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결혼한지도 어느덧 까마득하고..
이젠 퍼질대로 퍼진
완벽한 아줌마가 되어버린 지금 생각해보니
미스 시절엔 참 답답하고 고집스레 이성을 보았던 거 같다.
특히나 배우자를 골라야할 지경에 이르러서는
은근한 피해의식과 경계경보로 인하여
좋은 사람들을 많이 놓쳤던 거 같다.
마음이 통하고 얘기가 잘 통해서
어느정도의 경계를 풀었다가도
상대가 슬쩍 스킨쉽을 시도한다거나
대놓고 ‘손 좀 잡아도 돼요?’ 이 반응을 보이면
그간에 느꼈던 그의 지적인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본능에 충실한 한마리 수컷이 내 앞에 그 옛날 아담처럼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는거 같아
자지러지면서 내가 왜 한때라도 이 수컷에게
본능에 충실할 여지를 주었던가 하고
땅을 치며 나의 전후 행동을 살피며 옷매무새를 다잡곤 했다.
지금은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득하긴 한데
한창 꽃 피어오르던 나의 리즈시절(^^;;)
나의 이런 행동이 뭇남성들을 울리기도 했을 듯 싶다.
여튼 아무 생각없이 남들이 말하는 혼기를 지나치고
남들 알콩 달콩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심각한 자기 반성에 이르러
좋은 사람을 만나야겠단 생각을 간절히 했을 때에도
나는 이성에 관한한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 한가지가
절대 응큼한 남자는 만나지 말아야지..였다.
응큼하지않은 남자는 여러모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그 시기에 내가 바랐던 이상적인 남성형은
고결하며 대쪽같은 성품에
황진이를 봐도 전혀 꼴리지 않는 (-_-;;)
서화담 같은 남정네였던 듯 싶다.
이성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가
다들 나를 보며 피식했다.
니가 바라는 남잔 말야..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거나 성적인 문제가 필히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넌 필연적으로 너의 이상형은 만날 수 없어.
꿈 깨라. 꿈깨..
그들의 손사래 짓에 나도 어느정도
나의 이성관이 잘못되어 있단 건 알았지만
그래도 좀 더 만나볼까 하는 단계에서
남자들이 갑자기 한마리 수컷으로 변할 때는
대책없이 오만정이 뚝 떨어지는 비위장을
가진 터라 당최 타협이 안되었다.
그런 시점에서 3개월간 거리를 두고
더 알아보고자 싶었던 남자분이 있었는데
세번째 만날 때 손잡기를 거부했더니
그 다음 부터 연락을 끊으셨다.
나는 인내심이 부족했던 남자분을 당시엔 탓했는데
지금은 그가 십분 이해된다.
3개월간 뜨막하게 연락주고 받고
3번 만난 여자가 자신에게 호감이 없어보이는데
내가 왜 목을 매겠냐.. 뭐..
이게 정상적인 반응 일테니까..
여튼.. 이런 남자들의 반응에 한창 상심해 있을 때에
지금의 우리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봤을때 인상도 좋았고 그렇게 큰 키도 아니었고..
나에겐 전혀 이성적인 남정네의 페로몬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담백함으로 다가왔기에
경계 경보도 해제해 버리고 그냥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만남이 한 대여섯번 계속 되는데도
이 남자 당최 내 옆에 다가올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오늘은 여섯번째 만나는 거니까 손이라도 좀 내어줘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같이 영화를 봐도
암전의 화면이 와도 손을 잡기는 커녕
옆으로 몸을 기대오는 것 조차 없었다.
처음엔 남편의 이런 담백함이 너무 좋았는데
만나는 횟수가 반복되다보니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잡겠지 잡겠지 하며 아무 일없이 손만 놀리다가
어느새 남편과 여덟번째 만나는 날이 되었다.
참.. 사람 맘이 간사하다고 이렇게 나오니
처음과 다르게 내가 이성적 매력이 없나?
두번만 만나도 들이대오던(-_-;;) 일반 남정네와는
참 다르다 싶어서 좀 경외롭다가도
한편으론 이 사람 나를 좋아하긴 하나?
나한테 호감이 있긴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고
만남에 회의가 생기기도 했다.
