝나자 경찰서에 가까워지는 듯 했다.

경찰서에 정문에 도착하자 그 형사는 나에게 조금 전의 약속을 재확인한 후 나에게 항상 대기하고 있기를 부탁했다.

나는 안부인사를 한 후 차문을 열고 내렸다.

문을 닫으려는 순간 나는 중요한 질문거리가 하나 떠올랐다.

“아저씨. 제 차 어디서 찾아가야 되요? 그거 비싼건데..”

“기다려 임마. 조사가 끝나면 교통계에서 연락이 갈거야. 다음에 다시 보자.”

경찰 지프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자, 나는 상의 주머니에 집어넣은 오른손의 중지를 치켜올렸다.

“조까 X발..내가 다시 오나 보자.”

나는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진짜로 내 차 어디 있는거야?”

내 차량의 소재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 순간 나를 더 궁금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웃옷 주머니 속에서 매만져지는 작은 쪽지의 내용이었다.

-사일런트 엔젤 010-9453-xxxx –

“그런데 X발, 도대체 이게 뭐지?”

몇 초동안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는 이내 휴대폰을 꺼내 쪽지에 적인 숫자대로 버튼을 눌렀다.

‘뚜루루루….뚜루루루루….뚜루루루루…..’

발신음이 반복되면서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

“여보세요.”

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거기가 어디죠?”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너 누구야?”

“그냥 사일런트 엔젤을 찾고 있어요.”

갑자기 내 고막을 찢는 듯한 그의 폭언이 들려왔다.

“너 누구야!! 개새끼야!!!”

“헐…”

나는 얼른 휴대폰의 폴더를 닫아버렸다.

“헐..X발 놈. 졸라 까칠하네.”

그런데 나의 독백이 끝나기가 무섭게 휴대폰이 요란한 벨소리를 울려댔다.

조금 전 그 번호였다.

받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그런데 왠지 모르게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여…여보세요?”

“너 이 번호 누구한테 얻은거야?”

그 까칠한 남자였다.

“아니 그냥 제 호주머니에 매모 쪽지가 있어서…뭔가하고 연락한건데요?”

“사일런트 엔젤은 어떻게 알아?”

“그냥 누가 알려주고 간 거예요. 저도 잘 몰라요.”

“……….”

휴대폰 송화기를 손으로 막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지, 아니면 그냥 말을 하지 않는건지 그는 잠시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여보세요?”

나는 그를 불렀다.

그제서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저녁 6시에 ㅇㅇ역 3번 출구로 나와 있어.”

“제가 거길 왜 가요?”

“죽고 싶지 않으면 나와 있어.”

“뭐..뭐라구요?”

내 대답을 무시한 채 통화는 종료되어 버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는 잔잔한 연못에 조금만 파문이 일 듯 소리없이 두려움이 몰려왔다.

작은 실밥을 잡아당겼더니 걷잡을 수 없이 옷감이 풀어 헤쳐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휴대폰을 들고 한 동안 멍하니 자리를 지키던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는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미쳤어? 내가 거길 왜 가? X발 놈들….내가 겁 먹을 줄 알고?”

내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거리며 나는 집으로 향했다.

택시 요금이 없어서 나는 버스를 타고 갔다.

얼마만에 타는 버스인지 모른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아버지를 졸라 자가용을 샀다.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버스를 탄 기억이 없다.

사실 학창시절에도 버스를 탄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가 늘 학교까지 자신의 차로 바래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너무 익숙해진 나는 커다란 운송수단에 몸을 맡긴 채, 여러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각자의 목표지점으로 향하는

광경이 너무나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른쪽 이마에 두툼한 반창고를 붙인 채 서 있는 내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띵동!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버스 소리에 섞여 휴대폰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오빠^^; 경찰서 가면 나 아빠한테 죽거든. 도망쳐서 미안^^ 연락줘 ^^-

“X발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욕설에 주변 사람들이 긴장하는 눈치였다.

집 근처에 도착한 나는 절친한 친구인 준호를 실내 포장마차로 불러냈다.

그 놈도 나처럼 변변한 직업없이 집에 돈이 많다는 이유로 놀고 먹는 녀석이었다.

“야! 왠일로 포장마차냐? 돈 떨어졌냐?”

준호는 인사 대신 나를 비야냥거리며 원형의 간의의자에 앉았다.

“이마는 왜 그래?”

“헐..X발 말도 마라. 새벽부터 지금까지 온갖 쇼를 다하고 다녔다.”

“뭔 일이야?”

“우선 술 좀 시키고 진정 좀 하자.”

“아니 다친 놈이 뭔 술이야?”

“아이..씨X 닥치고 그냥 조금만 하자. 맨 정신에 있을 수가 없어.”

몇 시간전의 술을 끊어야겠다는 다짐은 온데간데 없었다.

나는 준호와 함께 소주를 들이키며 무용담처럼 내 얘기를 늘어놓았다.

준호는 기이한 미스테리라도 듣는 것처럼 어린 아이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얼마가 지난 후 약간의 취기가 올라오자 나는 시계를 들여다 봤다.

7시가 조금 넘었다.

갑자기 술이 깨는 듯 했다.

“헐…7시가 넘었네.”

“너 X발…아까 니가 말한 새끼가 약속한 시간이 6시 아니었어?”

나는 애써 평온함을 유지하려 했으나 밀려오는 두려움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집으로 가는 길은 길고 어두운 좁은 도로변 길이었다.

“준호야. 우리 집까지 차 좀 태워주라.”

“X발 놈. 이젠 나까지 음주운전시키네. 알았어 임마.”

나와 준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실내 포장마차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따르는 몇 개의 검은 그림자를 미처 살피지 못했다.

우리의 차량이 어두운 도로변 길에 진입하자 갑자가 낯선 차량 한대가 우리 앞을 가로 막았다.

미처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서너명의 건장한 놈들이 준호의 차로 달려들었다.

갑자기 앞유리의 파열음이 들렸고, 파편처럼 유리조각이 내 얼굴을 향해 쏟아졌다.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가려 하자 눈 앞에 솥뚜껑만한 손이 순식간에 다가와 내 얼굴을 강타했다.

“쿨럭…쿨럭”

간신히 기도를 열어젖히는 힘겨운 기침 소리와 함께 나는 의식이 돌아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지금이 몇 시인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눈의 초점이 서서히 맞추어지자 주변의 광경이 눈 앞에 들어왔다.

화사한 테라스처럼 고급스럽게 꾸며진 약간 어두운 실내 공간이었다.

누군가가 내 정면의 의자에 앉아 있었고, 주변에 건장한 서너명이 무게를 잡고 서 있었다.

나 또한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두 팔이 위자 뒤로 포박당한 채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주변만 할로겐등처럼 강렬하게 아래로 내리비치는 빛 때문에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얼굴은 정확히 볼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두목으로 보이는 그가 담배 하나를 물고 있고,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최대한 거만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 누구야?”

전화 속의 그 놈 목소리였다.

“쿨럭…제 친구는요?”

“죽지 않았으니까 걱정마.”

“저 한테 왜 이러시는거예요?”

간신히 입을 열 때마다 상처난 오른쪽 이마와 손으로 가격당한 왼쪽 광대뼈가 아려왔다.

“난 니가 내 번호와 사일런트 엔젤을 어떻게 아는지 궁금할 뿐이다.”

“전 정말 몰라요..쿨럭…. 누가 알려준 거예요.”

“그게 누구야?”

“몰라요…메모 쪽지가 그냥 제 호주머니에 있었어요…”

“좋은 말로 할 때 말해.. 그 놈이 누구야?”

말이 통하지 않는 그와의 대화가 계속되자 순간 나도 모르게 분노 섞인 짜증이 밀려왔다.

“몰라!! X발!! 모른다는데 왜 자꾸 지랄이야!!!!”

나의 괴성에 주변에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남자의 손짓이 있자 건장한 청년 한 명이 나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막장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두려움보다는 오기가 생겼다.

“쿨럭..쿨럭…차라리 죽여라..X발 놈들아…”

그 건장한 청년은 나에게 주먹질 대신에 내 팔뚝에 주사기를 꽂아 알 수없는 주사액을 밀어넣었다.

“뭐…뭐하는 짓이야?”

나의 물음에 두목으로 보이는 그가 입을 열었다.

“넌 잠시 후 진실만을 말할 것이다.”

“조까고 있네…십새끼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나의 말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조명등 너머의 그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사약의 효과를 기다리는 듯 했다.

잠시 후 주사액 때문인지 눈 앞의 초점이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몸이 나른해지면서 편안함이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히죽거리는 웃음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동굴 속의 울림처럼 그 두목같은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 누구야?”

“히히히…김..성..태…”

“너 뭐하는 놈이야?”

“놀고 먹는 백수지 뭐야…히히히..”

“너 사일런트 엔젤을 어떻게 알아?”

“음…뭐더라…..”

“……..?”

“그..그 놈이 주고 갔어…..내 차 가져 간 놈….”

“누..누구?”

갑자기 주변에 엷은 안개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히히히….안개다…안개…안개가 낀다.’

기분이 들뜨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나는 삭신이 오그라드는 듯한 공포가 밀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뇌의 99%가 약물에 정복당했음에도, 나머지 1%의 정상적인 부분이 나를 일깨우려 애쓰는 것 같았다.

머리를 똑바로 들어올리려 했지만 목의 근육이 다 풀려버린 것처럼 내 머리는 이리저리 내팽개쳐졌다.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지금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말 해….그 놈이 누구야?”

그의 질문에 나는 오직 진실만을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 말이다.

“누구긴 누구야…..바로 니 앞에 서 있는 놈이지……”

“뭔 개소리야?”

그 두목같은 녀석은 내 말을 부정했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다.

내 앞에 그 놈이 나를 등지고 서 있다.

뒷 모습만 봐도 분명히 그 놈이 맞다. 내 차를 견인해 간 놈.

그 놈은 나를 등진 채 두목 녀석을 노려보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희뿌연 연막처럼 그가 반투명하게 보였다.

그 놈이 나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목 녀석의 형상이 투시되어 보였다.

사람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묘하지?

무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그냥 이 안개가 아늑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런 게 뽕맞은 기분인가?

“우히히히히히……”

나도 모르게 요사스러운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그 놈을 몰아 붙였다.

“니가 경찰에 신고했지? X발 놈….내 차 니가 찾아와… X발 놈아….죽일 놈…히히히”

나의 횡설수설에 그 두목 녀석이 입을 열었다.

“저 새끼 진짜 왜 저래? 약을 너무 탄 것 아냐?

완전히 미친 새끼군.

야!! 더 이상 볼 것 없어. 처리 해!!”

그는 불호령을 내리며 들고 있던 담배를 너무나도 깔끔해 보이는 바닥에 그냥 집어 던져버렸다.

그 와중에도 나는 거친 욕설과 간교한 웃음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야~~~ X발놈아!! 내 차 내놔…개새끼야!! …..히히히….”

나를 등지고 있는 그 놈을 인지하지 못한 채, 조금 전에 나에게 약을 주사했던 건장한 청년이 옆의 탁자에서 뭔가를 집어들더니

발걸음을 나에게로 옮겼다.

끈 이었다.

빳빳한 가죽 끈 같은 것을 몇 번 양쪽으로 소리내어 잡아채더니, 이내 그것을 내 목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그 동작 후에 정작 그가 힘을 주어 조른 것의 자신의 목이었다.

“우에엑!! 켁!! 켁!!”

그 놈은 자신의 목을 조른 채 눈깔을 뒤집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녀석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목을 조르는 가죽끈을 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내 차를 견인해 간 그 자식이 청년의 뒤에서 힘을 주어 목을 비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저 자식!! 혼자 뭐하는거야!!!”

주변의 사내들이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 죽어가는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연신 몇 번을 켁켁대던 그가 갑자기 가죽끈을 목에서 풀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몇 번 좌우로 꺽었다.

달려들던 사내들도 걸음을 멈추고, 그의 기이한 행동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뒤이어 수차례 목을 꺽던 청년이 갑자기 검은 양복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조명등에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그것은 족히 30센티는 돼 보이는 시퍼렇게 날이 선 회칼이었다.

그리고 곧 피의 축제가 벌어졌다.

망나니의 칼춤처럼 몸을 이리저리 흔들더니 그는 자신에게 바라보던 건장한 사내들의 몸에 연신 칼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소름끼치는 비명소리와 고성이 난무하면서 사방에 핏물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칼침을 수 차례나 맞은 듯한 한 놈이 내 무릎 위에 떨어졌다.

그의 마지막으로 남은 몇 번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빨갛게 그어진 멱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물총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처럼 따끈한 핏줄기가 내 얼굴에 쏟아졌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즐겼다.

“오 예!!!….히히히히…..푸우!!”

그것이 입으로 들어가면 나는 분무기처럼 그것을 공중에 뿌려댔다.

몇 명의 사내들이 뒤엉킨 채 피의 제전은 계속 되었다.

여기 저기서 날아드는 여러 개의 회칼이 마치 무당들의 칼춤처럼 화려함을 더 했다.

두목 녀석의 정수리에 회칼이 꽂히는 것을 마지막으로 피의 제전이 끝났다.

광기어린 축제가 끝났음에도 회칼을 든 사내는 한 동안 피바다 속에서 홀로 망나니 춤을 계속 이어갔다.

