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신선썰 1
신림동 신선
이들은 신림동의 지형상 가장 꼭대기 층에 존재하는데 그 이유부터 설명을 하겠다.
물론 그들도 과거에는 고시에 푸른꿈을 안고 신림동에 입성한 ‘초시생’의 신분이었다.
열정도 낭만도 패기도 있던 시절..
신림동 주민들은 알겠지만 도로와 가까울수록 신림동 방의 방값은 더 비싸진다.
대체적으로 초시생들은 도로와 가깝고 학원이 가까이 있는곳에 방을 잡는데 비용이 많이 들기에 초기에 부모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초시생들이 아무래도 그 비중을 많이 차지한다.
그러니까 초시에 붙어서 나가면 신선이 될 일이 없는것인데, 바로 저 위의 이유가 그것이다.
초시, 재시, 삼시, … N시
이렇게 될수록 금수저자식이 아닌다음에야 자본의 압박이 생기고 언제나 비싸고 좋은방에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장수생들일수록 학원 중심가에서 멀어진곳에 방을 잡게 된다.
장수생들은 신선들의 바로 밑라인인데 이 장수생들이 10년차를 넘어가면 비로소 ‘신선’이 된다.
신선들의 행동반경은 무척이나 좁아서 학원가에서만 생활하는 초시생들은 목격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당연히 그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는편이며, 어떤 고시생은 신림동 신선에 대해 존재유무도 모른채 합격해 나가곤 한다.
신림동 신선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곳은 바로 고시식당인데, 그들은 이 고시식당에서 식사를하며 친목을 다진다.
운좋게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한번 쯤 청강하길 권한다.
아, 그들의 나이는 대체적으로 40대초반에서 40대 후반이 주류를 이루는데, 법학적 지식과 고시생이라는 특유의 곤조 덕에 신림동 주민들과 간혹 마찰을 일으키곤한다.
그들의 대화는 단순히 일 이년전의 시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최소 10년전 이야기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의 시험과 현재의 시험은 차이가 있으며,
요즘시험의 장단점과 10년전 시험의 장단점을 줄줄이 읊어대며 현실비판을 하기 시작하는데 초시생들이 듣다보면 무슨 국가기관장들의 청와대모임을 방불케 한다.
각종 고시시험에 대한 경험이 웬만한 학원강사보다도 식견이 높기에 신림동 강사들의 평가는 이러한 ‘신선’들의 평가에 상위권이 되느냐 마느냐로 판가름이 나는경우가 많다.
신선들이 요새 어떤 강사가 요즘 트렌드에 맞다더라 라고 몇마디 떠들어주면
그걸 무슨 고대의 잠언인양 마음에 품고 소곤소곤대는 수험생들이 생기고 이게 곧 주류가 된다.
그들의 지식수준은 10년이상의 구력이 말해주듯이 교과서의 대부분은 눈에 익었기에 강사와 교재배틀을 떠도 강사가 확실한 우위를 점한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들은 그 실력으로 간혹 지상학원으로 내려와 채점자 알바를 하곤 하는데, 그 정확도가 상당하다.
이들은 좀처럼 신림동 주변을 벗어나지 않으며, 신림동의 해결사 노릇을 자처하기도 하는데 그들에게 법적 자문을 묻는 신림동 주민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편의점주인데 알바생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임금지불관계가 틀어졌다. 어떻게 해야하느냐
그들은 경찰보다도 이 ‘신선’들을 더 먼저 찾는데 더 웃긴건 이 신선들은 경찰이 와서 캐물어도 경찰을 오히려 당황하게 만들만큼 언변이 뛰어나다는데 있다.
신림동 경찰들은 그래서 이 신선들과의 언쟁에 개입하는걸 꺼려하며 신선들은 그렇게 신림동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신선들의 하루 패턴은 대체로 아주 비슷하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신선로를 가볍게 한바퀴 돈 후 고시식당에 출몰하여 밥을 먹으며 신선동기들과 요즘 국정운영의 세태에 열변을 토한다.
그렇게 밥을 먹고 맞담배를 한 후 뿔뿔이 흩어지는데 그들의 종착지는 대부분이 고시원이다.
고시원에 도착하여 오전시간동안은 책을 보는데 다아는것들이니 보는 듯 마는 듯 천페이지짜리 책을 10분만에 독파하는 기술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오전을 지나면 오후시간에 점심을 먹으로 고시식당에 나타나는데 이시간에는 친목을 따로하지 않는다.
신선들이 낮밥먹는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신 조용히 밥을먹으며 옆사람들의 대화를 관전하는데 옆 초시생의 말이 잘못됐을 경우 그 자리에서 정정을 해준다.
아주 정확하고 자세하게 정정해주기에 초시생들은 ‘뭐하는 분이시죠?’ 라고 묻곤 하지만 씨익 미소한번 짓고 사라진다.
저녁에는 다시 신선로에서 신선놀음겸 산책을 하고 저녁ㅇ 역시 고시식당에서 먹는다.
그러니까 고시식당 사장님은 많은 신선들과 친분이 있는데, 이분들은 거의 인맥이 주변에 판검사 있는 친구들과 비슷하다고 보면된다.
자기 밥주는 아저씨가 이런분쟁엔 어찌해야하냐고 물으면 신선들은 선심을 다하여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식은 앞에도 말했듯이 정확하고도 틈이 없다.
그렇게 하루를 마친 신선들은 고시원에서 그날 밀린 티비프로그램을 즐기며 현세대들이 좋아하는게 무엇인지도 캐치해 낸다.
