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다 잘 된다는 사주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 엄마 이야기”
우리 할머닌 그 집 큰아들, 우리 외할아버지께 시집을 오셨는데
그 남편인 외할아버지는 일년 중에 두달을 채 집에 안붙어 있는 직업군인이셨고
시모인 외증조할머닌 일찌감치 남편을 잃고 낮엔 종일 곰방대를 뻑뻑 피우시다가 밤만 되면 칼춤을 추시는 분이었지.
거기다 한참 어린 시동생도 둘이나 있었고 말야.
어린나이에 시집온 우리 외할머니가 시집살이를 얼마나 호되게 했는지 짐작이 가지?
우리 할머닌 밤낮없이 밭일하고 바느질해가며 시동생들을 학교보내고 시모를 먹여살렸어.
그런데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햇는데,
할아버지가 통 집엘 없으시니 하늘 볼 새가 없어 아이가 생기질 않는거지.
결국은 할아버지가 휴가를 나온 어느 날에 외증조할머니가 밥상을 뒤엎으며
이년이 우리 집안 대를 끊을 테냐며 외할머니 머리채를 잡은 뒤에야, 할아버진 이러다 색시 잡겠구나 싶어 휴가를 나올때마다 열심히 본가에 눌러앉아계셨다고 해.
그래서 우리 엄마 위로 이모 삼촌들 5남매가 태어났지.
우리 엄마를 가지셨을 때, 외할머닌 이 애를 또 낳았다간 내가 먼저 죽지 싶으셨다고 해.
낮엔 밭일하랴 5남매 돌보랴 시동생들 학교 보내랴 밤엔 삯일하랴
시모 시중들랴 우는 아이들 달래 재우랴 살이 쪽쪽 빠지셨다고 하니 말이야.
그래서 외할머닌 어디서 주워들은 대로 논에서 굴러버릴까 얼음물에 빠지면 애가 떨어진다던데 하며 애를 지울 생각만 하셨대.
어느 겨울날에 외할머니께선 물에 뛰어들 요량으로 바닷가에 서셨는데,
어찌 아셨는지 증조할머니가 뒷덜미를 잡아채시곤 할머닐 집까지 끌고와 마당에 내동댕이 치시며
“이년이 참말로 *씨 집안 귀한 손 잡을 일 있나!!”
며 머리채를 잡으시더래.
외할머닌 애가 다섯이나 있는데 뭐가 귀한가 싶어 억울하셨다는데, 시모가 글쎄 매질을 멈추며 하는 말이
“그 아는 날 아니까네 헛짓 그만하그라!!”
(그 애는 태어날 애니 헛수고 하지 말아라)
하더니 돌아서더래.
결국은 우리엄마가 태어났는데,
할머닌 도저히 이 애를 키울 자신이 없어서 낳아놓고도 방구석에 뉘여만 놓고 우셨대.
그런데 어째 아기가 울지도 않고 가만히 숨만 쉬고 있기에 이불로 덮어두면 이대로 죽지 않을까 싶어 그대로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두고 밭일을 나서셨대.
그런데 일부러 해가 다 지고 나서야 호미를 털며 돌아왔는데,
마루에 시모가 담배를 뻑뻑 피우시며 앉아계시더래. 그러더니 할머닐 보며
“헛짓 말라 했다이.”
하시며 일어나 나가시더래. 할머닌 이불덮어논 걸 시모가 보았나 싶어 얼른 방에 들어갔는데,
이불 덮어논게 그대로더래. 살며시 이불을 들어보니 아기가 쌕쌕 자고 있더래.
할머닌 이래도 살았으니 정말 태어날 애였나보다 싶어 그제야 젖을 물리셨다고 해.
외증조할머닌 어린 우리엄마를 보시며 입버릇처럼
“야는 평생 배곯을 일 없을끼다. 야가 집안을 세울끼야.
야한테는 뭐가 들어와도 들어오고 나가지는 않을 끼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
그리고 엄마가 네 살 되던 해, 외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할아버진 직업군인을 끝내시고 집으로 돌아오셨지.
외할머닌 이 남해 시골에서 평생 밭일하며 애들까지 무지렁이로 키울 순 없다고 생각하셨고,
집안 반대를 무릎쓰고 살림을 챙겨서 육남매를 업고 안고 부산으로 오셨다고 해.
덕분에 우리엄만 첫째 이모완 달리 계집애가 무슨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느냔 소리도 듣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지.
부산으로 온 지 삼년 쯤 되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군인으로만 사시던 분이 부산으로 올라와 하신 일은 공사판 노동이었지.
그러다 현장에서 추락하셨고, 그 위로 철근이 떨어져 돌아가셨다고 해.
소식을 전해 들은 할머니께서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셨고, 국민학교도 들어가지 않아서 집에 있던 엄마는 영문도 모른 채 함께 할아버지를 보게 되었대.
엄만 그때를 가장 후회한다고 해.