그 붉은 바다에 물을 채우 듯 그의 몸 서너군데에서 물줄기가 용솟음쳤다.

그리고 또 한 놈이 망나니 춤을 추고 있었다.

칼을 든 사내와 겹쳐진 형상으로 똑같이 춤을 추고 있는 놈은 내 차를 견인해 간 그 X발놈이었다.

한참동안 망나니 춤을 선보이던 그 X발놈이 갑자기 춤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칼을 든 사내는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옆 모습을 나에게 보인 채 잠시 서 있던 그 녀석이 나를 한 번 힐끔 쳐다보더니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안개도 사라졌다…….

서서히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적막감이 밀려왔다.

오로지 들리는 것이라고는 누구의 몸에서 떨어지는 지 모르는 액체 방울의 낙하소리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그 액체 방울의 낙하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젠 즐겁지가 않다.

약기운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즐거움도 같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서야 처참한 도륙의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악!!”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뿌려진 미지근하고 끈적한 액체의 촉감이 내 뺨에 느껴졌다.

그리고 그 형사의 경험담처럼 바닥에 엎어져 죽어있는 한 사내의 부릅 뜬 눈과 마주쳤다..

그 형사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X발.

“후……..”

긴 한숨과 함께 조금 전에 미처 뿜어내지 못한 끈적한 액체가 입 속에서 새어 나왔다.

아…졸립다.

오늘은 너무나도 피곤한 하루다. 집에 가고 싶다.

나는 실신하 듯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성태야…성태야…..”

어떤 익숙한 목소리의 부름에 나는 눈을 떴다.

아버지였다.

“이제 정신이 드냐?”

아버지가 왠 일로 이렇게 친절하시지?

“김성태…괜찮아?”

사건현장에 동행했던 그 형사가 아버지 뒤에 서 있었다.

“여…여기가 어디죠?”

“병원이다. 이 놈아..아예 여기서 살림 차릴래?”

늘 같은 아버지의 비아냥거림 속에 전에는 느끼지 못한 울먹임이 느껴졌다.

“아버님.. 잠깐 나가 계시죠.”

형사의 부탁에 아버지는 걱정스런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병실을 나섰다.

아버지가 병실을 빠져나간 것이 확인되자 형사는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통성명도 못한 것 같네. 나 ㅇㅇ경찰서 강력계 1팀장 박정우 경사다.”

나는 그의 시선을 뿌리치고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너 어떻게 거길 간거냐?”

“…….”

“니 의지로 간거냐? 아니면 납치 된거냐?”

갑자기 두려움과 서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흑……”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콧등을 넘어 침대속으로 젖어들었다.

“김성태…”

나의 흐느낌에 박형사는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고, 나지막히 내 이름을 불렀다.

“무서워…X발…이제 그만 내버려둬…..흑흑”

쥐어짜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는 뜨거운 눈물을 연신 쏟아냈다.

나의 흐느낌이 멈출 때까지 박형사는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10여분이 지났을 쯤, 내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박형사는 입을 열었다.

“듣기 싫어도 들어라. 너 거기 니가 알고 간 것 아니지?”

“…..”

“이 거 누가 적어준거지?”

박형사는 그 쪽지를 나에게 들어보였다.

“누가 적어준 게 아니지? 이 거 니 글씨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일런트 엔젤이 뭐야?”

“몰라요…”

나의 성의없는 대답에 박형사는 무언가를 고백하듯 긴 얘기를 꺼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너만 알고 있는 걸로 해.

몇 개월 전에 우리 수사팀은 대규모의 신종 마약이 유통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에 착수했어.

그 때 수사망에 포착된 조직이 하나 있었는데, 어제 너와 같이 있었던 놈들이야.

그 조직은 몇 개의 나이트클럽과 고급 스탠드바를 운영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 조직들이 주요 근거지로 삼는 스탠드바가 하나 있었는데, 주로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출입을 하는 곳이었지.

철저한 회원제와 신분 보장으로 누가 드나드는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어.

거기엔 얼굴 마담격의 여자가 있었는데, 미모가 얼마나 출중하고 요염했는지 그 여자 때문에 매상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하더군.

그 여자가 바로 니가 찾아 낸 김나연이라는 여자야.”

박형사의 놀라운 말에 나는 시선을 돌려 그를 쳐다 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가 수사에 착수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조직의 중간보스급으로 보이는 한 놈으로부터 전화가 온 거야.

누구냐고 물으니까 자신을 ‘마두’라고 소개하더군.

물론 그 쪽 세계에서 사용하는 명칭은 아니었겠지.

그 녀석은 자신과 김나연의 신변을 보호해주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정보를 주겠다고 했어.

무슨 장부를 하나 넘기겠다고 했는데 약속시간을 잡기가 쉽지 않았지.

장부를 손에 넣기가 힘들었는지, 아니면 조직의 철저한 내부 단속 때문이었지 모르지만 아무런 진전도 없이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어.

그런데 보름 만에 마두한테 전화가 온 거야.

피곤함이 역력한 목소리였는데 뜻 밖의 얘기를 하더라구.

김나연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죽은 것 같다는거야.

그런데….”

박형사는 잠시 입을 굳게 다물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데요?”

나는 이미 박형사의 얘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마두가 횡설수설을 하는거야.

나연이가 매일 밤 자신을 찾아 온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처럼 온 몸이 흠뻑 젖은 상태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 매일 밤마다 자신의 집을 찾아온다는 거야.

수면 중에 인기척에 놀라 깨어보면 어둠 속에서 그 여자가 자신의 옆에 누운 상태로 노려보며 있기도 하고,

어느 날 밤은 깨어보면 나연이가 그 소름끼치는 차림으로 화장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다는 거야.

깨어보면 꿈이고, 깨어보면 꿈이고…매일 밤마다 악몽같은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거야.

그럴 때마다 실내에서도 사방이 안개로 뒤덮인다고 하더군.”

나는 갑자기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나도 모르게 다시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간신히 내 스스로를 진정시킨 후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나는 박형사에게 물었다.

“마두라는 사람 어떻게 되었어요?”

“………”

나의 물음에 박형사가 답을 거부했다.

분위기를 눈치 챈 나는 간략하게 다시 물었다.

“주…죽었죠?”

“그래”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간신히 눈물을 멈추고 나는 박형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죽었어요?”

“새벽에 살고 있던 아파트 15층에서 투신했어.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두의 얼굴을 본 거야.

초면치고는 너무 처참하게 만난거지.

현장에 가니까 머리가 깨져 뇌수가 흘러나오고 있고, 팔다리는 모두 부러져 제멋대로 꺾인 기이한 자세를 만들고 있는 시체가 있더라구.

처음엔 그 얼굴의 주인공이 마두인지조차 몰랐지.

전에 본 적이 없으니 말야.

사건을 조사하면서 우리 서와 내 번호가 찍힌 그 놈의 휴대폰 통화 내역을 보고 알게 된거지.

휴대폰 통화내역은 정말 중요한 정보였어.

수없이 많은 번호들을 우리는 일일이 다 조회를 했지.

그런데 몇 개의 떨거지 놈들의 번호를 빼 놓고는 모두 엉뚱한 주인을 가진 대포폰이었어.

마두의 것도 마찬가지였고…

아무리 불법을 일삼는 조폭이래도 거의 모두가 대포폰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야.

뭔가 철저히 지켜야 할 비밀이 있는거지.

어찌 되었든 우리에게 정보를 넘기겠다는 사람이 죽었으니 우리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철저히 수사를 했지.

족적, 지문, 머리카락, 아파트 출입구와 엘리베이터의 CCTV…

우리는 가능한 모든 것들을 분석하고 조사했지.

마두의 죽음으로 우리는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 같았어.

그 사건을 계기로 수사팀은 그 조직의 근거지를 얼마 동안 출입할 수 있었거든.

모두들 입을 열기를 꺼려하고, 많은 부분에서 제한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지.

그런데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조직과의 연관성은 커녕 타살의 흔적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어.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CCTV는 그 어떤 침입의 흔적도 보여주지 못했어.

족적이나 지문은 모두 마두의 것이었고….

타살 흔적 하나 잡지 못한 채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자살로 종결되었지.”

박형사는 긴 한숨을 한 번 내 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나 형사의 직감이라는게 있어.

물증은 없었지만 타살이라는 심증을 버릴 수가 없었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에 마두가 한 말이 있었어.

그 자식이 나를 죽일거라는 거야.

무엇을 감추는지 ‘그 자식’의 정체를 말하지 않는거야.

게다가 처음 새벽에 그를 발견한 경비원 목격담도 우리의 심증을 뒷받침 해줬지.”

나는 박형사를 등지고 옆으로 누운 채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새벽 순찰 중에 싸우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려 그 쪽으로 달려갔는데, 한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면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는거야.

자살을 결심한 사람은 비명을 안 질러.

마두는 분명히 누군가에게 떠밀린거야.

싸우는 듯한 고함소리는 또 뭐야?

분명히 뭔 가가 있다고 확신이 섰어.

그런데 이상한 건 목소리의 종류는 한 가지 뿐이었다고 경비원이 말한 부분이야.

뭐 귀신 놀이도 아니고, 미친 것도 아니..”

“누가 죽였는지 알아요.”

갑작스런 나의 나즈막한 목소리에 박형사가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뭐라 그랬냐?”

“마두라는 사람 누가 죽였는지 알고 있다구요.”

박형사는 나의 팔뚝을 잡아당겨 돌아 누운 나를 바로잡았다.

“너 지금 그 말 사실이야?”

흥분한 듯한 박형사의 눈빛이 느껴졌다.

“누구야?”

“어제 그 놈들을 죽인 놈이예요.”

“그럼 어제 그 놈들이 지들끼리 치고 받은 게 아니었어? 외부 침입 흔적이 전혀 없던데…

족적이나 지문도 그 놈들 것 밖에 없었고…”

“누군지 모르는데, 사람이 아니었어요.”

“뭐?”

나는 길게 심호흡을 한 뒤 긴 얘기를 꺼냈다.

“어제 형사님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던 중 그 쪽지의 번호로 전화를 했어요….”

나는 어제 오후부터 지금 이 병원에서 눈을 뜰 때까지 기억하고 있던 일을 박형사에게 낱낱이 얘기했다.

내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박형사는 한 번도 나의 말을 끊지 않았다.

아니 끊을 수가 없었다.

말하는 나도 황당무계한 소리로 들리는데 박형사는 오죽하겠는가?

멍하니 넋을 놓고 들을 뿐이었다.

“…그 쪽지에 적인 글씨체가 제 것이잖아요.

저는 글씨를 쓴 기억도 없고, 그 내용이 뭔지도 몰라요.

어떻게 보면 저도 그 놈한테 당한거죠.

귀신에 홀린 거예요.”

내 얘기가 끝났음에도 박형사는 한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나 또한 박형사의 대답을 기다리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너…진짜로 귀신 볼 줄 아나보다…..”

한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박형사가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말을 내뱉았다.

“제 예감이 틀리길 바라지만, 왠지 이 걸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아요.”

박형사는 무거운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얘기하자.

조금 전에 의사가 너 다친 게 아니라 잠이 든거라고 하더라.

퇴원해도 된다는 얘기지. 원하면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줄게.”

“괜찮아요. 그냥 버스타고 갈게요. 사람 많은 게 좋아요.

요즘은 사람하고 같이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새삼 깨닫고 있어요.”

“그래. 알았다. 나중에 보자.”

박형사가 나간 뒤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기를 바랬지만 버스 안에는 빈자리가 여러 군데 보였다.

창가 자리에 앉은 나는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즐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데, 그 생각의 종류가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텅빈 느낌이었다.

왜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지, 어쩌다가 이런 이유 모를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지금 단 한가지 나의 바램은 이 악몽같은 사건의 고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낮은 고도로 떠 있는 태양 빛이 내 두 눈을 비추고 있었다.

노란빛 광원 속에 붉은빛이 간간히 섞여 아른거렸다.

서서히 졸음이 쏟아지는 것처럼 몸이 나른해졌다.

졸음 때문인지, 너무나 밝은 눈부심 때문인지 주변 사물이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안개가 긴 것처럼…

주변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때 누군가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손자를 데리고 탄 허름한 차림의 할아버지였다.

5살 정도로 보이는 하얀 빵모자를 쓴 그 꼬마는 너무나도 귀엽고 천진난만해 보였다.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노인의 앞에 서서, 꼬마는 연신 그의 손등을 두드리며 장난질을 해댔다.

손자의 귀여운 장난에도 할아버지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꼬마가 나를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 또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귀여운 손주였네요.”

나의 과거형이 섞인 말에 노인이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와 놀았던게 가장 재미있었대요.”

계속 나를 응시하던 노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이내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항상 할아버지와 같이 다닐거래요.

놀이터도 가고, 공원도 가고,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나는 아이의 말을 그 노인에게 계속 전달해 주었다.

아이는 입을 열지 않고 눈 빛으로 나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만득? 만득이? 응..그래 만득이 아저씨네 가게 가서 물고기 구경하는 게 젤 재밌대요. 거기 가자는데요?”

나의 말에 갑자기 노인은 두 손을 꾹 움켜쥐고 닭똥같은 눈물을 떨구었다.