요새는 어떤 걸그룹이 인기인지도 꿰고 있으며, 방송사의 핫이슈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신림동에서 10년이상 고시를 공부한, 스카이대학을 나온 지식엘리트 집단이며, 비록 고시에는 실패했지만, 신림동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인물들이다.
신림동 신선썰2
신림동 신선..
그들은 대체적으로 고시원 안에서의 공부를 선호하지만…
신선들도 바둑을 두듯 하루의 작은 일과에서 벗어난 여흥을 즐기고 싶어할때가 있곤하다.
그런 그들이 콧바람을 쐬고 싶을 때 주로 이용하는곳이 바로 공용 도서관이다.
그들은 공용도서관 역시 자기집 안방처럼 편하고 아늑하게 이용을 하는데
그들의 모습을 꾸준히 지켜보다보면 역시나 제법 비범한 면모들을 목격하게 된다.
도서관안에서는 여러가지 수칙이 존재하며, 굳이 글자로 적혀있지않아도 불문률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이용자들 전체의 편의를 고려하게 된다.
예를 들면 도서관안에서 떠들지 않기라든지, 열람실 안에서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아야한다든지 하는것들,등등의 대한민국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심도있게 밟은 지식인들이라면 다 알고있는 것들말이다.
아주 사소한것들에서 우리의 신선들은 비범함을 보이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휴대폰 이용수칙이다.
그들은 핸드폰의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여 무음기능따위는 사용하지 않는데 간혹 이 폰을 책상위에 그대로 올려두고 커피를 마시러 나간다든지,
화장실을 간다든지 하는 행동을 하여 대참사를 일으키는 경우가 usually하게 존재한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열람실안에 울려퍼지는 워낭소리같은 폰의 무게감은 단연 그들의 폰이다.
요즘 나오는 스마트폰은 진동 소리도 세련된 맛이있는데,
신선들이 사용하는 폰은 그들이 살아온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열람실전체에 존재감을 과시한다.
흡사 전투에서 이기기위한, 전의 고취를 위한 나팔소리처럼 말이다.
이들의 폰의 울림은 여타 수험생들이나 젊은 도서관이용자들과는 또 다른면이 있는데, 바로 진동의 지속성이다.
신선들은, 어울리고 연락하는 사람들도 과연 범상치않은 부분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끈기’라고 일컫겠다.
그들은 신선이 전화를 받을때까지 연락을 멈추지 않고, 지속적이고, 집요하며, 인내한다.
주인잃은 진돗개마냥 울어대는 폰의 진동에 짜증이 난 이용객들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하나 둘 들어 올릴때 쯤 신선은 그렇게 등장한다.
잠결에 보면 ‘관상’의 이정재가 등장하는씬의 뺨따구는 후려치는 임팩트를 선사한다.
자신의 폰이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에 만족한다는듯이 여유롭게 폰을 들어올리는데, 이는 신선들 처럼 여유로운 자들만 가능한 패시브 스킬이라 하겠다.
아,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신선들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가볍게 흘려가며, 울려대는 폰을 들고 열람실 밖으로 나가기를 시도하는데 그들의 비범함은 여기서 또 한 번 드러난다.
바로 열람실 출입구를 1미터정도 남겨놓은 곳에서 폰의 통화기능을 사용하는데, 이게 무척 자연스럽다.
굳이 한발자국을 더 걸어 문을 여닫고 통화하는 수고로움따윈 개의치않는다.
“어어, 웬일이야? 전화를 다하고?그게..~”
문장의 첫마디까지 듣게되어 신선이 무슨통화를 하는지 어렴풋이 알게되는데,
이들이 대단한 점은 대화내용이 무려 ‘궁금하게’만든다는 점이다.
저런 신선들은 누구와 통화를 하는걸까? 결혼한거 같진않으니 처자식은 아닐테고, 대화의 시작점으로 보아 부모님이나 가족은 아닌듯 한데,
도무지 그 상대가 누구인지 몹시도 궁금하여 추리를 하게 만든다.
놀라운 능력이 아닌가? 폰울림의 짜증을 종국에는 호기심으로 승화시켜버리는 그 능력이..
필자는 저런 호기심에 한번은 신선을 따라나간적이 있다.
휴게실로 향하며 폰을 붙잡고 연신 웃어대는 신선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인데, 대화내용이 놀랍다.
‘중요한 내용이 전혀 없다’
요새 어떻게사냐는 대학교 동창의 전화인듯한데
“으응,나야 여기서 잘지내지 으응,너는 사업 잘되냐? 와서 밥한번 사 임마 ㅎㅎ”
그렇다.
신선들도 평범하게 학교다니며 친구도 만들던 때가 있었고 신선이 되지못한 평범한 인간들과 가끔 조우한다.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통화하는 신선을 보며 흡족한 미소로 내 자리로 돌아온 기억이 있다.
신선들은 도서관안에서 매우 바쁘다.
열람실 이용객들 신원 조사도 해야하고, 무슨 공부를 하는지 눈치도 살펴야하며, 열람실에 좌석이 불편하면 민원을 넣을 준비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은 바로 자신의 옆좌석과 앞좌석에 앉은 이용객이 ‘무슨 수험공부’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인데,
신선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건 역시 ‘고시 공부하는 자’이다.
무슨 일이든 10년 정도하다 보면 인이박히고,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우리의 신선들이야 오죽하랴.
혹시라도 옆좌석 이용객이 고시과목이라도 공부하고 있으면
마치 비밀리에 귀국한 헤이그특사를 마주한 고종인 것처럼 기뻐하는데,
그친구는 그 날 하루를 그 신선의 보살핌에 보내야 한다.