아직 키가 많이 작았던 엄만 할아버지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철근에 뭉개져 흉하게 피가 말라붙은 할아버지의 맨발을 보았는데..
아직도 그 발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제일 많이 운 것은 엄마였대.
남해 본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이모 삼촌들은 집안어른들이며 증조모 눈치가 보여 할아버지가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하고 키웠대.
부모 앞에서 자식이 예쁘다는 티를 내면 혼구멍이 나는 시대였다고 하니까 말야.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부산에서 자란 엄마는 늦둥이 막내이기도 하고
눈치볼 사람도 없어 할아버지가 아주 물고 빨며 우리막내 우리공주 하며 무릎에서 내려놓을 새 없이 예뻐하셨대지.
그래서 엄만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세달이 지나도록 밤낮없이 벽에 걸린 할아버지 사진만 바라보며 줄줄 울었다고 해.
밥도 거르고 잠도 안자고 울었다고 하니 집안 식구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지.
그렇게 또 울던 밤 울다가 지쳐 기절하듯이 잠들었던 엄만 컴컴한 방이 밝아진 걸 느껴서 눈을 떴는데,
벽에 걸린 할아버지 사진에서 퍼렇게 빛이 나더래. 놀라서 쳐다보고 있으니, 할아버지 목소리로
“숙아, 네가 참말로 이 애비를 따라올끼가..”
하더래. 엄만 반가워서 아빠 하고 불렀는데
사진이 귀신같은 몰골로 일그러지면서
“니가 이 애비를 따라올라꼬 이라나!!!”
하며 호통을 치더래. 그제서야 처음으로 엄만 죽은 할아버지가 무섭더라나.
흐르던 눈물이 뚝 그치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데,
“따라 올끼믄 이리온나!! 애비랑 가자!! 이리와!!”
하며 그 퍼런 빛이 엄마쪽으로 뻗쳐 오더래. 엄만 이불을 덮어쓰고 안가!! 아빠 가라!! 하며
벌벌 떨다가 한참을 지나 이불 밖으로 나왔는데 해가 뜨고 있더란다.
나중에 외할머니께 말했더니
“느그 아버지가 생전에도 그래 니를 이뻐하더만, 우리 막내 정 떼고 갈라꼬 왔다갔는 갑제.”
하셨다더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선 할머니가 돈벌이를 나서시는 수밖에 없으셨는데,
보험 판매 일을 다니셨대. 그런데 정말 우리 엄마 사주가 그런건지, 신기하게도
바로 위의 이모는 대학 등록금 댈 돈이 없어 고졸로 직장을 잡았는데도 엄마가 대학갈때에는 할머니 일이 술술 풀려서 63빌딩에 불려가 삼성 보험여왕 상패까지 받았더랬지.
친척들 중 몇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돕는게 아니냐고 하셨지만,
외할머닌 증조모가 말한대로 우리엄마가 복덩이라고 굳게 믿으셨어.
무당 시모에게 시달릴대로 시달려, 교회를 다니시며 미신이라면 콧방귀 끼시는 분이 되셨으면서도 우리엄마얘기라면
“갸가 참말로 집안을 세우는 아라 안하나”
하고 다니셨대니 말야.
그래서 우리아빠와의 결혼을, 할머닌 엄마 방에 못질까지 해가며 막으셨어.
우리아빤 아무 볼 것 없는 집 막내 아들로,
위에 장가도 못간 형이 셋이나 있었고 그 집안에서 유일하게 혼자 대학을 나온 그야말로 개천의 용이었거든.
당시 고려대도 들어갈 수 있었다던 아빨,
친할아버진 집안에 니를 서울까지 보낼 돈은 없다며 부산대로 보내셨고
그런 가부장적인 예비시아버지가 있는 집에 금지옥엽 우리 막내를 어찌 보내냐며 삼촌들까지 전부 반대를 했다고 해.
그런데도 우리 아빤 끊임없이 외가에 철판을 깔고 드나들며 할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을 했대.
그 모습이 친할아버지 눈엔 썩 아니꼬우셨겠지. 저도 우리집에선 제일 잘난 아들인데,
대체 제깟게 뭐라고 반대냔 생각이셨겠지.
그래서 아빠더러 엄마 생년월일을 좀 달라셔서 친한 철학관에 가셨겠지.
본래는 사주를 대충 본 담에 네 짝이 아니라더라 하며 반대하실 심산이셨던것 같은데, 다녀오시곤 마음이 싹 바뀌셔선
” 하늘이 두쪽이 나도 갸랑 결혼해야 한다이!!”
하시곤 과일까지 손에 들려 보내시더래.
나중에 들어보니,
그 철학관에서도 엄마가 집안을 세우는 기둥의 사주를 가졌다며
무조건 며느리로 들여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지.
결국은 아빠와 술도 마셔보고 인간성은 된 놈이구나 싶었던 삼촌 둘이 결혼을 허락하면서 할머니도 허락을 하게 되셨지.