할아버지의 울먹임에 손주 또한 표정이 어두워졌다.

“할아버지…손주가 울지 말래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쥐어짜 듯 연신 눈물을 쏟아냈다.

이젠 그냥 봐도 사람과 혼령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얀 빵모자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민머리는 꼬마가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노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맙네…젊은이….”

연신 눈물을 훔치던 노인은 조용히 웃옷 주머니에서 상표가 떨어져 나간 갈색 드링크제 병을 꺼내 들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느즈막하게 결혼 한 아들 놈 부부가 그 핏덩이를 남기고 사고로 죽었다오….

혈육이라고는 그 핏덩이 하나 남았었는데…몇 년 뒤 그 놈마저 몹쓸 병에 걸려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었다오.

그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큭큭큭..자식 새끼 다 보내고 이 늙은이가 살아서 뭐하겠소?..큭큭”

“할아버지…그래서 죽으려고 하신 거예요?”

나의 물음에 노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귀여운 손주가 할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지켜주고 있는데….할아버지 그러시면 안되요.”

할아버지…이 손 잡으세요. 이게 할아버지 손주의 손이예요.”

나는 꼬마의 손을 집어들어 할아버지의 손바닥에 다소곳이 올려 놓았다.

노인은 내 손을 몇 번 어루만지더고 무엇인가 느껴지는지 한 손에 빈 공간을 만들어 손가락을 오무렸다.

그리고는 입에 힘을 주어 굳게 다문 채, 또 다시 진한 눈물을 몇 번 쏟아냈다.

몇 번에 걸친 나의 위로에 노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고맙네. 젊은이..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고맙네.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네…”

다른 이가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노인은 손주가 서 있을 자리를 내려다보며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노인의 손을 잡고 있던 꼬마가 나를 뒤돌아 보고는, 또 한 번의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버스에서 내려 멀어져가는 그들을 계속 지켜보았다.

“잘 지내렴..”

귀신도 종류가 있구나.

저런 귀신만 만나면 좋으련만…

이젠 나의 이런 능력을 내 스스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 때 내 휴대폰의 요란한 진동음이 느껴졌다.

“여보세요?”

“나 박형사야.”

“예…왜요?”

“너 나하고 이번 사건조사 한 번 할래?”

갑작스런 그의 제안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나도 이 사건의 내막을 모두 알고 싶었다.

그리고 경찰하고 같이 있는 것이 좀 더 안전한 것이 아닌가?

“제가 꼭 필요한가요?”

“사실은 니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니 능력이 필요해”

“좋아요!! 하겠어요!!”

“오늘은 집에 가서 쉬어라. 그리고 내가 내일 오전에 데리러 가겠다.”

“알았어요.”

나는 왠지 설레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한 묘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오피스텔에 도착하자 무거운 피로감이 몰려왔다.

며칠 동안 비워 둔 집이라 낯선 냄새까지 나는 듯 했다.

나는 취직을 핑계로 부모와 떨어져 산다.

취직이라고 해봤자 배운게 없고 얼굴로 먹고 살다보니 직업이 다 거기서 거기였다.

술집 써빙, 나이트 클럽 웨이터, 호스트빠….

그나마 내세울만한 직업은 역시 바텐더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을 할 만하면 여자들이 달라붙어 제대로 한 우물을 팔 수가 없었다.

모든 용돈이나 경비를 여자들이 대주니, 힘들게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것들은 자꾸 나를 나태하게 만들었고, 술과 여자에 찌들게 만들었다.

나를 잡으려고 일부러 임신한 여자들도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계속 만나준다는 조건으로 중절수술을 권했고, 그 수술이 끝나면 가혹하게 차 버렸다.

사람들은 나를 쓰레기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다. 나는 쓰레기에 가깝다.

그런데 아직도 여자들은 겉모습이 멋진 상자에 담긴 나 같은 쓰레기를 좋아한다.

어떤 이는 멋진 상자의 모습에 반해 다가와서는 그 속을 열어보고 쓰레기라는 것을 알면 도망하고,

어떤 이는 담겨 있는 것이 쓰레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멋진 상자에 반해 그 안의 쓰레기까지 좋아한다.

내 주위에 모인 여자들이 예쁜 나비떼인지, 아니면 더러운 파리떼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귀찮고 힘들게 느껴진다.

내가 사고 난 것도 알고보면 나이트에서 꼬신 년이 내 음주운전을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이 있는 년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

우라질 년…..

집이 너무 조용했다.

나는 리모콘을 들어 TV를 켰다.

늘 보는 스포츠 채널에서 야구 중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고, 샤워기 옆에 있는 세면대 위의 거울을 바라보며 물이 뜨거워지기를 기다렸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가관이었다.

그러고보니 3일 만에 처음으로 보는 내 얼굴 같았다.

오른쪽 이마의 반창고는 간신히 꿰맨 자국을 감추고 있었고, 왼쪽 광대뼈는 아직도 큼지막한 멍자국으로 덮여 있었다.

아랫입술도 살짝 찢어져 핏기가 보였고, 눈 밑의 검 푸른 다크써클은 오랜 시간동안 내가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마의 반창고를 떼어냈다.

샤워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젠장….

그 만신창이가 된 얼굴에 꿰맨 자국까지 드러나자, 내 얼굴은 거의 프랑켄슈타인처럼 보였다.

“헐…X발. 당분간 여자 만나기는 글렀군.”

나는 세면대에 차가운 물을 채웠다.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물이 어느 정도 차자 나는 그 곳에 얼굴을 담갔다.

숨을 참으면서 온갖 잡념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꿰맨 상처 속으로 물이 침투하는지 가끔씩 따끔거렸다.

30여초가 지났을까?

“푸우~~”

나는 고개를 들어 폐 속에 쌓인 고농도의 이산화탄소를 내뱉았다.

어느 새 샤워기에서 나오는 증기가 세면대 위의 거울에 안착했다.

뿌옇게 흐려진 저 거울 건너 편에 못난 내 얼굴이 있다.

차라리 이런 내 얼굴은 안 보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허탈한 쓴 웃음을 짓고는 왼손을 들어 거울을 한 번 문질렀다.

닦이지 않는다.

다시 문질렀다.

그래도 닦이지 않는다.

갑자기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미친 듯이 두 손으로 거울을 문질렀다.

그제서야 거울이 왜 닦이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안개다.

그런데 샤워기의 증기가 만든 안개가 아니다.

공기 중의 그 물방울은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다.

그리고 조금씩 거울 속의 뿌연 안개가 엷어지더니, 그 속에서 연쇄살인마 같은 그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거울을 문지르던 두 손을 거울로부터 서서히 떼어냈다.

10개의 모든 손가락이 경기를 일으키며 떨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손가락 사이로 거울 속의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녀석이 보였다.

그리고 나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려는지 자신의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였다.

“개새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욕설과 함께 나는 허공에 떠 있는 내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그 놈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오른 주먹을 날렸다.

“개새끼야!!!!!!!!!!”

강력한 파열음과 함께 거울은 자신의 몸을 수 십조각으로 나누었다.

“죽여버리겠어!! 이 개새끼!!”

나는 잘게 쪼개진 거울 위로 연속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X발 놈!!! 널 꼭 찾아내서 죽여버리겠어!!

내 무서워할 줄 알아? 이 개새끼야!!!”

나는 울부짖음에 가까운 욕설을 날리며,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거울의 중앙부에 모인 핏물들이 주욱 흘러내리며, 세면대 속의 물에 빨간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이 개새끼…X발 놈…”

주먹질을 멈추자 손이 아려왔다.

나는 분쇄된 거울에 머리를 박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콧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작은 방울이 핏물 위로 떨어졌다.

세면대 속의 작은 거울 파편들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붉은색의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니 놈이 어떤 놈인지 반드시 찾아내겠어…..”

나의 속삭이는 듯한 굳은 다짐의 말은 거실의 TV소리보다 작게 들렸다.

“너 손 왜 그래?”

붕대를 감고 있는 내 오른손을 본 박형사가 물었다.

“어제 그 자식이 나타나서 신나게 두들겨 패 줬어요.”

“이젠 귀신하고 싸울 정도군. 내공이 장난 아니네…허허..”

“웃지 마세요.”

나의 진지한 부탁에 박형사는 재빨리 입을 닫았다.

박형사는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나에게 운전하고 있는 형사 한 명을 소개했다.

“아참, 김나연이 사체 찾으러 오갈 때 봤지? 강형사라고 우리 강력팀 최고 몸짱이지.”

운전을 하고 있는 그는 전방을 주시한 채 잠시 오른손을 들어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

박형사는 잠시 말을 아꼈다.

“지금 어디 가냐니까요?”

“내가 아는 무당에게 가는거야.”

“뭐요?”

“니가 힘들겠지만 귀신을 불러낼거야.”

나는 순간 허탈감이 밀려왔다.

“젠장….필요하다는 게 이거였어요? 귀신 좇아다니면서 수사하는게 아니고?”

“니 주변에서 죽은 사람이 몇 명인 줄 알아? 좋든 싫든 넌 지금 사건의 중심에 있어.

힘들더라도 협조해야 돼.

게다가 넌 우리가 조사하는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귀신을 둘이나 봤어.

그것들을 불러내서 정보를 알아낼거야. 만일 안되면 몸으로 뛰어야지.”

“후……알았어요.”

“그리고 김나연이….국과수에서 연락왔는데 살해되었대…”

“맞잖아요. 내가 살인이라고…..”

“직접적인 사인은 교살이야. 그런데 혈액에서 염산페치딘이 극소량 검출되었어.”

“염산페치딘? 그게 뭐예요?”

“주로 말기 암환자에게 투여하는 강력한 진통제야.

그런데 중독성이 필로폰보다 서너배나 강해서 병원에서도 관리를 철저히 하는 약품이지.

그런데 어떻게 그게 김나연 몸에서 발견되었느냐가 문제야.

아마 김나연도 우리가 조사하는 마약조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거야.”

이 순간 나는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만나러가는 무당은 누구예요?”

“옛날에 우리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고, 사건을 하나 해결해준 무당이야.”

“그 사건이 뭔데요?”

박형사는 잠시 전방을 주시한 채 뭔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 말을 아꼈다.

그리고 잠시 후 긴 얘기를 꺼냈다.

“3년 전에 반지하 방에서 화재가 발생했어.

그리고 2구의 어린이 시체가 발견되었지.

처음엔 단순 실화로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소방관 얘기로는 처음에 출동했을 때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다고 했어.

잠근 사람은 두 아이의 엄마였어.

그 여자는 남편과 사별하고 식당일을 나가면서 5살과 7살 난 두 아이와 함께 어렵게 살고 있었지.

우리는 사고사가 아닌 타살로 가닥을 잡고 유력한 용의자로 엄마를 지목했지.

아이의 엄마는 거의 반실성한 상태였어. 물론 범행도 급구 부인했고…

아이들이 죽은 슬픔도 감당하기 힘든데 자신을 범인으로 몰다니 너무나도 원통하고 억울하다는거야.

왜 문을 걸어 잠궜냐는 질문에… 평소 집 앞의 도로에 아이들이 뛰쳐나와 놀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때는 잠깐씩 잠그고 간다고 하더군.

요리조리 우리의 심문을 피해가는 것 같았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어.

두 아이의 혈액에서 청산염이 발견된거야.”

“청산염..?”

“청산가리 말야.”

“아니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 있죠?”

“생활고를 비관했을 수도 있지.

생활고를 비관해서 아이들을 살해하고 불을 질렀다고 볼 수밖에 없었어.

죄가 인정되면 아무리 정상참작이 된다고 해도 이건 최소 무기징역감이야.

하여튼 우리는 엄마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계속 심문했지.

그것도 모자라 유력한 용의자라는 이유로 구속수사를 했어.

그런데 말야….”

박형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깊게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빨더니 말을 이었다.

“재판이 있기 며칠 전 그 여자가 유치장에서 목을 매 자살한거야.

마치 결백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래서요?”

“사건은 그걸로 종료된거지.

그런데 그 여자가 죽었던 그날 밤 너무나 찝찝한 생각이 들더라구.

그 여자가 범인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말야.

그래서 나는 사건 현장에 다시 갔지.

뭘 얻기 위해서 간 것도 아닌데 그냥 가봐야 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거기서 한 남자가 멍하니 불탄 그 집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더니 나에게 다가와 뭐라 그러는거야.

아이들의 불장난이 큰 화를 불렀다는군.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까, 아이들이 성냥으로 불장난을 하다가 죽었다는거야.

그리고 이 아이의 엄마도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목매 자살했다는 거야.

난 온몸에 섬뜩한 소름이 돋았지.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무당의 말이 나를 더 소름돋게 만들었지.”

멍하니 형사의 이야기에 빠져 든 나는 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뭐…뭐가요?”

“아직도 이 집에 셋이서 살고 있대…”

마치 그 곳에 내가 있었던 것처럼 소름이 쫘악 돋았다.

“그…그 남자가 바로 형사님이 말한 무당이군요.”

“그래.”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난 망자의 억울함이라도 풀어주려는 심정으로 국과수에 재부검을 의뢰했지.

재부검 결과 역시나 혈액에서 청산염이 발견되었어.

그런데 말야.

이상한 건 아이들의 폐와 혈액에서는 청산염이 발견되는데 정작 위와 장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거야.”