필자도 신선들의 보살핌을 받은날이 꽤나 여러날이라 많은 기억들이 남아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집필에 서술해보도록 하겠다.
그들의 따사로움은 꽁꽁 언 겨울 눈을 녹이는 봄 볕과도 같으며, 봄을 시기해 샘을 부리는 꽃샘추위를 밀어내는 봄바람처럼 자애롭다.
한여름 밤의 태풍처럼 몰아치다가도, 익은벼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가을바람처럼 살랑인다.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오지랖.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존재케 하였다’ 라는 말이 있다.
신림동에는 이런말로 대치할 수 있겠다.
‘강사가 모든곳에 있을 수 없어 신선을 존재케하였다’
신선은 어디에도 없지만,어디에나 존재한다.
신림동 신선썰3
신림동 신선…
그들은 신림동의 수호자들 답게 주변과 사방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며,
그들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마치 정령처럼 나타나곤 한다.
정령처럼 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들이 정말 어느순간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인데
필자가 여러번 경험한 기억이 있어 간단하게 풀어볼까한다.
때는 2012년.. 무더운 여름이었는데
원룸을 구해서 살던 난 원룸과 독서실에서의 공부가 지겨워 신림동에 위치한 관악구의 모대학 도서관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된 곳인지라 정답게도 나는 그곳에서 수많은 인간군상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의 뚜벅이는 발자욱소리를 남에게도 들려주고싶어하는 탭댄서들이나,
15초에 한번씩 코를 훌쩍여대는 훌쩍이 (이들은 그 15초를 듣는이가 신경쓰게 만들어서 15초가 지났는데 훌쩍이지 않으면 그를 바라보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열람실내에서 모든걸 지워버리겠다는 의지로 혼신의 지우개질을 하여 그 열의 책상을 모두 흔들거리게 만드는 흔들흔들 열매를 먹은 흰수염지우개,
그리고 자신의 연필 끝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아보기 위해 받침따위는 치워버리고 종이한장만 책상위로 올려 글을 써보는 딱따구리들.
모두 하나같이 우리에겐 친숙한 인물들이다.
우리의 신선은 저 위의 예들 중 한가지나 두가지 이상은 기본적으로 갖춘 도인들이기에 특별할건 없지만
신선들의 비범함은 이런것들이 아니다.
말했듯이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보살핌’이 필요한 유저들을 찾아내는데 그 일가견이 있다.
나는 그때 경제학을 공부중이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경제학은 인류사에서 손꼽는 천재들이 그 예민한 감각의 영역으로 돈을 어떻게 벌어볼까해서 나온 학문이다.
당연하게도 나같은 둔재는 그 영역을 이해하는데 무척이나 애를 먹고있었는데, 이를어쩜.
내 옆자리에 신선이 앉아계셨던것이다!
나는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부여잡고 솔로우모형을 이해하려 지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던걸 옆자리 신선께서 무척 안타깝게 보신모양이다.
잠시 머리에 산소를 넣어주기위해 로비로 나와 바람을 쐬며 음료 한잔을 마시는데 그 신선이 나에게로 다가와 말하셨다.
“경제학이 많이 어렵죠? 허허, 저도 초반엔 고생 많이 했습니다 허허”
??
그 때 당시엔 초시생인데다 신림동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때라 신선의 존재에 대해서 나는 모르던 때였다.
하지만 그 때에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신선의 모습을 본 순간 직감적으로 느꼈다.
‘오래 공부하신 분이구나!’
“하하;;네 좀 어렵네요..하하;”
걸어오는 말에 대꾸를 안 할 수 없어 나도 옅은미소와 함께 대답을 해드렸는데
그게 바로 신선의 부성애를 자극했던지 신선께선 한껏 고양된 표정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들을 지하철 잡상인마냥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까 잠깐 보니 솔로우쪽 거시경제에 대해 공부하는거 같던데, 그 부분은 사실 어려운 부분은 아니예요.
많은 수험생들은 거시부분에서 많이 애를 먹지만 사실 경제학이라는게 그런식으로 접근하는게 아니거든~ 그런문제는….~~~…”
약 5분간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 내용이 지금 기억이 나질않는다.
단지 기억나는건, 그 분의 한껏 고취된 얼굴과 참 안 되었다는 듯한 표정, 거기에 얼핏얼핏 첨가된 자신감 어린 눈빛 이정도다.
“어때요? 이제 이해가 좀 돼요? 경제학 강의는 누구껄 들어요? 미시는 황xx가 유명하지만 거시는 좀 다를텐데? 강사선택이 중요한건 알죠?”
“…….”
고백하자면, 난 그의 말을 단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해가 된척, 그의 말에 깊이 감명을 받은 척, 거기에 그의 지식에 감탄하는 척 까지 섞어 3척의 조화로 그의 흡족함을 이끌어 내었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왔을때 나는 솔로우 모형보다 그의 존재가 더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가 5분마다 한번씩 나를 쳐다보았기 때문인데, 간혹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려운거 말해요 내가 다 해결해줄테니’ 라는 말을 애정어린 눈빛으로 대신 하곤 했다.
사실 ‘제발 물어봐줘’ 라고 느낀 건 그냥 기분 탓이다.
음…
그 날 저녁을 집에와서 먹지 않은게 내 실수라면 실수다. 신선께서는 내가 밥먹는 것까지 보살피셨기 때문이다.
“아휴. 아가씨가 밥을 그렇게 적게 먹으면 어떡해요.