우리가 여덟번 째 만난 날은
그 당시 히트작 “괴물”을 같이 봤는데
그래.. 영화를 빙자해서 신중한
이 남자가 손을 잡아오겠구나.. 싶어
혹시 모를 정전기 방지를 위해서 핸드로션 듬뿍 바르고
학원 섭을 마치고 그와 심야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괴물이 한강 아래서 덤블링을 해대도.
배두나랑 송강호가 엎치락하면서 괴물과 사투를 벌여도.
이 남자 화면만 주시할 뿐 내게 눈길 한번 안주는 거였다.
아..이런 망신이.. 이러다가 오기가 발동해서..
내가 그만 일을 저질렀다.
나를 잘 아는 분들은 내가 얼마나 낯가림이 심한지
정말 하고픈 말을 대놓고 못해 주저주저 하는지
내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나의 이런 반응을 보면 배꼽 잡고 뒤집어 지실 지도 모르겠다.
마침 비가 촉촉히 내리던 날이었는데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서는
남편에게 내가 먼저 그랬다.
“잠깐만요..저.. 안아주세요..” (-_-;;)
나도 모르게 이런 대사가 나왔다는게 너무 창피해
남편의 눈을 피하고 있을 때 우산은 떨어졌고..
우린……우산을 떨어뜨린 채….
다음은 상상에 맡기련다…ㅋㅋ
그런데 이렇게 정말 고결하기 이를데 없고
황진이가 와도 꼴리지 않을 우리 남편이 말이다.
친해지고 보니 그야말로 일본 에이브이 매니아였고
그는 전설적인 여배우 호노까의 팬이었던 것이다.
내 꾀에 내가 넘어갔다고 *동 보는 남정네를 혐오하던 내가
매니아급의 남정네와 결혼했던 것이다.
하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우리 시아버님..
그 옛날 서울대 심리학과 출신이신데
전공이 성심리연구 였단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아버님 책장에 빼곡히 들어찬 책들 속엔
킨제이 보고서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고
그런 리버럴한 아버님 덕에
울 남편 고딩 때부터 성인비디오를
아버지와 겸좌하고 보았다하니 말다했다.
시엄니가 비디오를 대여해오시고
반납까지 도맡으셨다니…..원….내참..
착각의 늪에 빠져 나는 성심리연구가 아버지를 둔
에이브이 매니아와 결혼한 것이었던 것이었다.
회사 일이 바빠서인지 요 몇해간
남편이 요상한 동영상을 보고 있는 모습은 전혀 보지 못했다.
글쓰다 보니 불현듯 만사에 덤덤해져가는 나와 더불어
울 남편도 늙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날의 사건 이후 우리는
서로 탐색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연인이 되었고
무더운 여름을 지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 길을 건너
함박눈이 쌓이는 그 해의 마지막까지 함께 보내고 있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몇 번의 헤어질 고비를 넘긴 후
남편은 자신의 신용카드를 내게 넘겼고
공동 적금 통장도 만드는 등
나와의 결혼을 기정 사실화 하였고
나또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와중에도
떡과 반찬을 배우며 예비 신부 수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결혼이 거의 기정 사실화 되고 보니
가진자의 여유랄까 정복자(?)의 확인 사살이랄까
남편이 나에게 왜 빠졌는지에 대해 호기심이 들었다.
정말 우연의 일치인 것인가..?
내 친구와 남편은 대학 동기였다고 했다.
친구와 나는 오래 전부터 영화모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나와 만나기 일년 전 쯤
우리 모임의 여자 후배를 남편에게
소개 시켜준 적이 있다고 했다.
모 여고 선생인 후배는 성격이 좀 강한거 빼고는
터프하지만 여성스럽기도 하고 약간 서편제에 나왔던
오정해를 닮은 듯한 인상의 여자였다.
남편의 대학동기이자 내 친구인 그녀는
그 당시 나보다 그 선생과 더 친했고
우리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 퍽 난감해 했단다.
소개팅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총 2번을 만났는데 모임 후배는
남편에게 호감이 있어 더 만나보고 싶어했고
남편은 아니다 라고 생각해서 연락하지 않았단다.
그 후로 시간이 지나 용기를 낸 후배가
다시 남편에게 술한잔 하자며 전화를 했는데
남편은 회사가 바빠 나중에 연락할께요. 하며
수습을 하고 일년여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뭐 이런 경우야 소개팅에서 비일 비재한 사건이니
그리 새로울 건 없지만
자신을 거절한 남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여자와
결혼한다고 할때는 기분이 묘할 것이다.