“그럼 먹은게 아니라 코로 들이마신 거예요?”

“우리도 그 여자가 죽기 전에 국과수 부검 결과에 의아한 점이 하나 있었어.

아이들의 직접사인은 질식사였고, 폐에서 연기가 검출되었다는 거야.”

“그게 어때서요?”

“폐에서 연기가 발견되면 불 타오르는 동안 살아있었다는거야.

호흡을 하고 있었을테니까.

보통 살해 후 방화를 하면 숨을 쉬지 않기 때문에 폐에서 연기가 검출이 안돼.

그렇다고 단지 이런 점 때문에 여자를 풀어줄 수가 없었지.

타살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형사들은 물고 늘어지니까

그런데 엉뚱하게도 재부검 결과 폐에서 청산염이 발견되었다는거야.

청산가리를 들이마시게 한다? 그게 가능할까?

또 죽이려고 마음 먹은 사람이 굳이 왜 이렇게 어려운 방법을 선택했을까?

그렇게 하더라도 아이들은 바로 죽었을텐데, 폐에서 발견된 연기는 도대체 뭐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어.

그래서 난 다시 그 무당을 찾아갔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

그런데 그 무당이 그러더라구. 그 집을 다시 불태우라고…그 혼령들이 원한다고…

불타버린 집을 또 태우라니 그게 도대체 뭔소린지….”

박형사는 담배에 붙은 재가 떨어지지 않고 길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담뱃재는 작은 움직임에도 떨어져 나갈 듯 아슬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서로 돌아오는 중에 난 불현 듯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어.

그래서 국과수에 사건 현장에 남은 여러 물질들의 발화실험을 요청하고 성분검사를 의뢰했지.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나오더라구.”

“뭐가 말예요?”

“젠장…………그 집 바닥재 발화 실험을 했는데 연기 속에서 청산염이 검출된거야.”

“이럴 수가…바닥재 성분이 타면서 나온거예요?”

“형사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지.

불법을 저지른 건 아니지만 우리는 멀쩡한 목숨을 덤으로 하나 죽인거야.”

그제서야 박형사는 길게 늘어진 담뱃재를 털어냈다.

“그게 폐로 들어간거야. 그리고 혈액에서 돌아다녔고.

그래서 위와 장에서는 발견이 안 되었던거지.

우리는 사죄의 마음으로 그 영혼들의 안식을 비는 제를 간단히 지내줬어.”

“그렇군요…..”

“그 뒤로 나는 그 무당과 친분을 유지했고, 그 무당은 몇 개의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지.”

“그렇다면 이번 사건도 그 무당한테 부탁하면 되잖아요.”

“사건을 해결하러 다닐 때마다 원혼들이 자꾸 자기 몸에 붙어서 못살겠다는거야.

수명이 짧아져서 죽을 것 같대. 그래서 1년 전부터는 말도 못 꺼내게 했어.”

어느 새 우리는 도심 외곽을 달리고 있었다.

도로도 점점 좁아져 편도 1차선을 내달리고 있었다.

눈 앞에 뒤쪽에 산과 앞쪽에 작은 계곡을 끼고 있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

불교의 만자(卍字)가 보이는 걸로 봐서 우리가 만나야 할 무당의 집인 것 같았다.

보통 잘 나가는 무당들은 예약을 하고 가야된다는데 이 무당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무당의 것으로 보이는 소형 승용차와 우리의 차량만이 앞마당에 추차되어 있는 유일한 차량이었다.

인기척을 보인 후 우리는 안으로 들어섰다.

무당의 집이라고 보기에는 집 안의 치장이 너무나 차분했다.

그리고 향 연기 속에 담배 연기 냄새가 배어나왔다.

사극의 대감집에서나 볼 수 있는 기품있는 병풍을 등 뒤에 두르고, 왜소한 체격의 한 남자가 생활 한복을 입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사람이 무당인가 싶을 정도로 그는 꾸밈이라는게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사람이 들어왔음에도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연신 담배질을 하며 책을 탐닉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님. 저 왔습니다.”

박형사의 인삿말은 그와 저 무당이 얼마나 가까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박형사의 인사에도 무당은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지. 날 죽일 셈이냐?

짭새놈들이 얼마나 모진 원혼들을 몰고 다니는 줄 알아?”

이 말에 박형사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큰 사건입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그제서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마와 입 주변에 깊게 파인 주름만이 그의 나이를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많은 주름살에 걸맞지 않은 백옥같은 피부를 가졌고, 미간에 작은 점이 박혀 있었으며, 몇 년을 길렀는지 모르는 긴 수염을 달고 있었다.

그는 박형사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하더니 박형사의 뒤에 서 있는 나를 한참 동안 말없이 응시했다.

너무나도 멋쩍은 상황에 나도 그를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이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멈춘 것은 무당의 욕설섞인 말이었다.

“우라질 놈. 이번엔 원혼들을 떼거지로 몰고 왔구나….”

무당의 말에 무릎을 꿇고 있던 박형사가 나를 돌아 보았다.

갑자기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 나는 누구에게 시선을 맞춰야 할 지 고민했다.

무당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나를 경계하고 있는 듯 보였다.

“형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박형사의 질문에 무당은 잠시 말을 아낀 후 입을 열었다.

“저 친구에게서 너무 강한 기운이 느껴져. 혼령이 한 둘이 아냐….”

박형사는 연신 무당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표정 변화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형님, 불러낼 수 있습니까?”

박형사는 내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무당의 허락을 받는데만 급급했다.

무당은 여전히 나에게서 매서운 시선을 흩뜨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봐, 젊은 친구. 이리 와 앉게.”

나는 잠시 박형사와 무당의 표정을 살핀 후 박형사 옆에 무릎을 꿇었다.

“둘 다 편하게 앉아. 내가 무슨 니들 부모냐?”

우리는 자세를 편안히 갖추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내 손을 잡게나 젊은 친구.”

그는 두 손을 내 앞으로 나의 응답을 기다렸다.

나는 다시 한번 박형사의 표정을 살핀 후 아무 말없이 그의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내 손을 잡은 무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 알 수없는 주문같은 말을 작은 숨소리로 웅얼거리지 시작했다.

몇 십초가 지났을까?

무당의 미간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웅얼거림의 소리도 서서히 커지는 듯 했다.

그의 미세한 손 떨림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져 사나운 맹수가 포효하는 것처럼 미간과 콧등에 수많은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흡혈귀처럼 하얀 이를 조금씩 드러내며 입을 벌리기 시작했고, 그의 웅얼거림은 점점 ‘아’발음만 들리는 기괴한 음성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순간…

“탕!!!!!!”

그가 갑자기 탁자에 손을 내리쳤다.

그리고는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조금 전의 기괴한 소리를 내던 흉측한 표정보다 더 섬뜩해 보였다.

“안돼…..”

그의 엉뚱한 말에 박형사가 물었다.

“뭐..뭐가요? 불러낼 수 없다는 말입니까?”

무당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불러내면…우린 모두 죽어…”

지금 이 순간 내 생각도 그렇다.

그 놈이 다시 나타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기 때문이다.

“형님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린 그 놈을 불러내서 그 놈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니 들이 찾아….내가 감당할 수 있는 혼령이 아냐….”

“뭘 찾으란 말입니까?”

“그 놈 시체를 찾아!!

찾아서 불태우든가, 천도제를 지내주든가 하란 말이야!!”

나는 이 방에 들어와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것 같다.

난 그에게 물었다.

“그 놈…아니 귀신이 보일 때마다 안개가 껴요.

그냥 맑은 상태가 아니고…”

“귀신은 사람의 기를 빼앗아가.

귀신의 존재가 느껴지면 사람은 여러가지 현상으로 반응을 하지.

어떤 이는 소름끼치는 한기를 느끼기도 하고, 어떤 이는 피를 흘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기절을 하기도 하지….

그런데 자네는 특이한 경우이지만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애…”

“이대로 있으면 전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긴? 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화를 당하거나 아니면 니가 죽든가 하겠지…”

너무나 충격적이고 무서운 말임에도 무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뱉았다.

무당은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니 몰골을 보니, 요 근래 온갖 험한 꼴을 많이 당한 것 같군.

살고 싶으면 어서 그 놈을 찾아.”

“도와주시면 안되나요? 아저씨도 능력이 있잖아요.”

“법사라고 불러. 무슨 생뚱맞게 아저씨야? 나도 체면이 있는데…”

“무슨 얼어죽을 법사고, 체면이예요? 귀신 하나 쫓아내지도 못하면서….”

“이런 망할 자식을 봤나!!”

무당은 입을 삐죽거리며 경멸하는 듯한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난 뭐 대단하신 분인 줄 알고 왔는데, 스포츠 신문에나 광고내는 무당하고 같네요.”

“뭐? 이 자식아? 이런 호로자식을 봤나!!!”

그는 나에게 덤빌 듯한 자세를 취하고는 욕설을 내뱉았다.

지금의 그의 모습은 무당이라기 보다는 동네 불량배에 가까웠다.

“야 임마!! 너 지금 뭐하는거야!!”

박형사가 호통을 쳤다.

그의 호통에 우리는 잠시 냉전을 유지했다.

“형님. 죄송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이 친구 부탁 좀 들어주시죠?”

“당장 꺼져!!”

무당은 자세를 옆으로 돌린 채 박형사와 시선도 맞추지 않았다.

“젊은 놈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이러다 이 놈 죽을 지도 모릅니다.

목숨 하나 살려주신다 생각하시고 좀 도와주세요.”

박형사는 나보다 더 간절한 입장이 된 것처럼 무당에게 애원했다.

“당장 꺼지라고 했다. 더 이상 말 걸지마!!”

무당의 태도는 단호했다.

이에 나는 자존심을 굽히지 않기 위해 박형사에게 말을 던졌다.

“형사님, 그냥 가요. 뭐 하나 얻어낼 것도 없는데….”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집 밖으로 나오자 박형사의 동료인 강형사가 연신 담배질을 하며, 우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씩씩거리며 나오는 것을 본 강형사는 무슨 일이냐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도 없이 그냥 차에 올라탔다.

무당을 달래고 있는지 아니면 무슨 할 말이 더 있는건지 박형사는 5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박형사가 조용히 집 밖으로 나왔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잡시 쳐다보더니 아무 말없이 차에 올라탔다.

“죄송해요. 형사님.”

십여분 동안 아무 말없이 달리는 차량 안에서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 박형사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에게 혼쭐이라도 날 것 같았지만 박형사는 업무적인 얘기로 답했다.

“그 놈을 어떻게 찾을까?”

“…….”

“조폭놈들이 그 놈한테 몰살당한 걸로 봐서 무슨 원한이 있는게 분명해.

그 놈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어.

그리고 그 놈 시체는 그 스탠드바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도 몰라.”

“우리가 거기에 가보면 되잖아요.”

“그 놈들의 비밀 창고 같은 게 하나 있는데 도대체 접근할 수가 없단 말이야.

증거가 없어서 위에서도 수색영장을 발부해주지도 않고….”

“이번 살인 사건으로 물고 들어가면 되잖아요. 그러면 영장 나올 것 같은데요.”

“만일 그 놈들이 마약사건 조사를 눈치 채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한 가지 희망도 사라지는거야.

살인사건 때문에 형사들이 들락거리는 데 그 놈들이 뭔가 대책을 세워놨겠지.”

박형사는 팔짱을 끼고 대책을 세우는데 머리를 쓰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 놈의 시체에 다가간다면 무슨 반응이 나오겠죠?”

나의 말에 박형사는 팔짱을 풀고 나를 돌아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만일 저에게 그 놈이 붙어다닌다면…..제가 그 놈의 몸뚱아리에 가까워지면 무슨 반응을 할 겁니다.

그러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거구요.”

“너..설마..”

“네. 저를 그 곳에 들여보내 주세요. 형사님들은 바람잡이나 해 주시구요.”

“너 그 놈들한테 잡히면 죽을 수도 있어.”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똑같죠. 기왕 죽을거면 이유나 알고 죽어야죠.”

나의 말에 박형사는 한참 동안 내 표정을 살폈다.

박형사는 뒤에 앉아있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차를 몰고 있는 강형사에게 물었다.

“강형사..너 저번에 입수한 그 스탠드바 건축도면 가지고 있지?”

경찰서에 도착한 나는 박형사와 함께 점심식사를 마친 후 그 스탠드바의 건축도면을 익혀갔다.

두 세시간 동안 도면을 익히면서 작전을 세워갔다.

충분히 숙지가 되었다고 판단이 서자 우리는 곧바로 차를 몰아 그 스탠드바로 향했다.

그 스탠드바는 화려한 입구가 인상적이었다.

영업시간이 아님에도 형형색색의 네온등이 정문을 장식하고 있었고, 화려한 드리워진 커튼 뒤로 붉은 카페트가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를 먼저 맞은 것은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검은색 양복의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깍두기 머리는 아니고 말끔하게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호남형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박형사와 강형사를 알아보더니 이내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이 친구는 누굽니까?”

경계하는 듯 한 그들의 눈빛에서는 무서운 살기가 느껴졌다.

이에 박형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여기 살인사건 목격자야.”

무서운 눈빛을 가진 그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한번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놈이 우리 형님한테 전화했던 그 놈이오?”