수험생활이란건 마라톤이거든. 마라톤 선수가 밥 적게먹는거 봤어요?
쭉쭉 잘나가는 디젤차가 기름 안먹는거 봤어? 그러니까 마르는거고, 그러니까 아가씨가 경제학이 어려운 거야.
여자들 수험준비하면서도 다이어트 어쩌고 한다고 하는거 보면, 나는 참 안타까워~. 합격하고 빼면 되잖아? 안그래요?”
모두 맞는 말이다.
너무나 당연하고도 옳은말이라 나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아마 딱히 반박할 말이 없을거라 생각한다.
신선들의 대화방식은 늘 그렇다. 틀린 말이 없어 반박할 수가 없는게 그들의 공통된 점인데, 이상하게도 그 자리가 불편하다.
분명 아무 영양가없는 친구들과의 시시콜콜한 농담따먹기보단 나에게 피가되고 살이되는 말일진데 그 자리가 영 가시방석이다.
“…하하;; 네..오늘은 제가 속이 좀 안 좋아서요 하하;”
이 말을 들은 신선께선 또 다시 한껏 찌푸린 얼굴로 “아유, 저런..쯧쯧” 하시며 혀를 찬다.
그리고 다시 수험생에게 건강관리란 또 하나의 수험과목이라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셨다.
자신은 매일 한시간씩 신선로를 거닌다는 말을 버무려가면서.
느끼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내가 말을 바보같이 한면도 있긴하다.
좀 노련하고 감각이 있는 분들이라면 저런자리를 야무지게 빠져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선의 영역은 나에겐 개미지옥과도 같았다.
허우적댈수록 그의 영역에 더더욱 가까워져만 갔다.
개미지옥에 빠져들어 한참을 허우적대다 ‘아아…난 끝났어’ 라며 포기할때 쯤되서야 신선께서 먼저 일어나셨는데,
오늘은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하셨다.
꽤나 들뜬 모습으로 말이다.
‘무슨 약속이길래 저녁을 먹고 만나는거지?’라는 쓸데없는 물음이 내 뇌리를 스쳤지만 난 감히 궁금함을 표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오늘 조언들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민트향처럼 쿨한 제스처를 한 번 보이신 후 그분은 구름처럼 발을 놀리며 멀어져갔다.
축지법을 사용하는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빠른걸음으로 사라져간듯한 착각은 덤.
그 이후로 가끔 도서관에 갈때면 신선께서 친히 나에게 친밀함을 표하곤 했는데 그런 날은 난 집에서 밥을 먹고 오곤했다.
아, 내가 어려워 하는 경제학 문제를 아주 쉽게 설명해준 적도 몇번 있다.
아주 탁월한 강의력을 지니셨길래 놀란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 신선께서 나를 매우 귀찮게 한다거나, 중년들이 젊은 아가씨에게 찝적대는듯한 느낌을 준 건 전혀 아니다.
단지 그 분은 같은 걸 공부해온 선배로써 후배에게 지식을 나누어 주는게 기뻐보였을 뿐이다.
신림동 신선들은 대체적으로 신사적인 편이다.
최소한 같은 고시공부를 하는 후배들에게는 말이다.
그들의 사랑이야기도 2차 스터디를 하며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건 다음 편에서 상세히 다루어 보고싶다.
나도 매우 흥미롭게 들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러번 그들을 보며 느낀건 신선들도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들역시, 당연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사회적 동물이었으며,
오랜 수험생활로 인해 대화를 나눌 상대가 부족하기에 나같은 고시수험자들을 보면 기뻐하며 대화를 걸곤 했던 것이다.
나중에 그런 것들을 깨달았을 땐 나도 그분들이 해주는 보살핌에 악의없이 고마움을 표하곤 했다.
그러한 일종의 ‘반응’만으로도 신선들에겐 충분한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잠시 다른이야기를 하자면, 신선들만의 커뮤니티가 있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본적은 없지만,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그 커뮤니티엔 여자신선도 나타난다고 한다.
드문일이나, 그런 모임을 한번 가질 때면 여자 신선은 ‘홍일점’으로서 인기를 독차지한다는 걸 들은적이있다.
여자신선도 분명 존재한다는게 중요하다.
그들은 신림동에서 많은 수험생들을 관찰하고 돌보며 밤의 자경단처럼 수험생들에게 호의와 애정어린 오지랖을 부리곤 하는데
나는 그것을 ‘보살핌’이라고 말하고 싶다.
누구나에게 고시생활이 평탄하고 즐거울 수 없다는 걸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때문이다.
영화’다크나이트’를 보면 영화 말미에 배트맨에 대해 이런 설명이 나온다.
He’s a silent guardian, a watchful protector.
A dark knight.
좋아하는 장면이라 이 글을 마치며 첨부하고싶다.
‘신림동 신선’
그들은 침묵의 수호자이자, 자애로운 보호자.
신림동 신선썰4
신림동 신선..
앞에서 말했듯이 그들도 사회적 동물이자, 하나의 인격체이며, 외로움도 탈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불꽃튀는 사랑을 할 열정이나 마음이 남아있진 않을 거라고 말하는 건 우리네 인간들에 대한 무지라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다 타고 난 장작의 마지막처럼 뭉근한 따뜻함은 더 깊고 소중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부터 풀어내는 이야기는 내가 2차과목 스터디를 참여했을 때 직접 본 그들의 사랑이야기이다.
사랑이야기라고 해서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거창한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
우리네들이 평소 듣고 보던 그런 소소한것을 내가 보고 들은 관점에서 적어보고싶었기에,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펜을 들었다.