그걸 남편의 대학동기인 친구는 걱정해서
00이가 상처 받지않게 잘 행동해라고
나에게 당부의 말까지 했다.
그래도 성격좋은 그녀는 나의 결혼을 축하해줬고
결혼 날짜를 잡았단 소식에
나에게 지난 일까지 얘기했다.
“언니 실은 나 형부될 사람이랑..
예전에 소개팅 했는데 내가 채였어..–;;”
뭐.. 좀 껄끄럽기도 했지만
그녀의 이런 털털함으로 상황은 잘 마무리 되었고
마침 우리 결혼식에도 와서 축하해주었다.
(근데 그래도 껄끄러움이 남았던지 부주는 하지 않았다. -_-;;)
여튼 나의 이상한 호기심은 남편이 왜 하필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선생님은 거절해놓고..
왜 나를 간택했는지..
내가 남편에게 어떤 점에서 어필했는지
도대체 나의 어떤 점이 이 사람에게 먹혔는지
너무 너무 궁금한거였다.
사귀면서 지나치 듯 내가 물었다.
나는 이러 이러해서 당신이 좋았다.
당신은 내가 어떤 점에서 좋았느냐?
이렇게 주고 받기 식으로 물어도
다른데로 말을 돌릴 뿐 결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남편은 과거 연애사를 물어도
한번도 대답한 적이 없었다.
나중에 내가 하도 집요하게 물어대니
아무도 안 만났어. 이러는데 그냥 믿거나 말거나 였다.
남편은 굉장히 낭만적인 사랑을 숭배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
클래식이나 번지점프를 하다 식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반해
나는 이런 영화들을 내 식으로 표현해서
좀 유치하다라고 질겅 질겅 씹는 수준이라
둘의 영화 취향도 참 달랐다.
또 우리 남편은 좋아하는 여배우들이
손예진, 이은주, 박선영, 박예진, 박진희.
등등 무수히 많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별로 없어보이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 남편의 취향은
동글 동글 선한 인상의 여자들이었다.
참 분위기없는 여자 들만 좋아하네..
난 이여자 이여자가 차라리 낫던데..
이렇게 얘기하면 남편은
어찌.. 다 못생긴 여자들만 예를 드냐? 하는데
울 남편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보단
바탕을 보는 듯 했다.
아무리 뜯어봐야 나는 특이하면 특이했지
동글 동글한 미녀과는 아니라 툭 던지듯 말했다.
“자기 어찌 이리 분위기 없는 여자들만 좋아하면서
와이프는 이렇게 분위기가 흘러 넘치는 여잘 골랐냐?”
-_-;;
남편의 취향을 알고는 참 미스테리했지만……
남자는 아무리 머리로 여잘 좋아해도
여자로서 자신에게 어필하지 않으면
관계가 발전되지 못한다라는 식의 얘기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 …그래도
이사람에게 내가 이성적으로 어필했고
우리가 처음 만나 남편이 첫눈에 나에게 반한..
아니지.. 첫눈이 아니라 만나다가 반했던
그 순간에는 분명히 내가 손예진처럼 보였을 거야..
하고 믿었고
그 대책없는 믿음에 나름 뿌듯해졌다.^^;;
착각의 늪이라고 그러나..
한가지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우리 남편은 에이브이 매니아에 공포영화 매니아다.
공포영화도 스토리 있는 것보다
슬래쉬 무비라고 무자비하게 살육이 난무하는..
어떻게 하면 더 스릴 넘치게
싸이코패스가 사람들을 괴롭히는지에 대해 몰두한다.
(나도 공포영화를 좋아하긴 하는데 이런류보단
남편은 특히나 괴물이 등장하는 공포영화들도 좋아하는데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나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같은 괴물같은 사람이나
에이리언이나 프레데터류의 사람 같은
괴물도 무진장 좋아한다.
오죽하면 남편이 같이 보자고 한 영화가 괴물일까? -_-;;
그때 깨달은 것이다
남편은 손예진같은 동글한 미녀도 좋아하고
괴성을 질러대며 포효하는 프레데터도 좋아한단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우리 남편에게
어여쁜 손예진이 아니라
한마리의 갸날픈 프레데터였던 것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