그의 말에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박형사는 나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그를 달랬다.

“현장조사만 하고 갈거니까 너무 그러지마.”

“잠깐 기다려요.”

그 청년은 우리를 제지하더니 우리에게서 잠시 떨어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말투로 보아 그보다 윗사람인 것 같았다.

통화가 끝나자 그는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20분 안에 끝내쇼. 우리도 할 일이 많으니까.”

우리는 내부로 진입했다.

긴 복도 입구에 진입하자 박형사가 나에게 뭔가를 건넸다.

접혀진 종이였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부적같았다.

“이게 뭐예요?”

“형님이 주신거야. 모진 귀신이 나타나도 니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거래.”

오전의 일을 생각하면 조금 화가 나기도 했지만, 성의라고 생각하고 나는 말없이 그 부적을 받아들었다.

긴 복도를 지나자 큰 홀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조명, 벽지, 바닥재, 진열장…어느 것 하나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실내는 아름답고 화려했다.

우리는 그 홀을 가로질러 반대편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몇 개의 갈라진 복도가 눈에 들어왔고, 각 복도마다 조그만 방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맨 오른쪽 복도 끝에 있는 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박형사가 말을 했다.

“저기야…그 놈들이 죽은 곳…”

그곳을 보자 나는 가슴이 저미어왔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저 곳이 그 피의 살육이 벌어진 곳이라니………

나의 휘청거림을 느꼈는지 박형사가 나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씩 그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낯익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테라스처럼 꾸며진 그 살육의 장소였다.

이미 현장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는 상태라 시각적인 공포는 주지 못했지만, 지워졌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오금이 저리는 듯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시간 없어. 시작해!”

박형사의 명령에 강형사는 의자와 탁자를 쌓아올리고, 그 곳에 올라가 준비해온 공구로 우리 키의 1.5배 정도 위에 설치되어 있는 환풍구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좁은 환풍구 통로가 열리자 나는 쌓여진 탁자와 의자를 타고 올라갔다.

순간 박형사가 나를 잡으며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와야 한다.”

나는 묵언의 답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 통로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 통로는 무릎을 꿇고 기는 것도 모자라 몸을 완전히 눕히고 포복으로 기어야 할 정도로 좁았다.

나는 매직펜 크기의 손전등을 입에 물고 최대한 소리를 감추고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다.

실내의 불빛으로부터 멀어지자 통로안은 그야말로 암흑천지가 되었다.

유일한 빛이라고는 입에 물고 있는 손전등에서 나오는 가느다란 빛줄기 뿐이었다.

매케한 먼지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일어나 앞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기침을 나올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잠시 코를 움켜쥐었다.

타이어에서 바람이 새 듯한 숨이 뿜어져나왔다.

진정이 되자 나는 다시 몸을 앞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갑자기 손전등의 빛이 닿지 않는 저 어둠의 통로에서 정체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쓰으윽…쓰으윽….”

작지만 그 괴상한 소리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쓰으윽…쓰으윽….”

그 소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그제서야 나는 그 소리의 정체가 지금 내가 배를 밀고 전진하고 있는 소리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앞의 어두운 통로 속에서 누군가가 기어오고 있는 것이다.

내 입의 떨림에 맞추어 손전등의 가느다란 빛줄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쓰으윽…쓰으윽….”

2미터 앞까지 뭔가가 다가왔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내 입에 물려 있는 손전등의 빛에 비추어졌다.

새하얀 얼굴에 늘어진 검은 머리…그리고 그 하얀 얼굴에 수많은 세로선을 긋고 있는 핏줄기…..

귀밑까지 찢어지도록 입을 벌리고 활쫙 웃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입속의 하얀 치아 틈 사이로 채워져 있는 핏물….

어디서 본 여자다.

그 병원에서 봤던 간호사였다.

그제서야 나는 알아챘다.

내 앞길을 뿌옇게 만든 것은 먼지와 섞인 안개였다는 것을….

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에 물려진 손전등이 그것을 막았다.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나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은 열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거친 말을 내뱉았다.

‘후…X발…마중 나오지 않아도 되거든?’

그녀가 코 앞까지 다가오자 무서운 현기증이 몰려왔다.

나는 좁은 통로 속에서 간신히 팔을 돌려 미친 듯이 그 부적을 찾았다.

“아…X발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그제서야 그 부적을 성의없이 받아 챙겼다는 사실에 후회가 밀려왔다.

여자의 얼굴이 내 머리에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커다란 먹이를 통째로 삼키려는 뱀처럼 여자는 입을 쩌억 벌리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소름끼치는 한기가 몰려왔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정수리부터 꼬리뼈까지 차근차근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이 와중에서도 내 두 손은 그 부적을 찾기 위해 좁은 통로 속에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종이의 촉감…..

바지 주머니속의 오른손에 느껴지는 종이 촉감….

난 그것을 잡자마자 팔을 비틀어 그것을 두 손으로 펼쳐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여자에게 보였다.

“꺄~~~~~~~~~~~~~~악!!”

온몸의 털이 쭈삣서는 듯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와 함께 여자가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죽음같은 적막감…..

‘무당이 날 한번 살려주는구나.’

나는 길게 숨을 몰아쉬고, 다시 조금씩 앞으로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통로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나는 건축도면에서 본 대로 오른쪽 길을 따라 몸을 이동했다.

그 어둠의 통로를 조금씩 지날 때마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를 전진한 걸까?

끝도 없어 보일 것 같은 좁은 통로의 끝자락이 보이는 듯 했다.

서서히 작은 빛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내 머릿속에 기억된 도면대로 진행했다면 저 곳이 바로 박형사가 말한 그들의 비밀창고다.

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앞으로 전진했다.

입에 물고 있던 손전등마저 전원을 끄고, 그야말로 귀신처럼 다가섰다.

체크무늬처럼 환풍구 창살 사이로 빛줄기가 뻗어나왔다.

나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환풍구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너무나 어두운 곳에서 봐서 밝아보였던 걸까, 창고 안은 생각보다 어두었다.

많은 상자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고, 운송용 지게차도 한 대 보였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준비해온 손가락보다 짧은 드라이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환풍구 창살 사이로 간신히 손가락을 내밀고, 환풍구를 고정하고 있는 나사를 하나 둘씩 풀기 시작했다.

쌓여진 상자를 디딤돌 삼아 나는 조금씩 발걸음을 아래로 내딛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대부분이 술상자들 뿐이었다.

그러나 이내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손톱보다도 작은 빨간색 딱지가 붙은 술상자였다.

나는 그 중 하나를 손으로 들어 내부를 열어보았다.

알 수 없는 주사약들이 들어 있었다.

[펜타닐(fentanyl)]

나는 그 옆의 술병을 열었다.

거기엔 귀에 익숙한 주사약들이 들어 있었다.

[염산페치딘(Pethidine Hydrochloride)]

[모르핀(Morphin)]

한 눈에 봐도 정상인 상황이 아니었다.

술상자 속에 들어있는 주사약이라니…

나는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 모드로 그것들을 돌려가며 찍었다.

그러던 중 상자들이 쌓인 뒷편에 유난히 커 보이는 나무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것을 열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나무로 만든 뚜껑을 밀어냈다.

시큼한 소독약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검은 비닐 같은 것에 뭔가가 덮여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지 어느 정도 예측이 되었다.

나는 천천히 비닐을 벗겨냈다.

놀랍게도 그 간호사의 시체였다.

나무상자안에서 등을 기댄 채 앉아있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혼령으로 나타났을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자의 사각진 곳에 머리를 옆으로 기댄 채, 다소곳이 입을 다물고 있었으며, 눈은 많이 졸린 듯한 표정을 짓고 물끄러미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에 큰 상처가 보였고, 얼굴로 흘러내린 피는 딱딱히 굳어버린 상태였다.

바로 그 때…..창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곳을 찾았지만 개방된 그 곳에서 마땅히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미친 짓이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여자가 들어있는 상자안으로 몸을 우겨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뚜껑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상자를 닫았다.

여자와 단둘이 있던 시간 중에 이렇게 공포스러운 경우는 처음이었다.

나무 상자의 틈 사이로 몇몇의 건장한 남자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내부로 들어오자 서로 마주보며 2열로 줄을 서더니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리고 뒤 이어 두목으로 보이는 말쑥한 차림의 남자가 졸개들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적어도 40은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모두들 90도로 인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윗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형사들이 왔다며?”

두목의 물음에 건장한 청년이 대답을 했다.

“네. 회장님.”

“무슨 일이야?”

“저번 흑검 형님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왔답니다.”

“몇 번이나 왔다갔는데 왜 또 왔어?”

“아무래도 저희 클럽에 대해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두목은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그는 긴 연기를 내뿜었다.

“몇 놈 왔어?”

“두 놈은 형사고, 한 놈은 흑검형님이 죽은 자리에 같이 있던 놈입니다.”

“흑검에게 전화했다는 놈?”

“네. 회장님.”

“도대체 그 놈 정체가 뭐야? 경찰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아무리 뒷조사를 해 봐도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형사 놈들 어떡할거야? 처리할거야?”

“그게 좀…형사라 아무래도…”

“사고로 위장하면 되잖아.”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오늘 밤 이 물건들 다른 창고로 옮겨. 형사놈이 죽으면 여기까지 조사하러 나올거야.”

“네. 회장님.”

휴대폰을 들고 있던 내 손이 부르르 떨렸다.

‘우릴 죽이겠다고?’

두목은 연신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흑검새끼는 왜 지 애들과 싸우다 죽은거야?”

“…….”

모두들 답을 내 놓지 못하자, 그는 불이 붙은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며 뒤로 돌아섰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어? 뭐야… 저건?”

두목이 개방된 환풍구를 본 것이다.

“젠장…..”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땅히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중간보스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누군가에게 명령을 했다.

“야! 손전등 갖고 와봐!!”

그는 쌓여진 상자 위로 올라가 커다란 손전등으로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의 눈에 내가 쓸고 다닌 바닥의 흔적이 보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X발…짭새새끼들….우릴 가지고 놀았어.”

나는 서둘러 박형사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들켰어요! 도망쳐요!!-

“야!! 너 안으로 들어가서 어디에서 들어왔나 확인해!!”

중간보스의 명령에 호리호리해 보이는 한 청년이 환풍구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새끼들 잡아!!”

“예!! 형님!!”

졸개들은 떼거지로 달리는 발발굽 소리같은 구두소리를 내더니 문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두목과 그 중간 보스는 청년이 들어간 환풍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크아~~~~~~~~악!! 크아~~~악!! “

환풍구에서 새어나오는 끔찍한 비명소리에 그 둘은 넋나간 모습으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중간보스 놈이 환풍구 안으로 몸을 우겨넣어 먼저 들어간 그 놈의 다리을 잡아당겼다.

“쿵!!”

환풍구에서 상자를 거쳐 다동그라지 듯이 그 호리호리한 청년이 떨어졌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몇 차례나 얼굴을 회칼로 그었는지, 이목구비가 제 위치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오른손에 피로 젖은 회칼을 든 채 그는 마지막 숨을 몇 차례 헐떡거리고 있었다.

두목과 중간보스는 할 말을 잃고 경기를 일으키는 시체로부터 몸을 뒤로 물렀다.

“뭐…뭔 일이야? 이.. 이자식 왜 이래?”

공포에 질린 두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나는 바로 내 옆에 앉아있는 여자의 표정이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이빨을 살짝 드러낸 채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당장이라도 비명이 터져나올 것 같은 내 입을 간신히 틀어 막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피가 역류하는 듯 했다.

두목과 그의 중간보스는 서둘러 창고를 빠져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음을 확인한 나는 천천히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조용히 발을 내 딛고 나는 남자 시체가 있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아직도 숨이 붙어있는 것 같았다.

얼굴에서는 갈라진 틈 사이로 연신 붉은 액체를 쏟아내고 있었고, 목구멍에서는 피거품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죽어가는 남자 위로 내 등 뒤에서 생성된 검은 그림자가 올라왔다.

모두 다 나간 게 아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재빨리 몸을 던져 그에게 달려 들었다.

“야~~ 개새끼야!!!”

그의 복부를 감싸고 미친 듯이 밀어냈다.

그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자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중간 보스놈이었다.

나간 척 하고 나를 기다린 것이다.

나는 오른 주먹을 치켜 올려서 그에게 날렸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그 주먹을 피하더니 몸을 일으켜 세워 사정없는 발길질을 나에게 날리기 시작했다.

“쥐새끼 같은 놈!! 숨어 있으면 모를 줄 알고?”

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그 놈에게 달려 들었다.

그 놈이 손에 무엇을 들고 나를 내리쳤는지 모르지만,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내 몸은 얼굴을 난자당한 그 흉측한 시체 위로 고꾸라졌다.

여기까지만 기억이 난다.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지금 난 어두운 밀실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옆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을 더듬거리며 그 정체를 확인했다.

만져지는 옷의 종류의 보아 박형사가 틀림없었다.

“박형사님….”

나는 간신히 새어나오는 숨소리로 그를 불렀다.

“박형사님….”

나는 주머니 속을 뒤지며, 작은 손전등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그 놈들이 다 털어간 것 같았다.

지갑, 휴대폰, 손전등 그 어느 것도 없었다.