아니, 사실 폰으로 쓰는중이지만 펜이라고 해두자.
나는 2013년도 초에 2차시험 과목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관식 문제인데다 답을 논리적으로 서술해내야하기 때문에 나혼자의 시점으로 공부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 같이 편파적이고 중심이 없는 사람에게 2차과목을 홀로 공부하는 것은
나도 신선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일 수 가 있었기에 스터디에 가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신림동에서는 2차과목에대한 스터디가 활성화가 되어있고 스터디 할 사람을 구한다는 글은 흔하게 찾아 볼 수 있었기에 그룹스터디에 들어가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식의 스터디는 어떤 걸까라는 호기심과 약간의 긴장, 거기에 기대까지 곁들여져 살짝 들뜬 모습이었던 것 같다.
초심자의 행운이라고나 할까?
내가 들어간 스터디는 다들 나이대가 좀 있는 분들이었는데 모두 괜찮아보이는 분들이었다.
그들과 나이차이가 좀 나는 나를 격의 없이 반겨주었고, 이따금씩은 농담도 섞어주며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스터디의 구성인원은 나를포함 5명이었는데, 남자분이3명, 여자가 나포함 2명 이렇게 구성이 되었다.
나 말고 다른 여자 분도 나랑은 나이차가 꽤나 나는분이셔서 내가 초반에 많이 어려워 했는데 그 분은 나를 동생처럼 대해주셔서 생각보다 편하게 그 스터디에 녹아들 수 있었다.
거기 계신 분들은 다들 공부가 어느 정도는 일정 궤도에 오르신 분들이었고 실력들이 나보다는 굉장히 좋은 분들이라 나는 거의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된 적이 많았다.
그 분들을 따라가려고 당시에 나도 나름 무척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내 인생에서 뭔가를 아주 열심히 했던, 몇 안 되는 기억이다.
그렇게 그들 틈바구니에서 섞여가며 공부를 하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친밀도도 조금씩 높아지고
그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알아가는 그런 시간들 역시 자연히 늘어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나의 이야기도 그 사람들에게 해주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하면서 나의 시야가 넓어질때 쯤 나는 그 그룹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걸 눈치챘다.
터키 속담에 기침과 가난, 그리고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볼 때마다 감탄하곤 한다.
내가 어린시절 이 속담이 맞는지 실험을 해보고 싶어, 나오는 기침을 매번 참아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켁켁거리는걸 끅끅거리며 참고있으니 엄마가 미틴년이 다 되었네라고 하실 때까지 그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 이후로 그냥 어린 마음에 나는 저 격언을 매우 멋진 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저 표현을 우리 스터디 이야기에서 써먹을 수 있게되어 영광스럽다.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 스터디에는 여자가 두명뿐이었다.
여러 분들이 궁금해하는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저 다른 여자분인걸 나는 알기에 그 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그 언니는 그 때 당시에 나이가 30대 중반 쯤 되는 분이셨는데, 나이에 비해 동안인데다 꽤나 미인형 얼굴을 갖고 있었다.
나와 둘이 있을때면 웃으면서
“언니가 젊었을 적엔 남자 좀 울리고 다녔었지 호호”
라며 농담을 하곤 했는데 아마도 진짜였을 것이다.
말투도 다정다감한 면이 있고, 하고 다니는 모습도 여타 고시생과는 좀 다르게? 옷도 예쁘게 입고 잘 꾸밀 줄 아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예전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 언니를 좋아하는 남자가 바로 그 당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스터디를 같이 하는 남자3명 중 한 분이 그 언니를 좋아하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처음부터 나는 알아채진 못했는데 그 남자분이 무척이나 티를 안내려고 노력하셨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나서야 그 미묘한 흐름을 알 수 있었고, 처음 내가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다른 스터디원들은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내가 늦게 알아챈 건 내가 눈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스터디에 늦게 합류하였기 때문이다.
음..그렇게 믿고 싶다. 여러분은 그렇게 믿으시면 된다.
사람은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런 한 사람의 애정전선을 알게 되자 그 오빠
(라고 부르긴했지만 나이가 많으셨다. 40대초반이셨는데 마땅한 호칭이 없어 오빠라고 불렀다. 내가 아저씨라고 부르면 그 뒷감당은 여러분 몫이 되었을테니까)의 작은 행동들도 뭔가 큰 의미가 있어보이고,
그 언니 앞에서 뭔가 긴장한듯도 하는, 그런 모습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굳이 그런 의미부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 언니를 바라보는 눈빛’ 그것이었다.
언니를 바라보는 눈에는 한 없는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고, 마치 양봉하는 분들마냥 꿀단지를 눈으로 흘리고 계셨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이를 먹어도 사랑은 숨길 수가 없구나. 대단한 격언이야..
그렇게 시간도 봄볕을 받으려 따스하게 흘러가던 어느 날, 오빠가 나에게 조용히 물어볼 것이 있다며 나를 불러내었다.
당연하게도 그 언니에게 어떤 선물이 좋을까를 물어보셨는데 언니의 생일이 머지않았기 때문이었다.
음..사실 난 언니 생일이 가까워졌다는 걸 그때알았다.
스터디 내내 어떤 문제에도 자신감 있게 해법을 내놓고 스터디원들의 답안지도 같이 봐주며 많은 조언을 해주던 분이 여자 선물을 나에게 묻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고, 별처럼 많은 문제를 풀었어도, 사람마음 한켠을 알기는 어려운 것이었던지 그렇게 나에게 조언을 구하셨다.