내 동생이 태어난 그 해, IMF가 터졌어.
아빤 엄마몰래 주식을 했다가 전재산을 날리고, 우리가 살던 집까지 압류되는 지경에 이르렀지.
아빠와 사내커플이었다가 나를 낳으며 사직했던 엄마는 쌈짓돈으로 아빠의 빚을 막았고,
빚쟁이들을 전부 만나 설득했어.
나랑 내 남편이 돈을 벌 수 있어야 빚을 갚을게 아닙니까 꼭 갚을테니 회사엔 절대 알리지 말아주세요 알려져서 남편이 잘리면 댁들 돈도 못받는게 아닙니까 하고.
엄만 학습지 선생님으로 나섰고 녹즙배달을 했어.
그런데 희한하게도 엄마가 하는 학습지는 한달이 안되어
엄마들이 너도 나도 다퉈 우리 엄마 수업을 듣고 싶다고 전화가 빗발치고, 선생님 수업을 듣겠다며 두집 세집이 합쳐 한집에서 수업을 듣게 해달라는 전화까지 오는거지.
엄만 파격적인 승진을 했고 일명 인기 선생님이 되었어.
빚을 거의 다 갚았을 때 쯤 엄마가 결혼전에 다니던 아빠의 회사 전무님이 연락이 왔어.
다시 우리 회사에서 꼭 좀 다녀줬음 한다고,
*숙씨같은 재원이 없어서 참 아쉽다고 말야.
엄만 아빠 회사가 세워진 지 60년 이래로 처음으로 결혼 후에 복직한 여사원이 되었어.
아빠도 엄마가 복직한 이후에 계속해서 승진해 이사까지 되었어.
아빤 그제서야 이사람이 집안을 세운다는 말이 무엇인지 느껴지더래.
같은 돈을 쥐어도 아빠가 가지고 있으면 어느샌가 빠져나가는데,
엄마에게 맡기면 두배 세배로 불어나더라는거지.
엄만 아빠 위의 삼촌들도 다 도운 셈이 되었어.
할아버지가 늦게 들인 새할머니가 사채빚을 써서 집을 날린걸 엄마가 막았고,
직장도 못구해서 허덕이던 둘째삼촌도 엄마가 직장을 구해줘서 장가까지 들었거든.
내가 다섯살때에 엄마아빤 용하다는 무당집에 점을 보러 갔대.
다 쓰러져가는 옥탑에 앉은 눈에서 불빛이 나는 듯하던 아줌마는, 엄말 빤히 보더니
” 선생님 전생에 덕을 아주 많이 쌓으셨습니더.
그 덕이 깊고 수행이 깊어 이번 생에서는 무엇을 해도 잘되시고 계신 곳마다 일으켜 세우십니더.
부디 잘되셔도 저를 잊지 마시고 꼭 다시 찾아 오입시요.”
하시더래. 아빠가 그럼 저는? 하고 묻자
” 사장님은 돈이 강물처럼 쏟아드는 사주입니더.
그런데 그 강물이 다 빠져나가니 모이지를 않지예.
쏟아드는 족족 사모님께 다 내주이소. 사장님이 들고 있어봤자 다 남 좋은 일 됩니더.”
하시더래. 엄마 아빤 그냥 웃어 넘겼지만 10년을 지내고 나니 그 말이 그냥 넘길 말이 아닌 걸 알았어.
부동산을 사도 아빠 명의로 해두면 가격이 떨어지는데,
엄마 명의로 하면 지하철이 개통되고 병원이 생기는 등 돈이 모였거든.
내가 고1이 되던 해에 엄마 아빤 그 무당집을 수소문해서 찾아냈어.
다 쓰러져가는 옥탑에서,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신당까지 따로 둔 무당집을 차렸더래.
용한 분이었던 거지.
지금은 할머니가 되신 그 분께 다시 찾아갔더니 엄말 기억은 못하시더라는데 한참을 빤히 보시더니
” 이래 귀한 분이 어째 알고 오셨능가…”
하시더래. 아빤 사업을 하시게 되어서 그걸 물으러 간거였는데,
“무조건 사모님 명의로 하시소. 그라믄 환갑전에 두분 다 크게 성공하실거니까네 그때되믄 저를 잊지 마시라예.”
하시더라네. 그래서 지금 아빠 회사 사장님은 엄마야.
암튼 그분 말씀은 엄마 결정대로만 따르면 성공하게 된다고 하니 지금은 엄마가 우리집 대장이지.
가모장적인 집안이라고나 할까?
지금도 나는 신기해. 우리엄마가 전생에 무슨 덕을 어떻게 쌓았길래 이렇게 사주가 좋다는 걸까?
우리엄만 키도 작고 왜소한데다가 얼굴도 순하고 여리게 생겼거든. 여장부 이미지완 참 다른데 말야.
좀 길었지만 우리엄마 이야기야.