나는 박형사의 주머니를 뒤졌다.

나와 같이 텅 빈 그의 주머니 속을 이리저리 뒤지다가 라이터가 만져졌다.

나는 라이터를 켰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 숨을 헐떡이던 박형사가 불빛의 자극으로 정신이 들었는지 몇 번의 기침을 토해내고는 눈을 떴다.

그 옆에 있는 강형사는 상황이 더 안 좋아 보였다.

오른쪽 팔이 3등분으로 꺽여 있는 것이 보였다.

팔이 부러진게 분명했다.

새근대는 숨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숨은 끊어지지 않고 의식만 잃은 것 같았다.

그들을 모두 확인한 나는 주변을 살폈다.

두 평도 안되는 공간 속에 우리는 갇혀 있었다.

문으로 보이는 곳을 발로 힘껏 밀어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열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바닥이 유난히도 차겁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철로 만들어진 구조물 같았다.

“우린 이제 죽었네….”

허탈한 심정을 대변하듯 깊은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강형사 좀 똑바로 눕혀줘.”

박형사는 아픈 몸을 일으켜 세워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강형사가 체온을 잃지 않도록 그 웃옷을 덮어주었다.

나는 강형사의 꺽인 팔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자세를 바로 잡아 주었다.

그의 부러진 팔을 바로 잡는 동안 마치 내가 다친 듯 뼛속까지 아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강형사의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숨소리처럼 새어 나왔다.

어느 정도 자세가 바로 잡혔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자리로 돌아와 벽에 등을 기댔다.

라이터를 끄자 그 방안은 다시 칠흑같은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넌 어떡하냐? 억울해서…”

박형사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요?”

“나야 죽으면 국립묘지에 묻히지만, 너는 기껏해야 동네 공동묘지 아니냐?”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갖는 모습으로 보아 박형사의 내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놈들이 우리를 왜 안 죽인거죠?”

“좀 더 우리한테 정보를 뽑아낸 다음 죽이겠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 쉬며 입을 다물었다.

“아….딸내미 시집가는 거는 보고 죽고 싶었는데….”

“딸이 몇 살인데요?”

“이제 10살인데, 엄마가 일찍 죽어서 지가 빨래도 하고, 밥도 알아서 해먹고 다니지….큭큭큭..”

무슨 서러움이 밀려오는지 그는 목이 메이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흐느끼는 소리를 나는 아무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부디 좋은 놈 만나야 할텐데….여자나 후리고 다니는 양아치같은 건달놈 만나면 큰 일인데….”

그 말에 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런 놈 걸리면 내가 귀신이 되어서도 좇아가 죽여버릴거야.”

그 딸내미의 미래의 배우자도 아닐텐데 나는 괜한 죄책감에 그를 달랬다.

“헤헤…그럴리가요? 좋은 사람 만나겠죠.”

“그래야지..”

“그런데, 문자는 받았어요?”

“확인하고 문을 나섰는데 그 때 들이닥치더라구.”

“무슨 형사가 깡패 새끼들 하나 못때려 잡아요?”

“훗….”

나의 푸념에 박형사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형사 한두 명이 깡패 수십명 때려 잡는거?…후후…그런 건 다 영화 속에나 있는 거란다.

깡패들 때려잡으려면 형사기동대, 기동타격대..다 출동하는거야.

누군 칼 맞으면 안 아픈 줄 아냐?

저 튼튼한 강형사도 그 놈들의 방망이 찜질에 팔이 부러진 것 아니냐.

그나저나 넌 한창 나이에 안 됐다. 괜히 형사 사건에 말려가지고…”

그의 말을 듣자 푸념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 놈의 귀신은 결정적일 때는 안 나타나네…..”

“너 창고 안에서 뭐 봤냐?”

“엄청난 양의 주사약하고, 여자 시체 하나 봤어요.”

“뭐? 여자 시체?”

“그 시체는 제가 전에 병원에서 봤던 그 귀신이였어요.”

“그 놈 시체는 못 봤어? 깡패 놈들 몰살시킨…”

“없었어요. 그리고 그 놈이 느껴지지도 않았어요.

그 무당이 준 부적 때문인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어요.

그 놈이 어디로 갔던가, 아니면 묻힌 곳이 여기가 아닐 지 몰라요.”

“결국 거기가 마약 창고 겸 살육의 장소였군.”

“오늘밤.. 그것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했어요.”

“뭐? 오늘 밤?”

“그리고 유일한 증거인 제 핸드폰도 빼앗아 갔어요…”

더 이상 아무런 답안이 없었다.

우리 둘은 동시에 긴 한숨을 내뱉고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어둠 속이라 시간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난 건지, 몇 시간이 지난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당탕탕!!”

무엇인가 격렬하게 무너지는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그러더니 갖은 욕설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새꺄!!”

“퍽!!”

몇 초 동안 그 소란이 진행된 후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 자식이 나타난 건 아닐까?

잠시 후 삐그덕 소리를 내며 철제 문이 열렸다.

강렬한 빛이 우리에게 쏟아졌고, 그 빛줄기 사이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그 실루엣은 우리에게 말을 했다.

귀신은 아닌 것 같았다.

“살고 싶으면 묻지 말고 따라와…”

박형사와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강형사를 가리키며 그에게 외쳤다.

“이 사람 좀 도와줘요!!”

그의 SUV차량에 탑승한 우리는 어디론가 내달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어느 덧 시간이 밤 10시가 넘어갔음을 알게 되었다.

“당신 누구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박형사가 그에게 물었다.

운동모자를 쓰고 운전에 여념이 없는 그 낯선 남자는 살짝 미소를 띄우더니 입을 열었다.

“박형사님…서운합니다. 제 목소리도 잊어먹고?”

“뭐? 당신 나 어떻게 알아?”

박형사의 물음에 남자는 잠시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전화로만 들어서 잘 못알아듣나?”

그의 말에 갑자기 박형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마두?”

그 낯선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넌 죽었어! 내 눈으로 봤다구!!”

박형사의 말에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죽은 지 어떻게 알았죠?”

그제서야 박형사는 눈치를 챘는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했다.

“X발!! 핸드폰만 니 거였군.”

박형사는 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는 듯 했다.

“그럼 죽은 놈은 누구지?”

“내 조직원이요.”

“니가 죽인거야?”

“아뇨. 누구도 죽이지 않았어요. 그냥 그 놈이 죽은 겁니다.”

“무슨 말이야?”

“나연이와 그 놈한테 얼마동안 시달리면서 난 정말로 죽을 것 같았소.

며칠 동안 집을 비워두었죠. 그런데 동생처럼 아끼는 놈이 하나 있는데 그 놈이 집을 이사를 해야 하는데

날짜가 안 맞아 들어 갈 집의 이삿짐이 안 빠진거요. 그래서 내 집에 3일 정도만 머물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거요.

처음엔 귀신 나타난다고 경고도 했소. 그런데 그 걸 누가 믿겠소?

그 녀석이 그 집엘 들어가서 3일 째 되는 날 투신한거요.

우리들 폰은 모두 사용 용도가 다른 대포폰이요.

내가 가지고 있는 폰만 5개요.

형사님한테 전화할 때 쓴 건 집에 놓고 나왔소.”

“그럼 내가 사건 조사하러 빠에 들락거렸을 때 마두가 누군지 너의 조직원들이 알았을텐데?”

“형사님은 지금 마두라는 이름이 우리 세계에서 쓰이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는거요?

조직에서 사용되는 내 이름은 ‘백사’요.

‘백사’라는 이름으로 형사님한테 전화한 것 들키면 난 바로 한강이나 서해 앞바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될 거요.

안 그래도 당신한테 장부를 넘기기로 한 날, 난 장부를 손에 쥐기 위해 빠로 들어갔는데

그날 따라 보안이 철저한거요.

여러가지 방법으로 창고 장부를 얻어내려고 했는데 실패했소.

밤마다 귀신놀이를 하고 빠에 드나드는 내 모습이 어떠했겠소?

꼭 그 장부 때문이 아니어도 나의 행동과 몰골은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소.

아니나 다를까 주변의 조직원들이 조금씩 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겁니다.

곧 그들의 엄청난 정보력이 작동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도망을 칠까, 아니면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 아니면 발뺌을 할까 여러가지 방법을 구상하던 와중에

마침 그 동생 놈이 죽은거요.

그리고 경찰들은 그 핸드폰의 통화내역을 보고 그 동생놈을 마두라고 여긴거요.

마두란 실존 인물도 아니니 우리 조직원들은 그 동생놈이 이름까지 바꿔가며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여긴 겁니다.”

“염병할…완전히 삽질했군..”

박형사는 자신의 머리를 치며 자책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럼 지금 그 장부가 있나?”

박형사의 물음에 백사라는 남자는 갑자기 박형사에게 휴대폰을 던져 주었다.

“회장이라고 불리는 두목의 개인 사무실 금고에 있소.

오늘 밤 그들이 약물, 시체, 장부….모든 증거를 옮길 예정이오.

오늘 밤이 지나면 영원히 그들을 잡을 수 없소.

지금 경찰 병력을 출동시키시오.”

남자의 말에 아무런 대꾸없이 박형사는 조용히 버튼을 누르고 통화를 시도했다.

“나 박형사야…내 걱정 안해도 돼…무사해..

지금 그 스탠드바로 형기대, 타격대 모조리 쏟아부어!!

업소 안쪽에 창고까지 모조리 압수수색해!!

영장은 나중에 발부받아!!

내가 책임질테니까 지금 출동해!!”

통화를 마친 박형사는 백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가는 건가?”

“그 놈이 있는 곳….”

“뭐?”

박형사는 나를 한 번 뒤돌아보더니 표정을 살폈다.

“잠깐 그 전에 먼저 뒤에 있는 강형사부터 병원으로 옮겨줘.”

“좋소이다. 그 정도야 뭐….”

가까운 병원에 들린 우리는 응급실로 강형사를 옮기고 백사의 차량으로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장부에는 뭐가 있지?”

박형사의 질문에 백사는 잠시 쓴 웃음을 지었다.

“몇 년전에 우리 클럽에 김나연이란 갓 스물 넘은 미모의 어린 친구가 들어왔소.

그냥 빠에서 얼굴로 승부하면서 대화도 나누고, 술도 따라주며 손님을 접대하던 여자였소.

처음엔 몰랐는데 생각보다 말도 잘하고, 옷도 잘 차려입더이다.

1년 정도 지나자 그녀의 요염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소.

남자들의 애간장을 녹였놨지.

그녀와 말 한마디를 나누기 위해 밤새 부산에서 달려오는 손님도 있었고, 사업체 출장근무를 포기하고

날이 새도록 그녀와 얘기하는 손님도 있었소. 심지어 일본에서 오는 손님도 있었소.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수 백만원의 술값은 문제가 아니었소.

우리 조직은 엄청난 그녀의 힘을 느끼자 손님들을 회원제로 바꾸었소.

최고급 손님들만 받은거요. 그것도 그녀를 만나는 시간을 정해서….

그런데 거기서부터가 잘못이었소.”

백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그 다음에 할 말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큰 병원을 운영하는 원장이라는 친구가 우리에게 요구를 하나 하는거요.

그녀와 잠자리를 주선하면 좋은 거래를 하나 하겠다고 합디다.

그의 말은 조직 입장에서는 실로 군침이 도는 것이었소.”

박형사가 잠시 그의 말에 끼어들었다.

“병원 마약이었군.”

“그렇소. 병원으로 유입되는 마약 진통제들을 유통시켜 주겠다는 것이오.

그것도 공짜로 말이오.

우리는 흔쾌히 승락했소.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거요. 나연이가 그 원장과 잠자리를 거부한거죠.

우리 조직은 포기할 수 없었소.

상품가치가 떨어질까봐 나연이에게 손만 대지 않았지 온갖 협박을 다 동원했소.

심지어 가족들까지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소.

그래도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소.

그리고 며칠 후 그녀가 갑자기 결근을 한거요.

도망을 친거죠. 우리 조직의 정보력은 이미 경찰 내부까지 닿아 있어서 찾는 건 시간문제였소.

이틀만에 나연이가 잡혀왔소.

그런데 잡아오는 와중에 나연이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나연이의 아버지가 조직원들의 손에 당했소.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죽게 된겁니다.”

“X발 놈들…깡패새끼들은 사회의 암덩어리라니까….다 싸그리 총살시켜버려야 해.”

박형사의 분노섞인 탄식이 쏟아졌다.

“후후….그 세계 생리가 원래 그런거요.

하여튼 나연이는 반실성 상태로 돌아왔죠.

일을 시켜야 하는데 도대체 일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 때 그 원장놈이 약을 하나 추천해 줍디다.

펜타닐(fentanyl)….

모르핀보다 100배나 센 진통제라고 하는데 효과는 끝내줍디다.

나연이가 손님들을 접대하기 시작한거요.

원장놈이 나연이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소문이 나돌자 발정난 개들처럼 사방에서 고위층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기 시작했소.

우리 조직은 바보가 아니오.”

“혹시 모를 내일을 위해 장부에 그들을 기록해 두었겠군.”

“그렇소 사육하듯이 길러지는 나연이가 언제 한 방에 훅 갈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힘있는 자들을 옭아맬 족쇄를 만든거요.