선물이라…..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라고 농담하기엔 사뭇 진지한 표정이셨기에 나도 같이 고민을 하다 ‘머플러’라고 말해드렸다.
언니가 평소에 머플러를 뭘 살까 나에게 이야기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격적인 면에서도 큰 부담도 적고 언니가 얼마전에 언급했던 것이라 그것이 좋을거 같다고 말해드렸더니,
성탄절 앞둔 어린이처럼 기뻐하며 고맙다고 하시곤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뜨셨다.
그렇게 스터디원 언니의 생일이 지나갔다.
나는 괜히 초조하고 걱정이 되었는데 혹시 선물도 못준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 언니 앞에만 서면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태위태하고,
뺑덕어미 만난 심봉사처럼 맥을 못추던 분이라 그랬다.
나이를 얼마를 먹어도 사랑하는 사람앞에선 언제나 처음처럼 어려운 법…
보름이 지났던가.
나의 그런 사소한 걱정도 잊혀져갈 그 무렵. 언니가 그 날 머플러를 매고 왔다.
무척 예쁘다고 내가 말했더니 매우 좋아하시길래 산거냐고 묻자 언니는”아니 선물 받았어”라며 미소지었다.
누가 줬느냐고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 오빠가 기쁨을 참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속일 수 없다.
나나 스터디원들이나 2차 시험 준비에 점점 더 바빠지기 시작했다.
시험이 가까워져 갈수록 해야할 것들이 많았고 답안 작성을 위해 하루에도 수십장씩 a4용지를 써내려가곤 했다.
그 때 즈음에 두사람의 관계는 우리가 바빠져갈수록 더 가까워져갔는데,
아마도 시험에 대한 압박이 두사람의 마음을 더 가까이 만드는것 같았다.
우리네 사랑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랑역시 어려운 시기에 더 아름답게 꽃피우고 있었다.
사실 그 때까지만해도 난, 나이든 사람들의 사랑은 풋풋한 느낌이 없을 것이라는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보며 그건 나만의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두사람의 마음은 비 내린 후의 가을구름처럼 잔잔하고, 이른아침의 새소리 처럼 고아했다.
사랑을 시작하는 나이에는 많고 적음이 없다는 걸 두 사람이 말해주는 듯 했기에,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곤했다.
그 이후로도 그 두 분, 오빠나 언니는 나한테 가끔 연애에 대해 묻곤했는데, 사실 내가 조언해줄만한 건 딱히 없었다.
내가 연애경험이 많은것도 아니고, 사람마음을 꿰뚫어볼 만큼 통찰력이 좋은것도 아니기에 난 그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주기만 한 적이 많다.
사소한 오해로 다툼이 있을때엔 내가 서로에게 사정을 전해 두 사람의 오해를 푼적만 몇 번 있는게 다였다.
두 사람의 연애는 그렇게 평범하면서도 특별하게 조금씩, 느리지만 꾸준히 진행이 되어갔다.
시험 날, 그 이후까지도..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그 해에 수험생활을 관두었다. 변명할만한건 없다.
단지 내 능력이 부족했기에 시험에 붙지 못했고, 그 결과를 비교적 일찍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난 그렇게 그만두었다.
물론 시험을 그만둔 것일뿐, 두 사람과의 관계까지 관둔 것은 아니다.
두 분의 시험결과나 자세한 신상은 밝힐 수 없지만, 작년에 두 사람은 결혼을 하여 지금은 가정을 꾸리고 살고있다.
결혼식날 나보고 부케를 받으라고 하던 걸 간신히 거절했다. 부케 받을 나이는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 오빠는 사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신선’이었다.
오랜 수험생활에 지치고 힘이들어 더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잃었을 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스터디를 추진 한것이라고 했다.
나이만큼이나 긴 수험생활을 청산하고 싶은 마지막 발로였고, 그 곳에서 인연도 만났으니 어찌보면 성공한 셈이 아닌가 싶다.
내가 이 이야기를 좀 더 드라마적 요소로 양념을 쳐서 (이를테면 같은 스터디원의 삼각관계같은) 더 흥미롭게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있던게 사실이지만, 여러분들에게 그런 기만은 하지 않기로 했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네가 살면서 겪는 일과 다르지 않기에 내 시선으로 온전히 담아보고 싶었고 그거면 충분하기 때문에.
신림동 신선..
이 말은 내가 수험생활 때 모 강사한테서 들은 명칭을 따온 것이다.
오랜시간 수험생활을 한 장수생을 ‘신선’이라고 부르는게 생경하면서도 뭔가 친근하여 나도 그렇게 사용하곤 한다.
나는 비록 ‘신선’이 되진 않았지만 그들을 곁에서 보고 경험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글을 쓴다.
또한 그들이 가지는 애환은 우리들도 가지거나 가졌던 근심 걱정들이고,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해보고 싶었다.
프랑스 소설가 생떽쥐베리의 유명한소설 ‘어린왕자’에는 이런구절이 있다.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보아야만 비로소 보이지.”
그들을 처음봤을적엔 나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오래공부만한 그들에대한 나의 시선은 다소 냉소적이었던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을 마음으로 보게되면서부터 보이기 시작한건 그들이 남겨둔 따스함이었다. 열정도, 희망도, 나아갈 동력도 없어 보였던 그들이 아직도 가지고 있던 건 주변에 대한 따스함.
그것이었기에 난 마음으로 본 그들을 이렇게 글로 적는다.
신림동 신선썰5 (마지막)
신림동 신선..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신선이었던 건 아니다.
시험에대해 열정이 충만하던시절이 있었고, 패기가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음.. 사실 그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랬다. 오늘 쓰려는 이야기는, 그들은 어찌해서 신선이 되었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앞서 썼던 이야기들처럼 내가 겪었던 것들이고 수험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내 스스로의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다소 무거운 이야기일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선 가벼운 마음으로 풀어보고 싶다.
이번 이야기는 꼭 고시쪽뿐만이 아니라 그냥 여타 다른시험을 준비해 본 분들이면 아마도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거라 생각된다.
내가 준비했던 시험을 기준으로 하면 년초에 1차시험을 치르고, 그 시험에 붙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름에 2차시험을 치르는 과정을 가지게 된다.
1차는 객관식이며, 2차는 주관식 3차는 면접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1차 2차 3차까지 가진 시험이니만큼 신림동에서는 강의의 과정도 순환식이라 하여,
2차 주관식 시험의 일정에 맞추어 각과목을 여러번 강의하도록 한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각 1년의 과정은 2차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커리큘럼이 끝이 나게되는데,
이러한 싸이클덕에 수험생들에겐 1년이 너무도 빨리 지나가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부분의 수험생은 초시기간동안엔,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던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 수 많은 학생들 중에 붙어나가는 학생은 극소수일거라는 강사의 말에 제각각은 ‘그게 나야’라는 생각을 하곤한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반이라 했던가. 시작지점에 선 우리들 마음 속엔 쇠도 녹일법한 불길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험생들의 눈빛이 처음과 같지 않고, 내가 할 수 있을까란 의구심이 들고,
오늘만 쉬고 내일하자 라는식같은 자신과의 협상같은 것들에 대해선 굳이 이야기하지않겠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아시리라.
신선들은 오로지 ‘지식’의 영역에선 그 수준이 대단히 높다.
초시생들이나 공부가 아직 덜 된 나 같은 사람이 보았을 때는 그들이 정말로 거대한 산 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학원에서 출제하는 모의고사에서 우수한 답안으로 인정받아 수험생들이 그 답안지를 돌려볼때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어떤 수험생은 신선들과 친해져서 그들의 노하우를 얻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시험’이라는 부분은 오로지 그들이 가진 ‘지식’의 양만으로 판가름 나는것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사소한 시험이라도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험이라는 놈은 한 가지 무기로만 이겨낼 수 있는게 아니다.
그 날의 컨디션이나, 그 시험에 대한 압박감, 내가 그 시험을 잘 치뤄내겠다는 자신감, 모르는 문제에대한 배짱 등등등 수도없이 많은 것들이 필요한데 이 고시란 놈은 유난히도 그런 무기가 많이 필요했다.
어떤 신선은 시험장에만 들어가면 머리가 하얘진다고 했다.
하얀 답안지를 보고나면 자신도 머리가 하얘져서 답을 적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가는 분들도 있겠지만 시험이라는 놈은 간절하게 매달리면 매달릴 수록 손에 잡히지 않는듯한 느낌이 있다.
세월은 흘러가고 자신은 초라해지는데 시험이라는 놈은 저만치 달아나고 있다.
신선은 그를 쫓는악몽에 시달린다.
시험장에서 펜을 들어 그 놈을 잡아내야 하는데, 그 동안 시달린 ‘세월’이 그를 무겁게 찍어 누르는통에 신선은 또 그놈한테 지고만다.
특이한 기억으로 남았던 신선이 있다.
그는 15년을 준비했다고 꾸밈없이 말했다.
솔직한 분이셨는데 그 분은 다른 신선과는 달리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공부량에 대해 자랑을 하진 않았다.
2차시험을 한달여 앞두고 그분을 보며 내 러닝메이트로 삼았는데, 그 분은 아침7시에 독서실에 와서 밤11시에 정확하게 퇴근하곤 하셨기 때문이다.
독서실 다른 수험생들은 그분을 ‘세븐일레븐’이라 불렀고 그만큼 자기관리가 대단한 신선이셨다.
그런 분이기에 나도 자극을 받아 그 분과 비슷하게 시험을 앞둔 한달을 보냈다.
사실 나는 그렇게 하면서도 시험에 확신이 들지않았다.
내 머리에 대한 확신도, 시험을 이겨낼 수 있을거란 배짱도 나에겐 없었다.
이런 불안감은 결국 시험을 그르쳤지만, 그 와중에서도 내가 러닝메이트로 삼은 신선은 다를거라 생각했었다.
여러 날동안 여유로움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듯해보였기 때문인데 시간이 좀 지나 그 분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난 매우 놀랐다.
그 신선은 시험장에 들어가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그 분의 얼굴은 모든 걸 내려놓은듯한 초탈함이 보였는데 깜짝놀란듯한 날 보곤 오히려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이번에도 시험장에 들어가서 시험을 보지 못하면.. 그 자괴감을 견딜 수 없을거 같더라고.. 이번에도 실패하면 내 자신에 대해 핑계거리가 없잖아.
그럼 난 어떡할까 싶었어.
누가 물어보면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아 시험을 보지도 못했다라고 이야기하면.. 그들이나 나나 그래.. 다음엔 꼭 들어가서 잘보자 라는 합리화가 가능하거든.. 하나의 방어기제지..”
나는 그때 알았다.
신선들이야말로 압박속에 살고 있음을.
기나긴 세월만큼이나 무거운 시간이 그들을 숨도 못쉬게 누르고 있음을.
‘날고 싶으면 벼랑끝에 날 세워라’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디서 들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신선들은 자신을 벼랑끝에 세운사람들이다.