그들이 우리를 배신할 수 없도록 말이오.

특히 그 원장놈의 경우는 나연이과 함께 밤을 보낼 때 우리가 비디오까지 촬영해 두었소.

그 장부에 기록된 명부를 보면 당신도 깜짝 놀랄거요.”

“경찰 고위층도 있나?”

“내가 그나마 경찰에게 일말의 믿음을 갖는 것은 당신네 소속은 거기에 없었다는거요.”

나는 순간 궁금한 점이 하나 떠올랐다.

“그런데 창고의 여자 시체는 뭐예요?”

“간호사?”

“그래요. 간호사….”

“원장하고 내연의 관계에 있던 여자야. 원장이 나연이에게 맛들려 있는데 그 여자가 눈에 들어오겠냐?

게다가 그 원장 놈이 병원 장부 조작하다가 그 여자한테 들킨거야.

그 여자는 그걸로 원장을 협박하면서 다시 만나주길 바랬고..

그 때 원장이 하고 싶었던 건 뭐였겠냐? 뻔하지 뭐….

결국 원장이 부탁해서 조직원들이 처리한거야…”

“X발새끼들…오늘 내로 니 들 모두 평생 콩밥이나 먹을 준비나 해라..”

박형사는 마치 총이라도 있으면 쏴죽일 기세로 그를 몰아 붙였다.

“너무 흥분하지 마쇼. 형사나리…나는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개새끼들….”

어느새 차량은 큰 대로에 진입했다.

백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그 상류층 모임을 ‘사일런트 엔젤’이라고 불렀소.”

뒷좌석에 앉아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귀가 쫑긋 서는 기분이었다.

“사일런트 엔젤이 그거였군요. 그 말 한마디에 난 죽을 고비를 몇 번을 겪었고…”

“시간대를 정해 그녀를 만나니 나연이를 상대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서로 모르는거요.

물론 그들도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오. 오로지 나연이를 만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우리는 나연이의 상품가치를 길게 끌어야 했소.

그래서 약도 펜타닐에서 비교적 약한 염산페치딘으로 바꾸었소.

그런데 그게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킨거요.

나연이가 현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거요.

나연이를 감시하면서 보살핀 사람은 나였소.”

그는 갑자기 지난 기억에 대한 아픔이 밀려오는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처음에 업소에 들어온 날부터 난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소.

그녀가 출퇴근을 할 때는 매일 같이 차로 동행했소.

조직에서 시킨 일이었지만 나에게 일이 아니었소. 그냥 행복 그 자체였소.

그녀와 같이 있는 1초, 1초가 나에게 너무나도 즐겁고 짜릿한 시간이었소.

한 번은 내 생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차 안에서 작은 초콜렛 케익 상자를 하나 건넵디다.

살아오면서 온갖 험하고 거친 일을 모두 겪으면서, 오로지 독기와 증오, 투쟁만으로 얼룩진 나에게 나연이는 하나의 커다란 오아시스였소.

그 순간 나연이를 품고 싶었지만 그것은 곧 우리 서로에게 종말을 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소.

나는 우리 조직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오랜 시간이 흘러가도 난 나연이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버릴 수가 없었소.

나연이가 그렇게 망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나의 심정이 어떠했겠소?”

어느덧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이 돌아온 나연이가 어느 날 저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합디다.

저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소.

조금만 견뎌보자고 그녀를 위로할 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소.

그런데 얼마 후 난 내가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된거요.

사일런트 엔젤 중에 시의원 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 놈 보좌관이란 녀석이 항상 따라다녔소.

아주 핸섬하고, 매너있고 굉장히 유식한 놈이었소. 게다가 참 착해 보였소.

이름이 박태수란 놈이었는데 그 놈도 나연이에게 푹 빠져 버린거요.

의원놈이 그녀와 술자리를 하는 동안 보통은 밖에서 기다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술자리에 동석을 하는거요.

나연이가 의원놈을 설득해서 그런 거라오.

나는 육감적으로 알아챘소. 그녀도 그 보좌관 놈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나를 떠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소…”

백사는 잠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저 깊은 곳으로 사라졌던 독기와 증오, 분노가 그 놈을 보는 순간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소.

안개가 자욱하던 어느 날 밤 나는 ㅇㅇ대로로 그를 유인했소.”

“죽였군.”

박형사가 끼어들어 그가 할 말을 대신 해주었다.

백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음 말을 이었다.

“그 놈을 죽이고 나니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았고, 이젠 자신감까지 붙었소.

모든 것을 터뜨리고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기로 작정한거요.

그래서 당신한테 연락을 한거요.”

“너를 죽이겠다고 나타난다는 놈이 박태수 그 놈이야?”

“그렇소”

백사는 힘없이 대답을 했다.

“박태수…..결국 그 사람이었군요….”

나는 진실에 맞닥뜨렸지만 지금 이 순간 어떠한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지 정할 수가 없었다.

잠시 몇 초간의 침묵이 차량 안을 맴돌았다.

“김나연은 어떻게 죽은거야?”

“자살했소….”

“뭐? 자살? X발 거짓말 아냐?”

“거짓말 아니오. 정말 자살까지 할 줄은 몰랐소.

그 보좌관 놈이 안보이자 우리가 처리했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스스로 목을 매달아 목숨을 끊은거요.

그 만큼 그 놈을 사랑했으니까 그랬겠죠…..”

“그래서 사체를 정화조에 버린거야?”

백사는 박형사의 물음에 대답을 거부한 채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나연이가 우리 업소에서 죽은 걸 엔젤들이나 경찰들이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끝장이었소.

우리는 나연이의 일가 친척에게 다가가 얼마의 돈을 쥐어주고 실종신고를 하라고 했소.

우리 입장에서는 나연이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되니까 경찰들에겐 큰 의심을 사지 않을거라 생각했소.

그 친척들이 우리의 행동을 의심할 만도 했는데, 돈 앞에는 꼼짝 못하는거요.

우리도 쓰레기였지만 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소.

나연이와 떨어져 사는 아버지를 그 누구 하나 돌봐 주지도 않았으면서, 우리가 돈을 건네자 나연이의 실종을 자기 일처럼 슬퍼하는거요.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진거요..”

“뭐가?”

백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멍하니 전방을 주시했다.

자신이 운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걸까?

“아저씨…정신차려요!!”

나는 그의 정신을 깨우려 소리쳤다.

그제서야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린 분명히 산속 깊은 곳에 묻었소.

그런데 나연이가 정화조에서 발견된거요.

우리가 나연이를 묻은 산과 정화조는 가까이 있지만 이건 누군가가 옮기진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오.”

밤 10시가 훨씬 넘었음에도 대로에는 고속으로 질주하는 차량이 넘쳐났다.

그런데 뭐가 이상하다.

익숙한 이 길…..

“이봐요. 아저씨….지금 여기는?”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보냈다.

“항상 진실은 가까운 곳에 있는거야….”

이에 박형사가 그의 말을 제지했다.

“야! 너 무슨 말 하는거야?”

그는 아무 대꾸없이 파손된 가드레일 옆에 차량을 급정지시켰다.

내가 사고를 낸 지점이었다.

그는 차에서 천천히 내려 그 정화조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서둘러 따라 내린 우리는 무표정한 그의 옆모습을 살피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내 임무는 여기까지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가 입을 열었다.

“임무라니?”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고통을 아시오? 이젠 맘 편히 떠날 수 있겠네…”

뜬금없는 그의 말에 박형사는 게속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거야?”

그제서야 그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무서운 눈빛으로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화조가 너무 얕다고 생각해 본 적 없소?”

순식간이었다.

아무도 제지할 수 없었다.

그가 갑자기 대로로 뛰어들었고, 고막을 찢는 듯한 타이어의 스크래치음이 들렸다.

큰 트럭에 치어 공중으로 떠오르는 그가 보였다.

10미터 이상을 날아간 그의 몸이 힘을 잃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나동그라졌다.

트럭에 뒤이어 여러 차량들이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춰섰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고,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박형사와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서서히 사람들 틈 사이로 그가 누워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 이유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사고의 처참함이 아니었다.

처참함으로 따진다면 핏물로 머리를 감은 듯한 나와 박형사의 얼굴이 더 구역질을 유발할 것이다.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 하나는 엿가락처럼 휘어 머리까지 닿아있는 지금의 그의 자세도 아니었다.

정작 우리의 눈을 의심케 만든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경악스런 그의 모습이었다.

수개월을 굶은 사람처럼 볼은 함몰되어 있었고, 몸의 수분을 쫘악 빨아낸 듯 몸은 말라 있었다.

짙은 다크써클로 둘러싸인 눈알은 그 크기를 보여주기라도 하는냥 얇은 가죽이 된 눈꺼풀로 간신히 덮여 있었으며,.

조금 전까지 혈기왕성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저승사자 같은 청백색의 얼굴빛은 그가 조금 전에 죽은 사람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묘한 미소를 띠며, 죽어있는 그의 모습 앞에서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박형사는 숨소리같은 속삭임으로 넋두리를 했다.

“X발…이젠 형사질도 못해 먹겠네..”

박형사는 백사가 준 휴대폰으로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했다.

얼마 후 사고현장에 경찰과 구급대원들이 도착하였다.

시신을 수습하는 그들의 표정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사고 수습을 하러 나온 경찰들이 박형사를 알아보고 우리에게 얼굴과 손을 닦을 수건을 건넸다.

한참 얼굴을 문지르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두가지 모진 일을 겪은게 아니구만…얼굴들이 많이 상했어.”

자신을 법사라고 불러달라던 무당이었다.

“아니…형님! 여긴 어떻게 알고?”

“너, 몇 시간동안 실종되었다며?

니네 서에서 나한테까지 전화질이더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서에 들렀다가 여기 현장에 있다길래 와 봤어..”

무당은 박형사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어이쿠..이 젊은 친구는 아예 순사가 되셨나 보네.”

나는 대답을 거부한 채 시선을 돌렸다.

“형님..혹시 조금 전의 사고 난 시체 봤어요?”

“그래…”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긴?

죽은 영혼이 자신의 몸을 떠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붙들려 다닌거지.

한 맺힌 원혼이 그를 붙잡아두고 있었겠지…

이제 그 원한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 같군.

자신의 몸이 썩어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쉽지 않았을거야.”

“우와 완전히 좀비네요. 좀비….”

그제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

그 때 멀리서 경광등을 밝히고 형사기동대 차량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포크레인 한대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저건 뭡니까? 형사님.”

“아까 백사가 그랬잖아. 정화조가 너무 얕다고…

그래서 요청했어.”

“그럼, 박태수란 사람이 김나연이를 발견한 자리 아래에 묻혀 있단 말입니까?”

“백사 말이 맞다면 그럴거야…”

현장에 도착한 포크레인은 정화조 주변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정화조의 밑동이 드러나자 포크레인의 거대한 삽이 정화조를 힘껏 밀어 넘어뜨렸다.

엄청난 양의 토사와 함께 정화조를 채우고 있던 이물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도 함께 쏟아져 나왔다.

살점은 거의 붙어있지 않고 앙상하게 남은 뼈들이 서로 분리된채 쏟아져 나왔다.

몇 개의 뼈들을 감싸고 있는 누더기같은 옷만이 그것이 사람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저기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세상에…..”

무당이 갑자기 긴 탄식을 내뱉았다.

“왜요? 아저씨?”

“네가 자네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기운이 저 시체에서 쏟아져 나오는구만.”

무당은 두 손을 합장한 채 염불같은 주문을 외우며 그의 명복을 기렸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뼈들이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이었단 말입니까?”

박형사는 옆의 경찰에게 담배 하나를 얻은 후 조용히 그것을 입에 물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연신 담배를 빨고 있는 박형사의 모습은 사건을 해결한 후의 형사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사건에 직면하여 고민하는 형사의 모습이었다.

“무슨 고민거리 있으세요?”

나의 물음에 박형사는 긴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산 속에 묻었다는 김나연이 시체는 어떻게 된거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포크레인이 임무를 마치자 철수를 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포크레인이 물러난 그 자리에는 구급대원들이 채워졌다.

그 때 박형사가 굉음을 내며 떠나려는 포크레인을 잡아세웠다.

그리고 큰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구청에서 나왔죠?”

40대로 보이는 포크레인 기사는 박형사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지 시동을 끄고 물었다.

“왜요?”

“아저씨 이 정화조 공사 한 적 있어요?”

“예전에 이거 만들 때 했었소.”

“이 정화조 용도가 뭐예요?”

“예전에 주변에 길 건너편에 작은 상가가 있어서 폐수정화로 사용되었던건데, 지금은 폐쇄되어서 그냥 방치되어있는거요.

정화조와 연결된 하수로는 그냥 빗물 수로로 사용되고 있소.”

“그 수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아요?”

“잘은 모르는데….아마…”

기사는 300미터 이상 떨어진 길 건너편 야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산의 토사유출을 막기 위해서 작은 수로가 만들어져 있는데 거기서 모아진 물이 이 곳으로 유입될거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박형사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젠장….떠내려온거군….

큰 비 때문에 토사가 유출되면서 수로로 들어간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사가 말한 가까운 산이란 눈 앞에 보이는 그 곳 밖에 없었다.

지름이 1미터 정도 밖에 안돼 보이는 수로를 통해 무려 300미터 이상을 떠내려오다니……

김나연의 시체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저 수로 속에서 보냈던 것일까?