하지만 뛰어내리진 못했고 그리하여 계속 벼랑끝에 서있다.
뛰어내렸는데 날지 못하면 어쩌나 라는 생각이 그들을 계속 주저하게 만들고, 실패하게 만들고 있는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공부한지 얼마나 되었는지 묻지 않는다.
의미가 없기때문이다.
얼마를 공부했으면 그게 훈장이라도 되는게 아님을 우리네들보다 그들은 너무나도 냉정하고 아프게 느끼고 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장수생들에 대한 시선은 대부분이 냉소고 조롱이며 어떨 땐 멸시까지도 담고있다.
왜 저러고 사냐라는 말을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자주 했었다. 나의 시선도 많은 분들 처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초시를 지나 재시를 치고 그들에 대해 조금씩 알게된 후부턴 나 스스로는 저런말은 하지 않게 됐다.
그들의 삶을 내가 대신 살아줄게 아니기에 나는 그들을 있는그대로 ‘바라보기’만 하기로 했다.
살이 까질때로 까져 뼈가 드러나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소독약을 끼얹는다 해서 상처가 아무는게 아니듯, 그들의 삶에 대해 방안을 내 줄 것이 아니라면 난 그냥 관조적인 사람이 되기로 했다.
바둑을 가장 잘두는 사람은 바로 훈수두는 사람이라는 말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그들은 어찌보면 시험에 대해 ‘훈수’두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의 수험준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오지랖을 부리는건 훈수두는 사람의 마음처럼 네가 이기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 훈수가 귀찮고 고까워 보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그 훈수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서 글쓴이의 시선이 ‘따뜻하다’라고 해주시는 이유가 아마도 그래서 일것이다.
난 그들을 싫어하고 미워하지 않기때문에.
여기에서 처음 하는 말이지만 내가 결국 시험을 관둔 것도 신선의 ‘훈수’가 크게 작용했다.
내 나름대로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생각했지만 결국 시험에서 낙방했을 때 몰려온 좌절감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것보다도 더 시리고 아팠다.
나는 해낼 수 있을거란 자신감은, 바람앞에 꺾이고 만 선봉장의 깃대처럼 처참하게 부러졌으며, 충격적이고 내 모든 전의를 상실케했다.
그 어디에서도 내 마음의 위로를 찾을 수 없었다.
불합격의 결과를 받아든 날 저녁 신림동 거리를 걷다 발견한 건물뒷편 공터에서 어미와 생이별한 어린애 처럼 울어댔다.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면 고작 시험이 날 버린것 뿐인데, 그 당시엔 모든 세상이 날 버린 것처럼 느껴져 그 쓰라림을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어렵게 마음을 추스른 후에야 나는 다시 선택지를 받아 들 수 있었다.
시험을 다시 준비할까, 아니면 여기서 그만둘까.
짐정리를 하러 간 독서실에서 나오는 그 때에, 우연찮게도 신선이랑 마주쳤다. 내가 러닝메이트로 삼았던 신선이었다.
그 분은 얼굴만봐도 수험생이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안다고 농담을 한 뒤에 나에게 자신의 예전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분은 자신이 가진 어설픈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준비만하는 삶을 살았다고 했다.
준비를 시작했던 그때는 내 모든걸 걸고 준비했을만큼 열정도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만둘 용기가 없어 그만두지도 못하고 지금처럼 준비만 한다고 말이다.
이 시험도 극복을 못할까 라는 자만심이 결국 자신을 이 구렁텅이에 빠트렸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며 웃으셨는데, 참으로 씁쓸해 보였기에 난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헤어진후에야 나는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용기가 필요하면서도 용기가 부족해 보이는 아이러니한 결정이었다.
포기할때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다시 시작할때도 필요한건 용기기 때문에.
다소 글의 말미가 우울하게 흐른거 같아 여러분들께 죄송스럽다.
재미로 쓰는 글을 재미로 봐주시는 분들께 다소 우중충한 런던날씨같은 글을 써 송구스럽지만 이왕시작한 글 마무리는 짓고싶다.
난 사람과 헤어질 때에는 반드시 작별인사를 하는 사람이다.
류시화 작가의 시집 ‘사랑하라 단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이라는 책에는 아픈 돌에대한 시가 담겨있다.
‘시험실패’라는 타이틀은 나에게는 ‘아픈 돌’이었다. 처음에는 그 돌이 너무 아파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이따금씩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 돌을 만질 때면 그 모서리와 날카로움에 손이 베이고 꺼내기도 힘들 때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흐르는 물속의 모난 돌이 닳고 닳아 조약돌처럼 변해가듯이,
내 주머니 속의 날카로운 돌도 자주 만지고 쓰다듬을수록 그렇게 아프지 않은 돌이 되어갔다.
그렇게 이제는 그 돌을 아무렇게나 만져도 보고 주머니속에서 거리낌없이 꺼내어도 볼 수 있다.
시간이란 그렇게 많은 것들을 치료하고 변하게 한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중에, 현재나 과거의 상처로 쓰라림에 몸부림치는 분들에게, 나도 신선처럼 이야기해드리고 싶은게 있다.
‘시간이 흐르는 것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 시간의 흐름은 상처를 보듬기 때문에’
그 상처를 웃고 떠들며 내가 가진 돌처럼 여러사람에게 담담하게 꺼내어 볼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것이다.
내 돌이 더 예쁘지 않냐며 자랑하고픈 날도 있을것이니, 그 때를 대비하여 지금의 아픈상처를 더 예쁘고 조심스럽게 쓰다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