게다가 그 수로는 윗부분이 살짝 노출된 채 인근 아파트에서 만든 작은 체육공원을 지나고 있었다.

밤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물에 불은 그 시체를 밑에 두고 여가를 즐겼다는 것 아닌가?

생각만 해도 스름이 끼쳤다.

“그런데 소름끼치는 저 시체는 뭐요?”

포크레인 기사가 박형사에게 물었다.

“수백미터 떨어져 잠들어있는 사랑하는 여인을 여기까지 불러낸 남자랍니다.”

박형사의 엉뚱한 대답에 기사는 잠시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인가?

안도감과 함게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두통까지 밀려와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 때 시신 수습을 하고 있는 구급대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넘어진 정화조 뒤쪽으로 깊은 어둠을 간직하고 있는 수로가 보였다.

왠지 모를 이유로 나는 그곳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내 발앞으로 떨어지는 작은 물줄기….

잠시 후 그 어둠 속에서 나타난 하얀 형상…

뱀처럼 꿈틀대며 그것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스르르르륵….스르르르륵…..”

허리까지 늘어진 검은 머리, 나를 향해 바라보고 있는 그 하얀 얼굴…..

팔다리를 모으고, 엎드린 자세로 머리만 처든 채 김나연이 헤엄쳐오고 있었다.

“아~~~~~~악!!!”

비명소리와 함게 나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성태야!! 정신 차려!!”

아버지였다.

꿈이었다.

“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나는 와락 아버지를 끌어 안았다.

뜬금없는 나의 행동에도 아버지는 내 몸을 밀어내지 않고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그리웠던 아버지의 말투가 이어졌다.

“개놈의 자식…”

나는 한동안 아버지를 꼭 끌어 안고 눈물을 쏟아냈다.

아버지 또한 내 어깨 너머에서 흐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감정을 추스린 나는 아버지에게 지금 이곳에 있게 된 경위를 물었다.

“이놈아..어제 밤 사건 현장에서 니가 갑자기 쓰러졌댄다.

너 도대체 뭔 일을 저질렀길래 사람 죽은 곳만 따라다니는거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얘기 하기에는 너무나도 길었고, 한다고 해도 아버지가 믿어줄리가 없기 때문이다.

잠시 후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깨어나셨네요. 김성태씨…”

“네..”

“퇴원하셔도 되구요. 그리고 아까 박정우 형사라는 분이 김성태씨 잠들어 계실 때 오셨다가 메모만 남기고 가셨어요.”

나는 간호사가 내민 쪽지를 받아들어 펼쳐 보았다.

-퇴원하면 잠깐 경찰서에 들렀다 가라-

나는 퇴원 수속을 마치고 경찰서로 향했다.

몇 시간을 병원에서 잠들어 있었던건지 벌써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있었다.

이번 사건이 초대형 사건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경찰서 주변은 몰려든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정문을 지키고 있는 의경에게 신분을 밝혔다.

“박정우 형사님께 김성태가 왔다고 말씀드려 주세요.”

의경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나를 경찰서 안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만신창이가 된 서로 얼굴을 마주하자 우리는 잠시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인사를 나눴다.

박형사는 취조실 같은 밀폐된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거기에는 무당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신가? 젊은 친구.”

무당이 손을 들어 나에게 친근감을 표시했다.

나는 수그러드는 말투로 화답했다.

“네..”

박형사는 노트북이 놓여진 취조실 탁자 앞에 앉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이거 니꺼지? 증거품 속에 들어있던건데..”

내 휴대폰이었다.

그는 나에게 휴대폰을 건네주면서 노트북을 만지작거렸다.

“바탕화면에 이쁜 여자 사진이나 깔아놓지, 니얼굴을 박아놨냐?”

“훗…제가 떨군 휴대폰 보고 반해서 찾아온 여자도 있어요.”

“대단하군…”

“여기 들어있는 증거 동영상 봤어요?”

“이미 다 다운 받아놨어.”

이리저리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던 박형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성태야….너 이것 좀 볼래?”

박형사가 무슨 동영상같은 것을 하나 재생시키더니 노트북 화면을 나에게 갖다 대었다.

“길 건너편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CCTV에 잡힌 화면이야.

이번 사건 때문에 조사하다가 형사계에서 입수한 건데 너무 멀어서 잘 안보이지만 여기에 니가 사고 난 장면이 찍혀있어.”

나를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며 멀리 보이는 대로를 주시했다.

“새벽이라 차가 거의 없어. 그런데 지금 잘 봐봐.”

박형사가 갑자기 화면을 정지시켰다.

“이거 니차 아냐? 테두리에 네온등하고, 반사등 붙였잖아.”

난 내눈을 의심해야 했다.

내가 사고 난 지점의 반대 차선을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박형사는 이어서 재생버튼을 눌렀다.

20여초가 지났을까?

반대편 차선에 다시 내 차가 나타났다.

그리고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희한한 광경에 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동영상이 끝나자 박형사는 노트북을 접었다.

“술이나 한 잔하러 갈래?”

“사건조사 하셔야 할 분이 뭔 술이요?”

“서에서도 오늘 쉬라고 했다. 다른 형사들이 조사할거야.”

옆에 서 있던 무당이 거들었다.

“동동주에 파전 한번 땡길까? 박형사?”

실내 포장마차에 들어선 그간의 사건을 안주삼아 우리는 신나게 술을 들이켰다.

나 뿐만 아니라 모두들 술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왜 무당이 되었어요? 딸꾹”

건하게 취해서 혀꼬이는 나의 발음에 무당이 대답했다.

“법사라고 부르라니까 쟈식아!!”

“그러니까…법사님… 왜 무당이 되었냐구요? 꺽…”

“허허…그래도 무당이라네. 몹쓸 놈..

고등학교 때부터 이유없이 몸이 아파서 신내림 받은거야.”

“에이..맞네..무당…”

“야 임마…. 난 무당처럼 굿하고, 작두타는 게 아니라 염불외는 법사라구.”

“그럼 염불외는 무당이네….딸꾹..”

“허허허…내가 포기했다. 그나저나 니가 내 제자로 들어오면 뭔가 제대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휴….아저씨..전 이젠 귀신이라면 치가 떨립니다. 말도 꺼내지 마세요.”

“썩을 놈….”

무당 아저씨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눈빛을 보내더니 동동주를 한 사발 들이켰다.

박형사는 술이 센 것 같았다.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바른 자세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성태, 너는 하는 일이 뭐냐? 그냥 노는 것 같던데…”

박형사의 물음에 나는 입꼬리을 한 번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여자나 밝히고, 술이나 밝히고…몹쓸 짓도 많이 하고…그렇게 사는 놈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늙어 죽을 때까지?”

“저도 이젠 이 생활 청산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뵐 면목도 없구요…”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다.”

박형사는 조용히 술 한잔을 들이켰다.

“이봐…젊은 친구..남자가 살면서 조심해야 될 세 가지가 있어.”

무당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뭐요?”

“혀끝, 손끝, 고추끝…”

“뭔 말이예요?”

“혀끝은 술조심하라는 소리고, 손끝은 도박조심하라는 소리고, 고추끝은 뭔지 알지?”

무당은 능글스런 웃음을 지으며 나의 답변을 기다렸다.

나는 빠딱한 자세로 반쯤 감긴 눈을 치켜들며 답했다.

“포경수술 조심하라구요?”

“에라이…썩을 놈.”

무당은 능글스런 웃음을 지우고 다시 한번 술을 들이켰다.

나의 대답에 박형사가 한바탕 웃음을 쏟아냈다.

이 때 포장마차 안에 있던 TV에서 귀에 익은 내용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오늘의 첫 뉴스입니다.

ㅇㅇㅇ동 스탠드바와 관련된 소식이 속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회 상류층이 연루된 최악의 섹스스캔들 사건으로 전국이 시끄럽습니다.

대기업 임원, 병원장, 심지어 시의원까지 연루되어 있는 이번 스캔들의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경찰과 검찰은 ㅇㅇ병원 원장 최모씨를 살인교사 혐의와 마약류 관리법 위반혐의로 긴급체포하고 기소할 방침입니다.

또한 스탠드바 대표이사와 운영에 가담한 조직원들에 대해서는 청부살인과 마약류 유통에 관한 혐의를 조사중입니다.

한편 서울시는 ㅇㅇ동 스탠드바의 사업자등록을 말소시키고, 대표이사인 이모씨를 탈세혐의로 경찰에 추가로 고발할 예정입니다.

경찰과 검찰은 오늘 오후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합동 수사반을 구성하고…..”

“우리가 뭔가 하긴 했네요.”

“그래. 엄청난 일을 한거야.”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박형사와 나는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술자리를 끝내고 길거리로 나섰다.

취기가 한참 올라온 나는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로 비틀거렸다.

박형사는 내 손을 한번 굳게 쥐더니 작별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고, 다시는 경찰서에서 만나는 일 없길 바란다.”

“형사님도 잘 지내세요. 딸꾹…..딸내미 이쁘게 키우시구요…

그리고 나 같은 남자친구 만나지 않기를 바래요..”

“허허…..그래야지”

내 몸은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정신만은 멀쩡했다.

“이봐, 젊은 친구. 다시 한번 생각해 줄 수 없나? 나하고 일하는거…”

무당의 집요함은 여전했다.

“무당 아저씨….아니 법사니….이임!!! 나중에 귀신 나타나면 찾아갈테니 부적 하나 잘 써주세요.

그거 효과 있던데요. 딸꾹….”

“에라이…썩을 놈. 잘 가라 이 놈아!!”

나는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마치고 차를 기다렸다.

오늘은 이 몸으로 버스를 탔다가는 민폐를 끼치는 것이다.

저 멀리서 택시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였고, 나는 손을 흔들었다.

뒷좌석에 기댄 나는 몸을 최대한 눕혔다.

“어디로 모실까요?”

“ㅇㅇ동, 오피스텔이요….”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던 거다. 오늘은 아버지 집에서 자고 싶었다.

“아저씨….거기 말고, ㅇㅇ동 ㅇㅇ아파트로 가주세요.”

“네. 안전하게 모십죠…”

지금 이 순간 몸은 말을 잘 듣지 않았지만 아직도 내가 정신은 멀쩡하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택시기사의 목소리가 너무 익숙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아저씨…나 알죠?”

룸미러를 통해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하였으나 그가 보이지 않았다.

“고맙소. 젊은이….오늘 요금 뿐만 아니라 그 전에 빚진 27000원도 받지 않으리다.”

나는 순간 가슴이 미어져 왔다.

택시 안에 안개같은 것이 자욱했다.

몇 번이나 눈을 비벼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노트북에서 보았던 동영상이 떠올랐다.

그 영상 속에서 사고 후 나는 택시를 타지 않았다.

그냥 내 발로 대로를 건너 수킬로미터 떨어진 병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내가 타고 갔던 이 택시는 가짜였던 것이다.

온 몸에 거부감이 몰려올만도 했지만 나는 이내 편안한 감정을 되찾았다.

그의 의미심장한 감사의 표시 때문이었다.

나는 최대한 편안한 감정을 유지하고, 너무나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아저씨….나연이 아버지죠?”

“허허…알아차렸구랴…정말로 고맙네. 젊은이….자네 덕에 오늘이 나의 마지막 운행이 되겠구려…”

“아저씨….저 지금 걷고 있는거잖아요. 귀신차에 타서……안 그래요?”

“걱정 말게 젊은이. 자네가 다치지 않도록 잘 데려다 주겠네. 그냥 푹 쉬게”

지금 이 순간 나는 택시를 타고 있지만, 어쩌면 내가 위험하게 대로의 한 복판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건 지금 나는 너무나도 편안하고, 그 때처럼 졸음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아저씨…딸내미 얘기나 해 줘요…”

“우리 나연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만큼 너무 이쁜 딸이었다오..

어려서 엄마가 사고로 죽고, 나와 같이 살았는데 정말 힘들었지만 예쁘게 잘 커주었다네…

어려서부터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깨도 주물러 주고, 재롱도 떨고, 심지어 밥도 차려주고….”

기사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연신 딸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편안하게 자세를 취한 나는 기사의 얘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박형사에게 하지 않은 한 가지 이야기 때문이었다.

동영상에는 사고 직후 나이트에서 꼬신 여자가 내리는 모습이 없었다.

그런데 그 여자 얼굴이 기억이 안난다.

그냥 나이트에서 꼬신 여자라는 기억 뿐……

내가 그 날 나이트에 가기라도 한 걸까?

원래 난 나이트에서 그렇게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지 않는데?

그리고 내가 왜 반대편 차선을 달리다가 돌아온 거지?

이 때 문자음이 울렸다.

-오빠, 고마워 ^^-

“후~~~”

긴 한숨이 쏟아졌다.

문자가 찍힌 액정화면을 수십 차례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기사에게 물었다.

“아저씨…..따님 번호가 010-7649-xxxx번이예요?”

나의 물음에 딸 자랑에 여념이 없던 기사가 말을 끊고 고개를 돌려 답했다.

“우리 딸이 문자도 참 애교스럽게 보낸다오….”

씨익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터져나오는 눈물 섞인 너털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택시는 신나게 도심 한가운데를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